골로새서 1: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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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회복: 이미, 그리고 지금
이 땅에 벌어지는 여러 모습들을 보면서,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가.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데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고,
이럴 때 일수록, 친히 지으신 만물에 대해 방관하지 말고 역사하셔야 하는게 아닌가
불안함과 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오는 이해되지 않은 상황들.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만물을 그분의 뜻에 따라,
여전히 그 자리에서 신실하게 보전하고 계시고 있음.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안타까운 일들에 대한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과 방치와 방관이 아니라,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비롯된 모든 결과임을 살펴보았음.
진정한 이 모든 만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떠나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사탄의 권세의 지배 아래에 놓여, 모든 사람이 사탄의 종 노릇 하며 살아감.
분노와 원망, 근심, 걱정, 절망과 두려움만이 남아 있게 되고,
결국 사람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세상도 창조 질서가 깨어지게 되어,
진정한 자유함과 평안함 없이 늘 이러한 긴장감 속에서 살아가게 됨.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의 말씀을 하심.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은 곧 약속대로 오실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왕 노릇하는 뱀인 사탄 마귀의 권세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깨어진 창조 질서를 다시 영광스롭게 회복시키겠다는 언약의 말씀.
그리고 실제 예수님은 이미 역사적으로 이 땅 가운데 오셨고,
약속대로 세상을 상징하는 사탄 마귀를 이기셨음.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이 깨어진 온 만물을 회복하실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 되시는지?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골로새서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사도 바울은 지금 예수님을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선포함.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음에 따라, 모든 사람은 영적인 시각이 가려지고 마음이 닫혀져 멀어지게 되었음.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도, 찾을 수도 없는 영적 맹인이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해 주시지 않으면, 사탄의 종으로서 자멸하고, 파멸에 이르는 결과를 맞이하게 됨.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인류를 버리지 않으시려고, 모든 역사와 각 시대에 따라 친히 계시해주심.
그런데 계시해 주셨다고 해서, 이미 영적으로 시각이 어두어진 인류가 하나님을 온전히 볼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
출애굽기 33: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찾아와주셔서 자신을 계시해 주셨지만, 온전히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심.
왜냐하면, 죄로 물든 인류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직면하면, 사망할 수 밖에 없기 때문.
예수님께서 결국 여인의 후손으로 사람의 몸으로 이 땅 가운데 오신 것은,
이미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진 자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구체적인 증거이자,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시기 위함.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즉, 예수님께서 곧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또 그분이 살아내신 생애를 볼 때,
비로소 살아계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는 의미.
골로새서 1:16–17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이 모든 만물을 직접 지으신 창조주이심을 증언함.
세상에서 왕 노릇 하고 있던 보이지 않는 사탄의 권세들조차도,
결국 예수님의 통치 아래 있는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만이 온 만물을 회복하실 수 있고, 왜 유일한 소망인지를 알 수 있게 됨.
골로새서 1: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예수님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만물을 회복시킬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주권이 온전히 담겨 있다는 의미.
이 깨어진 세상을 본래의 영광으로 회복시킬수 있는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유일한 소망이 되신다는 것.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함.
당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존재로 부정하지 않았음.
그러나 예수님을 창조주 하나님 그 자체로 믿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한 명의 선지자적인 사람으로 보았던 것으로 보임.
오늘날 시대에서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하나의 성인 군자 정도로만 여기는 경향이 강함.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막연하게 알고 믿는게 아니라,
그분이 어떤 존재이신지를 명확히 알고 믿는게 중요하고,
또 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점검하는 것이 중요함.
2. 회복의 핵심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이 깨어진 세상의 질서를 다시 회복시키시기 위해 택하신 방법은 십자가.
이 세상의 논리 방식은 힘의 논리. 그 힘과 권력에 순응해야만 평안해지고,
또 그 힘에 굴복하지 않으면 불이익과 여러 어려움이 주어질 것이라고 함.
그리고 그러한 힘이 있어야, 악의 근원을 뿌리 뽑아서 싹 쓸어버리거나,
악이라고 생각되는 자들을 벌을 주거나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라고 생각함.
만약 이런 논리라고 한다면, 온 만물의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그 힘과 능력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을 다 쓸어버리시는 방식이 정의와 공의라 할 수 있음.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은 의인 한 사람도 없는 악인들이기에,
당장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앞에서 바로 죽음이라는 멸망에 처하는 것이 마땅함.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선택하신 방식은 그러한 세상이 추구하는 힘의 논리가 아니었음.
예수님께서 그런 방식으로 하셨다면, 결국 사탄의 방식을 똑같이 사용하신 것과 같게 됨.
빌립보서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방식은 창조주로서의 권위와 능력을 내세우는 것이 아닌,
자신의 모습을 종의 모습으로 낮추시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면서까지 섬기신 십자가의 길.
그러나 그 십자가의 길은, 자신이 지으신 피조물들에게 유린당하고 비난과 조롱을 당하는 수치와 모욕의 길.
더 나아가 십자가의 길은, 사람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모두에게 철저히 버림받는 가장 심한 저주의 심판대.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가 지은 죄가 바로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자 멸망의 저주였기에,
우리를 구원하려면 주님이 우리 대신 그 모든 수치와 저주를 온몸으로 다 받아내셔야만 했음.
세상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십자가는 실패하고 패배한 것처럼 보임.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십자가의 피흘림만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공의를 온전히 만족시키는 유일한 길이었음.
이처럼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온전히 만족되었기에,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죄의 저주가 깨어지고, 비로소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평이 시작될 수 있음.
에베소서 2:13–14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세상의 힘의 논리는 상대를 억누르고 배제함으로 나와 타인 사이에 담을 세우는 방식이지만,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방식은 자신의 육체를 제물로 내어주심으로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물고 친히 우리의 화평이 되신 십자가의 길이었음.
결국 온 만물의 깨어진 질서를 회복시키고 참된 자유와 평안을 가져오는 능력은 세상의 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희생과 헌신에 있다는 것.
3.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는 곧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을 의미.
골로새서 1:21–22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켜주신 목적은,
단순히 우리 각 개인이 구원받고 유익을 누리는 것에서 멈추지 않음.
인류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에 따라, 이 땅의 모든 창조 질서가 무너졌듯이,
이 모든 만물의 회복 역시 하나님과의 우리 사이에 끊어졌던 관계의 회복에서 시작됨.
골로새서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자들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인 교회로 부르심.
우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함.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어 우리와 온 만물을 회복하시는 길을 여신 것처럼,
주님의 몸 된 교회인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으로 나아가 무너진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온 만물 가운데 그분의 신성과 능력이 깃들어 있음을 알고,
우리 삶의 전방위적으로 함께 계시고 임재해 계심을 믿으며 살아가는 자들.
그렇기에, 주일에만, 또는 교회에만 하나님이 계시거나, 그 때만 생각하지 않고,
다시 세상에 나아갔을 때, 주님의 임재를 늘 의식하고 경험하기에,
하나님을 잊지 않게 되고 세상사람들처럼 살아가지 않게 됨.
세상의 방식은 타인을 밟고 올라가는 경쟁, 이기적인 권력 추구, 힘의 논리를 의지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방식은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고, 용서와 섬김의 사랑의 방식.
그리하여 내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 다툼과 깨어짐이 있는 곳에
그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있도록, 진정한 회복과 평안이 임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를 부르시고 세상으로 보내시는 예수님의 제자이자 그리스도인들의 빛과 소금의 사명이라는 것.
마태복음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