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다니엘 3: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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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3장 / 이제 풀무불이라는 시험 앞에서 히브리의 세 청년이 드러내는 믿음을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절대적 표준에 대한 신앙
당신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혹은 신앙적인 표준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십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것은 마느니 하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결론이 뻔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자기 합리와의 의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면 당연히 섬길 수 없는 것으로 알아야 했기에 거기에는 토론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절대적인 표준이었을 겁니다.
이 세 청년은 루터보다도 훨씬 더 위대했습니다. 루터도 “내가 이제라도” 식의 시험을 받았던 것입니다. "너가 이제라도 지금까지 한 말을 다 취소하면 너를 파문하지 않겠다."
저는 이 교황의 선언 앞에 루터가 이 세 청년과 같은 대답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고 늘 아쉬워합니다. 그는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루만 시간을 주십시오.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이 루터의 대답이었습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비롯한 그리스도인의 신성 등, 성경에 나타난 위대한 진리를 확립시킨 사람이 초대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인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과 더불어 논쟁하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던 아리우스라는 유명한 이단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나 말을 잘하고 상대방의 허점을 잘 지적해 냈던지 그의 말이 진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시 모든 교회가 삼위일체를 부인하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갔습니다. 이때 황제로 있었던 사람인 그 유한 데오도시우스입니다. 이 황제가 아타나시우스를 불러 놓고 말했습니다. “온 세상이 그대를 거스리고 있도다.” 이때 이 아타나시우스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 온 세상을 반대하겠소...
얼마 전에 타계한 유명한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스위스의 라브리에서 세계의 지성들이 모인 가운데 이 시대의 방향과 믿음의 갈 길을 제시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19세기에 일어났던 가장 커다란 비극은 사람들이 절대 가치를 버린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 박사의 표현을 빌리면, "그래서 현대인은 절망의 선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절대 가치, 절대 표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이전에는,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있고 절대적으로 그른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제 아래서 옳다 그르다 하는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19세기부터 사람들은 절대 가치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남자는 반드시 한 여인과 영원히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19세기 전까지는 누구나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을 깨뜨리는 사람들조차도 일단은 받아들이고 깨뜨렸습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이혼이 왜 죄냐'는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와만 살아야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냐고 따지고 들게 되면서 절대 표준과 절대 가치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의 도덕적인 혼란과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옛날에는 썩 내키지 않아도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내가 싫은데…"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는 절대 가치에 대해 현대인들은 "그것이 왜 우상이냐"고 따지며 절대 가치를 무시해 버립니다. 그러나 이 히브리의 세 청년은 우상 숭배 문제에 대해서는 토의할 가치조차도 없다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러한 타협하지 않는 절대적 신앙이 필요합니다.
둘째 /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앙
그들이 풀무불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이것은 만일 왕이 풀무불 속에 넣을지라도 하나님이 자기들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도 능히 건져내시리라는 것을 믿는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하나님이 능히 건져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가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 이상, 아버지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인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오늘처럼 무력한 시대 속에서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은 너무도 절실합니다. 질병에서 우리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지금도 신뢰하십니까? 귀신들린 자를 해방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지금도 신뢰하십니까?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 빠질 때마다 우리를 그 역경과 시련과 어둠에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지금도 신뢰하십니까? 기도할 때 하늘의 문을 열어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지금도 신뢰하십니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어떻게 이런 능력을 신뢰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또 그들은 믿음의 선배들의 경우에도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이 그들을 도와주셨음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짧은 인생 길에서 지나간 날의 경험을 되돌아볼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할 수 있게 됩니다.
셋째 /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신앙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불 앞에서 아주 유명한 고백을 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여기에서 멋있는 말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서 꼭 내 뜻과 반대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같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따금 하나님의 뜻이 내 소원이나 생각과 다를 때가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7절에서 그들은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이 풀무불 속에서 우리를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건짐 받기를 원하지만, 내 병이 고쳐지기를 원하지만, 내 사업이 번창하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그것이 아니어서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실상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일은 사실 신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내 소원, 내 의지를 거스리고 내 생각과 다르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 주님도 모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이러한 자세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신뢰입니다. 이런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기꺼이 대가를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대가(희생)를 지불할 각오가 없이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고백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순교신학입니다.
자, 이제 마지막 광경을 보십시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모두를 불 속에 집어 던졌습니다. 23절 이하를 보십시오.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옳소이다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네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23–25절).
왕이 불에 집어 넣은 사람은 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풀무불 속에는 네 사람이 들어 있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네번째 사람을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했습니다. 과연 그는 누구일까요? 성경학자들은 이 네번째 사람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구약 시대에 잠시잠간 나타나시곤 하던 그리스도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주님이 그들과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때때로 고난을 면제시켜 주시기 위해 우리를 보호하시고 구출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를 고난 가운데 그냥 두시되 고난을 겪고 있는 우리 곁에 찾아오셔서 그 속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는 역사를 행하십니다. 그것도 축복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아예 안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주님은 주님 자신만이 아시는 어떤 이유로 인해서 고난을 완전히 면제시키기보다 우리로 고난을 받게 하십니다. 어려움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또한 그 어려움을 감당하게 하시며 우리 곁에 오셔서 함께하십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불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체험하고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 후의 결과에 대해서는 3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절대적 표준을 고수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신앙을 견지한 결과 그들은 손해를 보기는커녕 더욱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이 세 청년을 불 속에서 건져내지 아니하시고 그냥 죽게 내버려 두셨다면 이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저는 이 세 청년이, "그리 아니하셨을지라도", 즉 기적이 나타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비록 기도의 응답이 나타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여전히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면서 순교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훨씬 더 위대한 신앙 아닙니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 세 청년은 위대한 신앙의 도전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주님을 믿고 살겠습니다. 신뢰하고 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절대적 표준에 따라 살겠으며, 주의 능력을 믿고 살겠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 능력이 나타나지 아니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고난도 시련도 감수하며 주님만 붙들고 살겠습니다.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살겠습니다. 주님 따라 살기를 원하나이다. 이 기도가 우리의 진정한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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