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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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39–40 NKRV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대지
연구는 있었으나, 사랑은 없었습니다 (39절)
성경은 정보가 아니라 관계의 언어입니다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마음이었습니다 (40절)
사랑으로 읽고, 사랑으로 살아내기

들어가며

10년 전에 제 아내와 교제하기 전에 처음으로 단둘이서 밥을 먹고 영화도 보고 데이트를 했습니다. 짧은 몇 글자를 받아 놓고는 방에 들어가 그 문장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다시 읽어봅니다. "오늘 재밌었어" 뒤에 마침표가 하나가 아니라 왜 두개가 찍혔는지, 물결표가 붙었는지, 이모티콘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답장이 5분 만에 왔는지 세 시간 만에 왔는지. 그 사소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우리는 왜 그렇게까지 파고들까요?
그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의 언어 앞에서 우리는 저절로 정밀한 분석가가 됩니다. 그런데 그 분석은 결코 차갑지 않습니다. 오히려 뜨겁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을까 봐, 그 마음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참 이상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누구보다 성경을 열심히, 치열하게 파고들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성경이 가리키고 있는 한 분 앞에서는 등을 돌려버린 사람들. 예수님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이야기입니다. 함께 본문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한복음 5:39-40, 개역개정)

1. 연구는 있었으나, 사랑은 없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들은 성경을 몰랐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토라의 조항 하나하나를 암송했고, 율법의 세세한 규례를 두고도 논쟁할 수 있었던, 당대 최고의 성경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연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여기서 "연구하다"는 단순한 읽기를 넘어, 아주 치밀하고 정밀하게 파고드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파고 또 팠습니다. 문제는 그 열심 자체가 아니라, 그 열심의 방향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느새 성경 '연구' 그 자체를 영생을 얻는 수단, 심지어는 목적으로 삼아버렸습니다.
낯설지 않은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는 무엇이든 빠르고 효율적으로,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에 익숙한 세대입니다. 예전에는 영상이 15분짜리 긴 영상도 많았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도 15분이었어요. 세상을 바꾸는데 최소 15분은 들였다는 거죠. 그런데 요즘은 15초짜리 영상에 길들여졌습니다. 그러다보니 한 문장을 가만히 오래 붙들고 있는 일은 생각보다 낯설고 힘겨운 훈련이 되어버렸습니다. 성경 읽기마저도 어느 순간 1년 1독 완주 기록, 큐티 앱의 연속 출석일수는 신앙 스펙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을 꾸준히 성실하게 읽어가는 습관 그 자체는 소중합니다. 다만 우리가 중요한 주제를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진짜 붙들어야 할 것은 '완독'이 아니라 '그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성경을 거울이라 불렀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거울이자 안내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거울 자체의 재질과 각도와 반사율을 아무리 정교하게 연구한들, 정작 그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지 않는다면 그 거울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거울을 손에 들고 평생 연구하면서도, 그 거울이 비추고 있는 얼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않았습니다.

2. 성경은 정보가 아니라 관계의 언어입니다

39절 후반부를 다시 보십시오.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성경의 모든 페이지, 모든 율법, 모든 예언은 결국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입니다. 성경은 도덕적 교훈이나 인생 원칙을 나열해놓은 매뉴얼이 아닙니다. 성경은 한 분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관계의 언어입니다.
다시 그 문자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온 문자를 우리는 정보 전달용으로만 읽지 않습니다. 몇 시에 어디서 만나자는 약속만 확인하고 곧바로 창을 닫아버리는 문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문장의 결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왜 이 단어를 골랐을까, 왜 이 타이밍에 답장을 보냈을까, 이 물음표 하나에 어떤 마음이 담겼을까. 이 모든 세심함은 사실 사랑에서 흘러나옵니다.
신학자들이 헬라어와 히브리어 원어를 연구하고, 문법 하나 구문 하나를 파고드는 이유도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한 톨도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랑의 몸부림이어야 합니다. 사랑 없이 하는 성경 연구는, 연애 편지를 앞에 놓고 맞춤법 검사만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분석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한 구절 한 구절을 자기 삶 속으로 천천히 끌어들여 인격적으로 만나는 읽기를 해야 합니다. 한 구절을 하루 종일 마음에 품고 되새기며, 그 말씀이 삶의 결을 바꾸어 놓기를 기다리는 읽기를 해야 해요. 빨리 읽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읽기가 아니라, 그 자리에 오래 머무르는 읽기입니다.

3.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진단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40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이 말씀이 참 아픕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몰라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보가 부족해서"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문제는 앎의 부족이 아니라 원함의 부재였습니다. 그들의 지성은 성경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들의 의지는 그리스도를 향해 닫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던져지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얼마든지 쌓아갈 수 있습니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모임에 성실히 참석하고, 심지어 누군가를 가르치는 자리에 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모든 것의 중심이신 그분 앞에 마음을 온전히 열고 나아가는 일은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분께 나아간다는 것은 통제권을 내려놓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가릴 것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정보는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하나님과의 그 벌거벗은 친밀함 앞에서는 한 걸음 물러설 때가 많습니다. 지식은 안전하지만, 사랑은 위험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진단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진단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가르쳐줍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이를 악물고 "더 사랑해야지" 애쓴다고 풀리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함조차 없는 마음에 원함을 심어주시는 분은 오직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펼 때 가장 먼저 드려야 할 기도는 이런 기도여야 합니다.
"주님, 제게 이해력만 주시지 말고 사모함을 주소서. 제 머리만 열어주지 마시고, 제 마음을 열어주소서."

4. 사랑으로 읽고, 사랑으로 살아내기

그렇다면 우리는 이번 주, 무엇을 다르게 해볼 수 있을까요.
속도를 늦춰보십시오. 오늘 하루, 짧은 한 구절을 붙들고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오늘 몇 장을 읽어야 진도가 맞지"가 아니라, "주님, 오늘 저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으로 성경을 펼쳐보십시오. 한 구절을 하루 종일 마음에 품고 다녀보십시오. 숏폼에 길들여진 우리의 뇌가 처음엔 낯설어하고 힘들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원래 시간이 걸리는 법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향한 지적인 수고, 곧 원어를 찾아보고 배경을 공부하고 주석을 읽는 그 모든 수고를 사랑의 언어로 바꾸어 보십시오. "내가 얼마나 아는가"를 확인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그분을 더 선명하게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다가가 보십시오.
그리고 사랑으로 살아내세요. 성경을 읽으며 느끼는 감동 그 자체가 목적지는 아닙니다. 사랑은 반드시 삶으로 흘러넘칩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은 말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성경을 정말 사랑으로 읽었다면, 그 사랑은 우리를 더 교만하게 만들지 않고 더 겸손하게, 더 너그럽게, 더 오래 참는 사람으로 빚어갈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내일 룸메이트를 향한 인내로, 후배를 향한 너그러움으로, 가족을 향한 용서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거울만 붙들고 있을 뿐 얼굴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가며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매일 여러분에게 편지를 보내오는데, 여러분은 그 편지에서 오직 약속 시간과 장소만 확인하고 곧바로 덮어버린다면 어떨까요. 그 사람의 마음은 단 한 번도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채, 서랍 속에 쌓여만 갈 것입니다. 그것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오늘도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편지의 결론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내게로 오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완독 기록도, 정확한 신학 지식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이 그분께 나아오기를, 그분과 사랑에 빠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부터 성경을 연구실의 자료가 아니라, 사랑하는 분에게서 온 편지로 다시 펼쳐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여러분의 삶으로 흘러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저희가 말씀을 연구하는 데는 익숙했지만 정작 말씀이 가리키는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는 서툴렀음을 고백합니다. 저희 머리만 열어주지 마시고, 저희 마음을 열어주옵소서. 오늘부터 말씀 앞에서 정보를 찾는 자가 아니라, 사랑을 받는 자로 서게 하시고, 그 사랑이 저희 삶으로 흘러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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