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멜렉의 최후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 view
Notes
Transcript

삿 9:46-57

찬송가 336장 환난과 핍박 중에도
오늘은 ‘아비멜렉의 최후’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겠습니다. 여러분, 두려움으로 유지되는 관계가 얼마나 오래 가는지 생각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직장에서 이런 상사 한 번쯤 보셨을 겁니다. 언성을 높이고, 눈치를 주고, 뭔가를 빼앗을 것 같은 압박으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사람. 그 팀은 겉으로는 조용합니다. 아무도 반박하지 않고, 다들 고개를 숙이고, 지시대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 조용함은 신뢰에서 나온 게 아니라 두려움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다가 그 상사가 자리를 잃거나 권한이 줄어드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그동안 눌려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옵니다. 두려움으로 세워진 것은 두려움이 사라지면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으로 묶인 가정과 두려움으로 묶인 가정은 위기가 왔을 때 완전히 다르게 반응합니다. 서로를 진심으로 믿고 신뢰하는 가정은 어려움이 와도 함께 버팁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권위나 경제력, 혹은 눈치와 공포로 유지되던 가정은 그 기반이 흔들리는 순간 뿔뿔이 흩어집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붙잡아두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언제나 시한폭탄을 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아비멜렉이 있습니다. 그는 형제 70명을 돌 위에서 죽이고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가 통치를 유지한 방식이 무엇이었는지 오늘 본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46절을 보겠습니다. "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엘브릿 신당의 요새로 들어갔더니." 세겜 망대 사람들이 아비멜렉이 세겜 성을 불태웠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쳤습니다. 어디로 갔습니까? 엘브릿 신당 요새입니다. 여기서 잠깐 멈춰야 합니다. 엘브릿은 히브리어로 '계약의 주'라는 뜻을 가진 바알 신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신당이 왜 중요합니까? 사사기 9장 4절을 보시면 바로 이 엘브릿 신당에서 세겜 사람들이 은 70개를 꺼내어 아비멜렉에게 주었습니다. 아비멜렉이 그 돈으로 건달들을 고용해 형제 70명을 죽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엘브릿 신당은 아비멜렉의 권력이 시작된 바로 그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그 신당 안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자기들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만든 바로 그 자리로 도망간 겁니다. 이게 얼마나 아이러니한 장면인지 아십니까?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만들었고, 이제 아비멜렉이 그들을 죽이러 왔습니다. 그들이 피한 곳이 아비멜렉의 역사가 시작된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자기들이 심은 것이 자기들을 향해 돌아온 겁니다.
아비멜렉은 47-48절에서 살렘 산으로 올라가 도끼로 나뭇가지를 베었습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도 같이 베라고 시킵니다. 그 나뭇가지를 가지고 내려와 신당 곁에 쌓고 불을 질렀습니다. 49절입니다. "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도 죽었으니 남녀가 도합 천 명이었더라." 천 명이 한꺼번에 불에 타 죽었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이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으십니까? 사사기 9장 20절, 요담이 그리심 산 위에서 외친 저주가 있었습니다. "불이 아비멜렉에게서 나와 세겜 사람들과 밀로 사람들을 사를 것이요, 불이 세겜 사람들과 밀로 사람들에게서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다." 세겜에서 불이 나오고,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 서로를 태울 것이라는 저주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정확히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비멜렉에게서 나온 불이 세겜 망대 사람들을 태웠습니다. 하나님은 요담이 한 말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것 같은 그 외침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정확하게 이루어진 겁니다.
두려움으로 세운 권력이 어떻게 끝나는지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아비멜렉이 처음에 세겜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만든 방법을 기억하십니까? 9장 1-2절에서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 것이 너희에게 더 좋으냐, 아비멜렉이 너희를 다스리는 것이냐, 아니면 여룹바알의 아들 70명이 다스리는 것이냐." 공포를 심은 겁니다. 우리 편이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너희를 지배할 것이라는 두려움. 그 두려움으로 사람들을 묶어두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잡혀있던 것처럼, 세겜 사람들도 아비멜렉이 만들어낸 공포 안에 갇혀있었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으로 묶인 관계는 반드시 그 두려움이 다른 방향을 향하는 순간 무너집니다. 9장 26절부터 보면 가알이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세겜 사람들에게 "아비멜렉을 섬길 이유가 없다"고 부추겼을 때 세겜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등을 돌렸는지 보십시오. 신뢰가 아니라 두려움으로 묶인 것들은, 더 큰 두려움이 생기는 순간 방향을 바꿉니다. 그리고 결국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불을 질렀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장면이 우리에게 묻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유지하고 있는 관계들, 내가 이끌고 있는 공동체들, 내가 쌓아가고 있는 것들이 무엇으로 세워져 있습니까? 진심과 신뢰로 세워진 것입니까, 아니면 어떤 이익이나 눈치, 혹은 두려움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까? 두려움으로 세운 것은 언제나 자기 안에서 불씨를 품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퍼부은 불이 결국 자기를 향해 돌아온 것처럼, 두려움으로 통제하려 했던 모든 것들이 결국 자기 자신을 태웁니다.
오늘 이 새벽, 내가 세워온 것들의 토대를 한번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두려움이 아닌 신뢰로, 강압이 아닌 사랑으로 세워진 것들입니다. 그 토대 위에 세운 것만이 흔들리지 않고 오래 갑니다. 신뢰와 사랑으로 관계들을 세워나아가는 성도님들의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대지 — 하나님이 갚으셨더라 (50-57절)
50절을 보겠습니다. "아비멜렉이 데베스에 이르러 데베스를 대적하여 진 치고 그것을 빼앗았더니." 세겜을 불태운 아비멜렉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데베스로 갔습니다. 성을 빼앗았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저항이 없었습니다. 세겜에서 천 명을 불태운 아비멜렉 앞에 누가 맞설 수 있었겠습니까. 두려움이 앞서서 달렸습니다.
51절에서 데베스 사람들이 망대로 피했고, 아비멜렉이 52절에서 또 불을 지르려 망대 문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세겜에서 통했으니 이번에도 통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입니다. 53절입니다.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니." 맷돌 위짝 하나에 아비멜렉이 쓰러졌습니다. 천 명의 목숨을 빼앗은 불을 질렀던 그 손이, 모든 가정의 부엌에 있는 가장 평범한 도구 하나에 끝났습니다.
그런데 54절을 보시면 죽어가는 순간에도 아비멜렉이 집착한 것이 무엇인지 나옵니다. "아비멜렉이 자기 병기를 든 젊은이를 불러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여인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할까 하노라." 죽어가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습니다. 어떻게 보이느냐가 끝까지 그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결국 부하의 칼에 찔려 죽었고, 55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비멜렉이 죽은 것을 보고 각기 자기 처소로 돌아갔더라." 아비멜렉이 죽자마자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지니 사람들이 흩어졌습니다. 붙잡아둔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56절과 57절이 이 이야기 전체의 결론입니다.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아비멜렉이 자기의 70인 형제들에게 행한 악을 그에게 갚으셨으며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돌리셨으니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임하였더라."
여러분, 이 두 절 안에 "하나님이"라는 주어가 두 번 나옵니다. 아비멜렉의 악을 갚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세겜 사람들의 악을 그들의 머리에 돌리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맷돌이 아비멜렉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갚으신 겁니다. 요담이 아무도 듣지 않는 것 같은 그리심 산 꼭대기에서 외쳤던 저주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정확하게 이루어진 겁니다.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습니다.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선언인지 아십니까? 세상을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이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았는데 손해를 봅니다. 바르게 했는데 욕을 먹습니다. 악한 사람이 잘 되는 것 같고, 불의한 방법을 쓴 사람이 앞서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서 흔들리는 것이 생깁니다. "정직하게 살아서 뭐 하나. 나도 그냥 세상 방식대로 살면 안 되나." 그 유혹이 슬금슬금 올라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갚으신다고. 아비멜렉이 형제 70명을 한 돌 위에서 죽인 그 악을 하나님은 단 한 줄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3년이 지나도록 아비멜렉은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요담의 저주가 그냥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때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공의는 느리게 오는 것처럼 보여도, 반드시 옵니다. 그리고 왔을 때는 정확하게 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내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내가 불의한 대우를 받았을 때, 하나님이 갚으실 것을 믿고 맡길 수 있다는 겁니다. 로마서 12장 19절에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원수를 갚는 것은 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내가 그 자리에 뛰어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공의를 믿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하나입니다. 지금 내 자리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처럼 두려움으로 사람을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내 것을 지키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내가 보는 곳에서만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요담이 그리심 산에서 외치고 브엘로 혼자 도망갔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아비멜렉의 권력이 거침없이 달렸습니다. 요담의 외침은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말을 듣고 계셨습니다. 요담은 결과를 보지 못한 채 도망쳤지만, 하나님이 그 말을 이루셨습니다. 내가 결과를 보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 오늘 이 새벽 내 삶을 한번 돌아보겠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습니까? 바르게 살았는데 손해를 보고 있습니까? 불의한 방법을 쓰고 싶은 유혹이 드는 자리가 있습니까?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갚으신다고. 내 손으로 갚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공의 앞에 내 삶을 맡기라고. 그리고 그 공의를 믿기 때문에 오늘도 정직하게, 말씀대로, 두려움 없이 걸어갈 수 있다고.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있음을 믿으며, 오늘 하루도 그분의 손에 나를 맡기고 바르게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문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이 새벽에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두 가지 모습을 보았습니다. 두려움으로 사람을 묶으려 했던 아비멜렉의 끝,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시다가 반드시 갚으신 하나님의 공의를 보았습니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임하였더라 —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고, 때가 되자 정확하게 이루셨습니다.
주님, 오늘 이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억울한 자리에서 내가 먼저 갚으려 했던 마음들이 있었습니다. 바르게 살기보다 눈에 보이는 결과를 먼저 쫓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두려움으로 관계를 유지하려 했거나, 불의한 방식이 더 빠른 길처럼 느껴질 때 흔들렸던 우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새벽,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있음을 다시 믿습니다. 내가 갚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먼저 움직이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갚으시고,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그 믿음 위에서 오늘 하루도 정직하게 살게 하옵소서.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손해가 되더라도,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임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억울한 것들을 주님의 손에 내려놓습니다. 내가 쥐고 있던 것들을 놓겠습니다. 주님의 영원하신 팔 안에 오늘 하루를 맡깁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기에 담대하게, 두려움 없이 오늘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