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공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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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 다시 이렇게 만나서 함께 말씀을 나눌 수 있어 참 감사합니다.
사실 작년 이맘때에도 제가 여러분 앞에서 설교했었거든요. 그때 진짜 너무 떨려서 완전히 굳은 채로 설교했던 기억이 납니다. 설교가 끝나고 혼자 맨 앞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주여..." 하고 한숨 쉬다 돌아갔던 게 정말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네요.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지난 1년을 돌아보니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갔는데요. 필리핀에 다녀와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올해 1월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아이가 찾아와 아빠가 되었고, 동시에 여러분을 섬기는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편', '아빠', '전도사'라는 이 타이틀이 하나씩 생길 때마다,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선택에 대한 무게감이 달라지더라고요. 제 선택 하나로 우리 가정이 영향받고, 또 우리 중고등부 아이들이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니까 중압감이 점점 커졌습니다.
하나하나 좋은 선택을 해서 삶을 잘 이어가고 싶은데, 때로는 "내가 너무 잘못된 선택을 한 건가?" 하는 생각에 혼자 자책하고 괴로울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참 매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4년 전 군대에 입대하기 얼마 전 이야기입니다. 입대가 다가오니까 하루하루가 너무 아까워서 "군대 가기 전에 재미있는 거 다 해보고 싶다!" 싶었죠. 그때 친구 한 명이 유명한 웹툰 하나를 추천해 주면서 꼭 보라는 겁니다.
사실 저는 평소에 만화나 웹툰을 그리 즐겨보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에이, 괴물 나오고 싸우는 만화라는데 보지 말까?' 하다가 고민 끝에 딱 켰는데... 세상에, 그 자리에서 이틀 만에 끝까지 다 정주행을 해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빠져들었냐면, 그 만화 속 세계관이 우리 현실이랑 참 닮아있으면서도 아주 기발했기 때문입니다.
그 만화 속 세상은 태어날 때부터 사람들의 능력과 신분이 1등부터 꼴찌까지 딱 정해져 있고, 평생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잔인한 세상이었습니다. 잘나가는 사람은 평생 잘나가고, 약한 사람은 평생 밑바닥에서 피눈물 흘리며 살아야 하는 일종의 계급사회였죠.
주인공 역시 그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남들에게 매일 무시당하고 찌질하게 살아가는 최악의 흙수저였습니다. 매일 죽을 고비를 넘기는 불쌍한 청년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이 최약체 주인공이 진짜 죽기 직전까지 몰린 절체절명의 순간에 아주 기이한 일이 일어납니다. 주인공 눈앞에 남들에게는 전혀 안 보이는 '초록색 안내창' 하나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기 시작하는 거예요.
거기에 마치 문제집 답안지처럼 딱 적혀있었습니다. [오늘 해야 할 일: 팔굽혀펴기 100번, 윗몸일으키기 100번, 10km 달리기]
처음에는 이 주인공도 "이거 내 환각인가?" 하고 의심했지만, 당장 살아야 하니까 그 안내창이 시키는 정답 과제들을 하나씩 깨나가지 시작합니다.
그 그랬더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십니까? 절대 바뀔 수 없다던 신분의 한계가 깨져버립니다! 정답 안내창이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인데 능력이 팍팍 오르고, 전설적인 무기들이 터져 나오면서, 세상에서 가장 약했던 소년이 혼자서 온 세상을 구하는 최고의 영웅으로 무섭게 성장해 나가는 겁니다.
그걸 보면서 제 마음에 
"와, 뭐야? 이거 진짜 내가 평소에 원하던 생각이었는데?!" 하면서 완전히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한 한편으로는 참 부러웠습니다. "와... 나한테도 인생에 저런 정답 안내창 하나 떠주면 진짜 인생 편하겠다."
왜 우리가 이런 이야기에 대리만족을 느끼고 빠져들까요? 우리 현실 삶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일 아침 눈뜰 때부터 밤에 감을 때까지 친절한 '정답 안내창' 같은 건 없고, 숨 막히는 선택지들만 쏟아지니까요.
아침에 눈뜰 때부터 지독한 고민이 시작됩니다.
"5분 더 자고 피곤함 줄이기 vs 지금 눈 딱 뜨고 일어나서 단정하게 출근/등교하기"
학교나 직장 가서는 어떻습니까?
"미래를 위해 열공하고 준비하기 vs 폰 밑으로 숨기고 SNS나 쇼츠 보며 당장 도파민 채우기"
인간관계 속에서는 더 심합니다.
"나한테 무례하게 굴고 뒷담화한 사람한테 시원하게 받아치기 vs 속 터지고 피꺼솟하지만 관계 때문에 참고 호구 되기"
매 순간 이런 지독한 선택지 앞에 홀로 던져지다 보니, 요즘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단어가 뭡니까? 바로 '선택장애'입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선택장애에 걸리고 벌벌 떨까요? 본질은 하나입니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해서 오답을 고르면 어떡하지? 내 인생 폭망하면 어떡하지?" 하는 깊은 두려움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학교에서, 사회에서 평가받고 점수 매겨지는 삶을 살다 보니, 인생에서만큼은 절대로 틀리고 싶지 않은 거죠.
그래서 솔직히 말해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교회 올 때 은연중에 하나님을 향해 똑같은 기대를 합니다. 
"하나님, 성경이 인생의 100점짜리 공략집이라면서요? 저한테도 그 정답 퀘스트 팝업창 좀 띄워주세요! 말씀대로 딱딱 퀘스트 깨서 신앙 레벨업 하고, 하나님 앞에서도 100점짜리 우등생으로 인정받아 볼게요!"
그런데 여러분, 과연 하나님이 '오늘'이라는 이 피곤하고 빡빡한 삶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진짜 이유가, 우리가 얼마나 퀘스트를 잘 깨나 감시하고 평가해서 100점짜리 '우등생'으로 만들기 위함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퀘스트에 실패하고 매일 넘어지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날마다 자책하고 불안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5장 참포도나무 비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향해 가지고 계신 진짜 가장 중요한 목표가 무엇인지, 그 깊은 비밀 3가지를 함께 알아보고자 합니다.

1. 내가 하나님 앞에 연기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 요한복음 15장 2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여러분, 이 말씀을 처음 읽은 여러분들 기분이 어떠신가요?
저는 옛날 중고등학생 때 NWWC 집회 가 가지고 이 말씀을 처음 읽었을 때 정말 막막했습니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제가 조금 강하고 화도 좀 있는 것 같은데
—열매는커녕 오늘 하루 버티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열매를 못 맺으면 잘라버리시겠다" 니요.
그래서 제 안에 가장 강하게 들었던 생각은
"아, 나 같은 건 조만간 하나님한테 잘려 나가겠구나"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완전히 불가능해 보였어요.
제가 한번은 이런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집회에서 은혜를 대박으로 받고 결단했습니다.
"아, 이제는 진짜 말씀 붙잡고 영적으로 갓생 살아야겠다!
매일 QT 하고 기도도 30분씩 해야지!"
근데 그 결단이 얼마나 갔을 것 같으세요? 1시간도 안 갔습니다. 
집에 와서 NWWC기간에 핸드폰을 못만지니깐 잠깐 아이들 연락 온 것도 잠깐 보고 누워서 못봤던 것들도 조금 보고 하면서 “딱 5분만 누워서 폰 보자" 했는데,
잠깐 시계를 보니까 5분이 아니라 5시간이 지나서 밤 12시가 되어있는 겁니다.
숏폼이나 보다가 하루를 다 망친 거죠.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오더라고요.
화부터 확 나는 겁니다. "하... 나는 오늘도 또 이 모양이구나."
여러분도 이런 경험 있지 않나요?
이 말씀을 마주하면 우리 안에 가장 먼저 올라오는 기괴한 패턴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좀 무너지거나, 기도도 못 하고, 말씀도 못 보고 하루를 망쳤을 때—제일 먼저 드는 감정이 뭡니까? '죄책감'입니다.
"아... 나 이러다가 하나님한테 제거당하는 거 아니야? 손절당하는 거 아니야?"
라는 마음이 은연 중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 죄책감이 들면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기도 자리에 나오는 것도 민망하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게 가시방석 같은 거예요.
그러다가 주일이 되어서 교회에 오거나 소그룹 나눔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그때부터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들 앞에서도 '연기'를 시작합니다.
속은 다 깨져있고, 어제까지만 해도 숏폼 보다가 왔으면서, 나눔 할 때는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최대한 올리려 애쓰며 이야기합니다.
"하하하, 그래도 이번 한 주 주님의 은혜로 잘 버텠습니다."
열매 없는 거 들키면 사람들이 판단할까봐 그래도 내가 가장 연약한 모습은 감춘 채 나누거나.
연약해서 내가 넘어진 영역이 있어도 딱 그거 잘 지나가고 다시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생각할 때 나누는거 같습니다.
제가 그럽니다. 그리고 우리 중고등부 친구들이 그럽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렇게 나아가고 인식할 때가 많은거 같습니다.
잘할 땐 당당하고, 못할 땐 죄책감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연기하는 이 유치한 패턴!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비현실적인 연기를 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잘할 때만 나오고, 못할 때는 연기해라!"가 아니라,
"너의 죄책감과 바닥친 진짜 모습을 있는 그대로 가지고 내 앞에 나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일까요?
우리가 못했을 때조차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연기하지 않아도 되는 진짜 이유가 원문에 나와 있습니다.
"제거해 버리신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아이로(αἴρω)'입니다. 이 단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건 잘하는 놈만 남기고 못하는 놈은 가위로 싹둑 잘라버릴 때 쓰는 단어가 아닙니다.
이 단어가 언제 쓰였냐면, 예수님이 38년 동안 땅바닥에 누워있던 중풍병자에게 찾아가셔서 
"네 자리를 '아이로'—손으로 잡아 들어 올리고 걸어가라!" 하실 때 쓰였던 단어이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시고 저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어깨로 '아이로'—짊어지고 들어 올리실 때 쓰였던 단어가 바로 이 '아이로'입니다.
즉, 이 단어의 진짜 뜻은 '싹둑 잘라내다'가 아니라, "바닥에 처박혀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것을, 손으로 살포시 잡아 위로 들어 올리다"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중동의 포도 과수원에 가보면 농부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뭔지 아십니까?
어리고 약한 가지가 땅바닥에 툭 떨어져서 진흙과 오물에 범벅이 되어 있으면, 농부는 절대로 가위를 들지 않습니다.
그 처박힌 가지 밑으로 손을 넣어 슬그머니 위로 들어 올려(아이로) 돌이나 격자 틀 위에 얹어놓고, 햇빛을 받도록 물로 흙을 깨끗이 씻어내 줍니다.
왜일까요? 포도나무 가지는 땅바닥 진흙 속에 처박혀 있으면 햇빛을 못 받아서 병들고 썩어 죽거든요.
가지를 살리려면 잘라내는 게 아니라, 반드시 손으로 '아이로'—잡아 들어 올려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농부 되신 하나님은, 열매 못 맺는다고 가위 들고 찾아와 잘라버리는 무서운 감독관이 아니라, 
진흙탕 속에 머리를 처박고 썩어가는 나를 살려내기 위해 직접 손을 진흙 속에 밀어 넣어 나를 들어 올리시는(아이로) 진짜 농부이신 것입니다.
자, 이 '아이로'의 은혜가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제가 이해하기 쉽게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조금 있으면 제 아이가 나옵니다. 태명이 조이인데, 벌써부터 태동을 엄청합니다.
근데 이 아이가 이제 걸을 때 쯤 됬다고 생각해서 막 일어나서 자기 혼자 걸어보겠다고 열심히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아이 마음속엔 "나 혼자 멋있게 위풍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어!" 하고 신나서 뛰어가는데, 현실은 어때요?
두 걸음 가다가 쿵 넘어지고, 무릎 깨지고, 길가 진흙탕 속에 머리를 푹 박고 고꾸라집니다.
그리고 혼자 머리를 박은 다음에 이렇게 생각하는거에요. 하,,, 망했다. 나는 왜 걷지도 못하냐 진짜 두 살이나 됬는데, 아직도 넘어지면 어떡하냐
아이는 무서워서 울지도 못하고 진흙탕 속에서 아빠 눈치만 보며 억지로 안 아픈 척 연기를 하려 합니다.
어떤 마음이 드나요?
아버지가 이야 너 아직도 넘어져? 안되겠다. 내가 혼자 걸으면 못걷는다고 했는데, 결국 너가 일을 내고야 말았구나. 너는 탈락이다. 라고 할까요?
아니요! 아빠는 자기 옷에 흙이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흙탕 속에 처박힌 아이 밑으로 손을 넣어 아이를 살포시 안아 들어 올리는 겁니다. (아이로)!
그리고 처음 말씀하시는 것이 뭘까요?
그러니깐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했지 ! 일까요?
아니요. 제가 아빠가 되는 입장에서 넘어져 있는 아이에게 가서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고,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면서 아빠가 말하는 거예요.
"괜찮아, 아빠가 뒤에 있잖아. 넌 원래 혼자 못 걷는 아이야."
“아빠가 도와줄게”
여러분 그거 아시나요?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세요.
내가 하나님의 자녀에요.
우리가 몇살을 먹었는지요? 아니요
우리가 몇살이든 우리는 아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세요.
포도나무 가지도 똑같습니다. 가지가 열매 무게를 못 이기고 진흙탕 속에 처박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가지는 원래 혼자 서 있지 못하는 존재니까요!
그때 농부 되신 하나님이 와서 가위로 잘라버립니까?
아닙니다! 자기 옷에 진흙을 다 묻혀가며 그 불쌍한 가지를 손으로 '잡아 들어 올려서(아이로)', 다시 기둥에 단단히 묶어주는 겁니다.
다음 날 아침에 가보면 또 진흙탕에 처박혀 있죠? 그럼 하나님 아빠가 "내가 어제 들어 올려줬는데 또 그래?" 하고 쳐냅니까? 아닙니다. 그다음 날도 또 와서, 처박힌 가지를 다시 들어 올려(아이로) 또 묶어줍니다. 지독하게 이 일을 반복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진짜 시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한 우등생 신자인지 감시하다가, 못하면 잘라내는 채점관이 아닙니다.
우리가 조금 잘한다고 당당해지고, 못한다고 죄책감에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연기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원래 혼자 걷지 못하고 매일 진흙탕에 처박히는 어린아이이자 가지 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건, 완벽하게 혼자 서 있는 척 연기하는 게 아닙니다. 진흙탕에 처박힌 내 무력한 모습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매일 아침 나를 찾아와 들어 올리시는(아이로) 하나님 아빠의 그 지독한 은혜의 손길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생활은 "내가 잘해서 100점짜리 열매를 연기해 내느냐"의 싸움이 아니라, 
"오늘도 진흙탕에 처박힌 나를 아무 조건 없이 들어 올리시는 하나님의 손길 위에 나를 내어맡기느냐"—이 싸움인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은 연기를 원하시는 게 아니라 바닥에 처박힌 나를 들어 올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들어 올려 십자가에 단단히 묶어주시는 '가장 치열하고 거룩한 은혜의 현장'입니다.

2. 환경이 아니라 농부를 바라보는 감사

본문 요한복음 15장 2절 후반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여러분, 1번에서 하나님이 나를 가위로 잘라버리는 분이 아니라, 진흙탕에서 살포시 들어 올려주시는 따뜻한 농부라는 걸 알게 됐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꼭 이런 의문이 듭니다. "
아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들어 올려주셨다면서... 왜 내 삶에는 여전히 아프고 힘든 일들이 일어날까?"
"왜 내가 좋아하는 인간관계가 잘려 나가고, 준비하던 시험이나 취업이 한 번에 안 되고 꺾이고, 내 뜻대로 안 되는 고난이 찾아올까?"
"봐라, 하나님은 지금 아직도 나한테 화가 단단히 나셨다. 지금 나 뭐 잘못하고 있어서 혼내시려는 거다."
우리는 내 삶에 시련이나 거절이 찾아오면, 또다시 무의식중에
"아, 내가 또 부족해서 하나님이 나를 잘라내시나 보다" 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가만히 보십시오. 본문은 그 아프고 답답한 순간을 향해 완전히 다른 해석을 제시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삶에서 무언가를 끊어내실 때, 우리를 잘라버리는 게 아니라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원문에 보면요, 여기서 "깨끗하게 하신다"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카타이로(καθαίρω)'입니다. 이 단어가 농경 사회에서 무슨 뜻으로 쓰였는지 아십니까?
바로 포도나무의 '가지치기(Pruning)'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사실 제가 평소에 다큐멘터리 보는 게 취미인데요, 한번은 포도나무에 관한 다큐를 봤습니다.
그런데 화면 속 농부가 진짜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을 하더라고요.
보기에 너무 멀쩡해 보이고, 심지어 잎사귀도 푸릇푸릇하게 돋아나 있는 예쁜 가지들을 가차 없이 싹둑싹둑 쳐내는 겁니다.
혼자 보면서 '아니, 뭐야? 저렇게 괜찮고 멀쩡한 가지를 왜 자르는 거지?' 싶었습니다.
마침 다큐 연출자도 똑같이 질문하더라고요. "아니, 농부님! 왜 이렇게 싱싱하고 괜찮은 줄기를 다 잘라버리시는 겁니까?"
그때 농부가 무덤덤하게 던진 한마디가 제 마음에 쿵 하고 박혔습니다. 
"이 불필요한 잡가지들을 잘라내지 않으면, 정작 핵심 줄기로 가야 할 영양분을 이 잔가지들이 다 빼앗아 먹습니다. 이걸 쳐내야만 진짜 열매 맺을 메인 줄기에 영양이 꽉 차서 단단한 포도가 열립니다."
제가 그 다큐를 보는데 순간 이 말씀이 확 깨달아졌습니다.
하나님이 농부이십니다. 예수님은 참포도나무이십니다.
그리고 그 포도나무에 접붙여진 메인 가지가 바로 '나'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의 최고 관심사와 목표는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나라는 존재가 잘 자라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무성하게 나 있는 주변 곁가지들은 내 존재 자체가 아니라, 내 삶에 붙어있던 부산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라는 메인 가지가 진짜 영적 영양분을 받고 풍성히 자라나게 하시려고,
때로는 나를 병들게 만드는 관계의 곁가지, 때로는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던 돈의 곁가지, 때로는 내 자랑이었던 명예와 야망의 곁가지를 잘라내시는 것입니다.
즉, '카타이로'는 나를 파괴하거나 벌주려는 심판의 칼날이 아닙니다.
나를 살리고, 내 삶에 진짜 영원한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농부 하나님의 가장 깊고 섬세한 '사랑의 손길'입니다.
제가 최근에 한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요셉의 이야기를 다시 보기 시작했는데, 이게 참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깊이 있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요셉의 인생을 보면서
"야, 요셉은 하나님께 다루심을 받아서 멋지게 승승장구한 최고의 성공 케이스다! 고난 속에서도 비전을 붙잡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신앙의 영웅이다!"
하고 제3자의 눈으로 쉽게 평가하곤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제3자의 관점을 내려놓고 요셉의 진짜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면, 그의 인생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괴로웠습니다.
원래 요셉은 어떤 아이였습니까?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그저 조금 눈치 없고 순수한 소년이었습니다. 자기가 "아빠, 나 좀 사랑해 주세요" 조른 것도 아니에요.
태어나 보니 아빠가 나만 유별나게 채색옷을 입히며 사랑해 주는 겁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꿈을 꿉니다. 자기가 "멋진 꿈 꾸고 싶다!" 해서 꾼 게 아니라, 그냥 어느 날 하나님에 의해 꿈이 꿔진 겁니다.
그런데 그 철없는 이야기를 형들에게 나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형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구덩이에 던지고 종으로 팔아버립니다.
우리가 성경으로 읽으니까 "아, 요셉이 많이 힘들었겠구나" 하고 넘어가지만,
열일곱 어린 나이에 형들에게 배신당해 낯선 외국 땅에 종으로 끌려가는 그 길... 얼마나 두렵고 끔찍했겠습니까?
그래도 요셉은 마음을 다잡고 보디발의 집에서 정말 최선을 다해 섬겼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멋지게 거절했으면, 하나님이 머리를 들게 하시고 승승장구하게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인도하신 자리는 왕궁이 아니라 '감옥'이었습니다.
감옥에 가서도 성실하게 죄수들의 꿈을 풀어줬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나갈 때 "꼭 나를 기억해 달라" 부탁했습니다. 이제는 복귀해서 나를 건져주겠지 기대했을 텐데, 그 관원장은 요셉을 감쪽같이 잊어버립니다.
여러분, 이 일들 중 단 하나만 겪어도 우리는 삶이 꺾이고 죽고 싶은 심정일 텐데, 요셉은 억울함과 배신, 잊혀짐을 몇 번이나 연달아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서른 살이 되어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총리가 되었을 때 요셉이 진짜 기뻤을까요? "와! 드디어 내 비전이 이루어졌다!" 하고 환호했을까요? 아닙니다. 총리가 된 후 낳은 두 아들의 이름을 보면 요셉의 깊은 회한과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습니다. 뜻이 뭡니까?
*"하나님이 내게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입니다.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들은 거창한 신앙적 선포라기보다, 그 모진 세월을 견뎌낸 한 인간의 입에서 나온 "아... 이제야 숨 좀 쉬겠다. 이제야 겨우 안정을 찾았구나" 하는 처절한 한숨과 안도감이었습니다.
시편 105편 17절부터 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의 이 삶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정확하게 나옵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여러분, 성경을 가만히 보세요. 요셉이 능동적으로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앞서 '보내셨고', 요셉은 '팔렸고', '매였습니다.' 전부 수동태입니다!
특히 18절에 "그의 몸이 쇠사슬에 매였다"라는 말을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여기서 '몸'은 '네페쉬', 즉 '혼, 영혼'을 뜻합니다.
직역하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쇠사슬이 그의 영혼을 뚫고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우리 말로 하면 완전히 '혼비백산'한 겁니다. 영혼이 뚫리는 고통 속에서 요셉은 무슨 비전을 품을 겨를도 없이, 그냥 정신없이 하나님 손에 끌려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혼란스럽고 억울한 수동적인 고난의 시간을 향해 뭐라고 말씀합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가지치기)하였도다!"
요셉은 자기가 멋진 꿈을 이루기 위해 100점짜리 신앙을 연기해 낸 게 아니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쇠사슬에 영혼이 뚫리는 아픔을 겪으며 진흙탕에 처박혀 있을 때, 
농부이신 하나님이 요셉을 주도적으로 잡고 다듬어 가신(카타이로) 것입니다!
나중에 가뭄이 들어 양식을 사러 온 형들이 자기 앞에 엎드려 절할 때야 비로소 요셉의 눈이 열립니다.
“아... 내 인생이 재수가 없어서 굴러떨어진 게 아니었구나. 형들이 나를 판 게 아니라, 농부이신 하나님이 온 세상을 살리시려고 나라는 가지를 먼저 이곳에 보내어 다듬으신 거였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청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이 요셉처럼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게 꺾이고,
쇠사슬이 내 영혼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은 답답한 터널을 지나고 계십니까?
"내가 잘못해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자책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끌려가고 있는 그 수동적인 고난의 현장은,
농부이신 하나님이 여러분이라는 메인 줄기를 가장 아름답고 단단한 총리의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해 불필요한 곁가지를 쳐내시는 가장 거룩한 다루심의 현장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이 그의 책 《고난에 답하다》에서 고난과 가지치기의 목적을 이렇게 명쾌하게 짚어냅니다.
> "하나님이 우리 삶에 아픔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억울하게 고통스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 힘으로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깨뜨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드시려는 사랑의 개입이다."
하나님이 내 삶의 잎사귀를 잘라내시는 이유는,
나를 근사한 우등생으로 세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내 잘난 맛, 내 힘으로 100점짜리가 되려던 내 모든 자랑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당시 세상의 스토아 철학자들도 '자족'과 '참음'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자족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기 위해 감정을 절제하고,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 다시 말해, "나는 괜찮다. 나는 어떤 상황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내가 내 감정을 스스로 다스린다" 하고, '나 자신'에게서 답을 찾고 견디는 강인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바울이 보여준 흔들리지 않음은 이것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감정이 없는 로봇이 아니었습니다. 기쁠 때는 기뻐하고, 슬플 때는 슬퍼했습니다. 동굴 속에서 억울해서 눈물도 흘리고, 감옥에서 매를 맞으며 살점이 터지는 고통을 그대로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힘으로 꾹 참아내는 100점짜리 신앙인이 되어서가 아니라, "내 환경은 잘려 나가고 소망이 없어도, 내 삶의 진짜 농부이신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그 사실에 내 모든 뿌리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스토아 철학은 나 자신에게서 답을 찾지만, 성경의 인물들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답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환경이 좋아서 감사하고 열매 맺은 것이 아니라, 환경과 상관없이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동굴에 갇혀 있어도, 감옥 바닥에 있어도, 내 뜻대로 안 되고 잎사귀가 다 잘려 나가는 가지치기를 당해도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의 삶의 중심이 내 환경이나 내 완벽함이 아니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제 삶에서도 쳐내신 곁가지가 있었습니다**
사실 저도 최근에 이 가지치기를 지나왔습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 걱정이 정말 많았습니다. 제 성격이 원래 걱정을 사서 하는 성격입니다. 혼자 계획하고, 혼자 염려하는 걸 좋아합니다. 근데 결혼을 했는데 제가 아직 학생인 거예요. 대학원생이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한 가정의 가장이 된 겁니다.
혼자 걱정이 엄청 되더라고요.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기도 시간에도 기도가 아니라 어느새 문제 묵상 시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혼자 문제를 붙잡고 "주여..." 하고 있는 거예요.
결혼은 분명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한 건데, 그 결혼에 대한 책임은 제가 지려고 하는 거죠. "나는 가장이니까." 이 생각이 버려지지가 않았습니다. 제가 붙잡고 있던 곁가지는 다름 아닌 "내가 이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자립심, 통제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나가는 오이코스 모임에 처음 들어간 날, 리더님께서 저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와, 짐을 엄청 지고 있네요. 하나님이 짐을 다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저는 속으로 뜨끔했습니다. 혼자 기도하는 시간에도 기도가 아니라 문제 묵상을 하고 있던 제 자신을 그제야 발견하게 된 거죠.
제 아내도 저를 보다 못해 이야기하더라고요. "여보, 하나님이 결혼으로 인도하셨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형편 다 아시는데, 결혼으로 인도하신 거면 책임지시겠지." 저는 마음속으로 '내가 그걸 모르나...' 했습니다. 누가 모릅니까? 저도 다 알고 있었어요. 근데 몰랐습니다. 진짜 지식뿐이었던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뉴와인스킨즈라는 모임에 혼자 짐을 잔뜩 지고 갔습니다. 모임 전에 찬양을 부르는데, 이런 가사가 나왔습니다.
> "나 어디 거할지라도 주 날개 나를 지키네. 그 그늘 아래서 나 주님을 노래하네. 외롭고 험한 길에 내 믿음 연약해져도 기다려주실 수 있는 주님. 늘 나의 곁에 계시며 내게 말씀하시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넌 두려워 말라."
이 찬양을 하는데 제 마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나의 아들아." "나의 아들아." "나의 아들아."
그 순간 '아, 맞다. 내가 하나님 아들이지' 하는 이 지식이 제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그러자 제 짐이 그 자리에서 그냥 내려지더라고요. 상황이 바뀐 건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학생이었고, 여전히 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안에서 이런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주님 앞에 나의 모든 짐을 맡깁니다. 하나님, 당신이 내 아버지라 참 감사합니다. 참 다행입니다. 주님을 신뢰합니다."
에이든 토저가 《하나님을 추구하라》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 "싸워서 깨뜨린 것이 아닙니다. 내어놓음으로 깨뜨린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소유욕에서 놓여났음에도 모든 것을 소유합니다."
이게 바로 카타이로입니다. 하나님은 제 환경을 바꿔주신 게 아니라, "내가 다 책임져야 한다"는 제 자존심의 곁가지를 쳐내셔서, 제가 오직 아버지 되신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리로 저를 옮겨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곁가지**
실제로 여러분, 우리 일상을 한번 돌아볼까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주님, 저 신앙생활 잘하고 싶어요, 진짜 열매 맺고 싶어요" 고백하면서도, 막상 내 일상을 채우고 있는 건 뭡니까?
밤마다 내 영혼의 에너지와 시간을 쪽쪽 빨아먹는 숏폼과 스마트폰 중독의 곁가지, 남들과 비교하면서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열등감과 인정욕구의 곁가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던 세상의 동아줄이나 인간관계의 곁가지들.
우리는 그 곁가지들이 내 환경을 좋게 만들어 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착각하면서 꽉 쥐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그 곁가지들은 내 영혼을 병들게 하고 진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입니다.
그래서 농부이신 하나님이 때로는 아픔을 무릅쓰고 우리 삶에 가위를 대시는 겁니다. 내가 그토록 집착하던 곁가지들을 쳐내시고, 내 계획이 꺾이게 하시고, 세상 의지하던 환경의 손을 놓게 만드는 가지치기의 시간을 허락하시는 것이죠.
그 순간에는 너무 아픕니다. "하나님, 나한테 왜 이러세요? 왜 내 환경을 안 풀어주세요?"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뒤를 돌아보면 깨닫게 됩니다. "아... 하나님이 그때 그 썩은 곁가지를 안 쳐내셨으면, 내가 하나님이 아니라 환경과 세상을 의지하다가 완전히 망해버렸겠구나. 내 힘을 빼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려고 그 아픈 가지치기를 해주셨구나."
**이것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오직 참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감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청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이유를 알 수 없는 아픔이나 꺾임, 내려놓음의 시간을 지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절대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잘라버리시는 게 아닙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내가 완벽해져야지" 하는 무거운 100점짜리 완벽주의를 잘라내시고, 내 힘과 환경을 의지하던 태도를 내려놓고 오직 주님 한 분만을 온전히 의지하는 가장 안전하고 복된 자리로 여러분을 인도하시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이 흔들림 없는 삶이, 이 감사가, 실제로 우리 삶에서 어떻게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요? 여기서 마지막 질문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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