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
Notes
Transcript
제목: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
[서론]
이사야 13장부터 23장은 세상 여러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예언입니다.
바벨론을 시작으로 앗수르, 블레셋, 모암과 이집트, 두로의 운명이 차례로 선포됩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전쟁은 단순한 군대와 무기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신들의 전쟁으로 여겼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이 심판받고 있다면 그 신인 하나님이 무능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셔서 그게 아님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작은 나라인 이스라엘만을 다시리시는 힘없는 신이 아니십니다.
모든 나라의 흥망성쇠와 역사의 흐름까지 결정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도 하나님을 너무 작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만 일하시고, 예배나 기도같은 종교적인 영역에만 관여하시는 분쯤으로 여깁니다.
세상의 정치와 경제, 직장이나 돈의 문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통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에서는 쉽게 세상의 방식을 따르려 합니다.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니 많은 사람들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믿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관념이나 경험 속에서 작게 만들어 놓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큰 어려움이 생기면 아무 것도 하실수 없는 하나님,
내 소원만 들어주시는 하나님,
교회 안에서만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들어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으니 우리의 삶이 변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세상에선 힘이 없으시고, 오직 교회 안에서만 왕이신 분입니까?
아니면 온세상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왕이십니까?
[본론1]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많은 나라들중 바벨론의 심판을 제일 먼저 선포하십니다.
지금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세력은 앗수르인데 왜 바벨론일까요?
지금은 앗수르가 패권을 쥐고 있지만, 훗날 바벨론이 새로운 패권국가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결국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당해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벨론이 일어나기도 전에 그 제국의 마지막을 먼저 보여주십니다.
이 말은 앗수르가 무너진 자리에 더 강력한 제국인 바벨론이 올라와도 그 어떤 제국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국의 이름은 바뀌어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바벨론을 심판하셔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요?
첫째, 하나님은 고통받는 백성에게 안식을 약속하십니다.
1절입니다.
1 주님께서 야곱을 불쌍하게 여기셔서, 이스라엘을 다시 한 번 선택하시고, 그들을 고향 땅에서 살게 하실 것이다. 그 때에 외국 사람들도 그들에게 와서, 야곱의 겨레와 함께 살 것이다.
분명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죄를 깨닫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기 위한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끝이 아닙니다.
회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무너진 삶의 자리를 회복시켜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까지 그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귀환을 돕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회복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강해졌기 때문에 돌아오게 된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회개했기 때문에 돌아오게 된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회복의 출발점은 이스라엘의 능력이나 자격이 아닌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란 단어는 원래 ‘어머니의 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레헴’과 관련이 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긍휼’이란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닙니다.
엄마가 자기 자식에 대해 느끼는 강렬한 모성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움직일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이 한가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입니다.
출애굽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간 노예생활을 하며 하나님께 울부 짖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하십니다.
그들의 고통 한가운데로 찾아오십니다.
기도할때 혹시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신가요?
이게 마치 수치스럽게 여겨져서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시편을 보십시오.
다윗은 왕이지만 하나님께 수없이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을 움직이는 가장 큰 요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막을수 없습니다.
3절입니다.
3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고통과 불안을 없애 주시고, 강제노동에서 벗어나서 안식하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긍휼은 연민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통과 불안,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그들을 바벨론의 압제에서 구원하셔서 안식에 이르게 하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안식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육체적으로 편안한 상태만 말하는게 아닙니다.
우리를 짓누르던 죄악의 멍에가 벗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리에서 두려움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일입니다.
그 분을 통해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신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이 고통과 아픔 속에 놓일때가 있습니다.
그럴때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의 위로만 주고, 우리의 고통은 외면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분의 긍휼하심은 끝이 없습니다.
긍휼이 넘치신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 와서 쉬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 안에 있으면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진정한 안식을 맛볼수 있습니다.
[본론2]
그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안식을 주실까요?
둘째,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심으로 안식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마음을 달래주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십니다.
자기 백성의 안식을 빼앗고 그들을 짓누르던 교만한 권세를 심판하셔서 안식을 주십니다.
13-15절입니다.
13 네가 평소에 늘 장담하더니 '내가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겠다. 하나님의 별들보다 더 높은 곳에 나의 보좌를 두고, 저 멀리 북쪽 끝에 있는 산 위에, 신들이 모여 있는 그 산 위에 자리잡고 앉겠다.
14 내가 저 구름 위에 올라가서, 가장 높으신 분과 같아지겠다' 하더니,
15 그렇게 말하던 네가 스올로, 땅 밑 구덩이에서도 맨 밑바닥으로 떨어졌구나.
13, 14절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내가’입니다.
바벨론 왕은 끊임없이 자신을 높입니다.
‘내가 올라가겠다’, ‘나의 보좌’, ‘내가 자리잡고 앉겠다’, ‘내가 같아지겠다’
바벨론은 수많은 나라들을 점령하고 민족들을 지배하며 교만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런 권력과 영화가 영원할거라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자리에 서고자 했습니다.
그의 찬란한 성공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높아질수록 누군가는 낮아졌습니다.
그들이 부유해질수록 누군가는 빼앗겼습니다.
그들이 안락함을 누릴수록 누군가는 강제노동과 억압에 시달렸습니다.
교만은 단지 마음 속으로 자신을 좀 높게 평가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만은 하나님 없이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 대신 내가 왕이 되어 사람과 세상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는 욕망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을 이용하게 짓밟습니다.
15절입니다.
바벨론 왕은 자신이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뜨리십니다.
22-23절입니다.
22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일어나 바빌론을 치겠다. 내가 바빌론을 멸하겠다. 그 명성도 없애고, 살아 남아서 바빌론의 이름을 이어갈 자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멸종시키겠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23 "또 내가 그 도성 바빌론을 고슴도치의 거처가 되게 하고, 물웅덩이로 만들며, 멸망의 빗자루로 말끔히 쓸어 버리겠다. 만군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도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가 ‘내가’입니다.
교만한 바벨론의 ‘내가’와 하나님의 ‘내가’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바벨론 왕은 “내가 올라가겠다”, “내가 보좌에 앉겠다”, “내가 가장 높으신 분과 같아지겠다.”고 말합니다.
반면 하나님은 “내가 일어나 바벨론을 치겠다”, “내가 바벨론을 멸하겠다”, “내가 멸종시키겠다”고 하십니다.
그럼 어느 쪽 말이 이루어질까요?
바벨론 왕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강한 제국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영원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교만한 자를 심판하셔서 자기 백성에게 안식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억눌린 자에게는 구원의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과거의 제국에만 적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안에도 바벨론 왕과 같은 마음이 있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하나님을 왕이라고 고백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내가 왕이 되어 살아갑니다.
“하나님 내 뜻대로 응답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 내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주세요.”
“내가 성공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조금 희생해도 어쩔수없습니다.”
이런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앉으려는 교만입니다.
내가 더 높아지기 위해 누군가를 낮추고 있다면 그것이 교만입니다.
내가 더 갖기 위해, 내가 더 편해지기 위해 누군가의 안식을 빼앗고 있다면 그것이 교만한 바벨론의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교회에서만 왕이시고, 세상에서는 힘도 못쓰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바벨론과 같은 거대한 제국도 한순간에 멸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나라의 흥망성쇠와 역사의 흐름을 쥐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으실까요?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두가지 사실을 말해줍니다.
첫째, 하나님은 고통받는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들의 신음과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고통과 불안, 억압에서 벗어나 안식을 누리게 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셔서 자기 백성에게 안식을 주십니다.
아무리 강한 바벨론일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바벨론과 같은 현실에 짓눌려 있더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알고 계시며, 하나님의 때에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온전한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혹시 내가 교만한 바벨론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지도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 왕이 되려 하지는 않았습니까?
내가 높아지기 위해 누군가를 낮추거나 이용하지는 않았습니까?
내가 편해지기 위해 누군가의 안식을 빼앗지는 않았습니까?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은 세상 왕처럼 높아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몸이 긍휼로 가득하셔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와 무거운 짐을 십자가에서 대신 지셨습니다.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을 믿고 의지합시다.
소망을 잃지 맙시다.
부르짖는 우리의 신음을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고 참된 안식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