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편 강해 3장

김남준 목사의 시편23편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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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목사의 시편 23편 강해 03-1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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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예, 저는 준비를 좀 하겠습니다. >> 네. 하세요. 영혼을 소생시키는 하나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시편 23편 3절 상반절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주 빠지는 영적 친체의 유형을 살펴보고 하나님이 신자 속에 생하시는 영적 소생만이 교회를 회복시키시고 땅을 고치시고 고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룰 수 있는 길임을 시작한다. 한다. 우리는 흔히 신앙생활의 저회가 되는 요인들을 우리 밖에서 찾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바르게 살지 못하고 능력 있는 그리스도의 살아가지 못하는 궁정의 원인을 고통스러운 인간 관계나 환경 같은 데서 차려보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의 커다 가장 커다란 대적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습니다.
(01:01) 그리고 가장 큰 대적 중에 하나가 바로 염려입니다. 가장 큰 적. 마태복음 어 여섯 번째 장애에서 우리는 이런 점에서 점에 대하여 놀라운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은 거듭난 가치를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전부께서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을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32에서 33절.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01:56)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러 같은 결혼을 말씀하시 어 말씀해 주시기에 앞서 공중에 나는 새와 같은 새와 드레핀 백합에 대해 말씀하셨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를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들의 백화파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어 수도 아니하고 길삼도 아니하시니라 마태복음 6장 26에서 28절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육신의 필요에다 염려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불신앙적인 삶인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은혜로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합당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이 세상 사례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그토록
(03:02) 사랑하고 재물을 탐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염려와 근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신앙의 염려와 근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신 대신 더욱 재물을 의지하며 살게 함이다. 극게하는 우리의 영적인 삶을 얻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대신 물신을 섬기며 살게 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보물이 있는 것 있는 그곳에는 내 마음이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내 눈이 성하며 온몸을 밝힐 것이요. 내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내가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거니와 혹이를 중이 여기며 저를 경이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장 21에서 24절 일단 염려가
(04:08) 우리의 마음을 을 지배하며 근심이 깊어지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막히게 되고 하나님의 영적인 관계가 어두워지게 될수록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려는 마음보다는 자신의 제주와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불신앙의 시도를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결과는 탐욕과 죄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재와 그의 임재 앞에서 살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인재 속에서 부어지는 그 능력의 신앙의 [콧방귀] 생활의 온동력으로 삼으며 매 순간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신앙생활의 승리를 이끌는데 가장 요인한 자산입니다. 참된 능력의 근원 어 시인이 고백하는 내용의 순서를 보십시오.
(04:58) 그는 먼저 하나님이 자신을 푸른 초장에 놓이시고 출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내 영혼을 소생시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죄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보편적인 인간의 염려에 메이지 않고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아가게 하는 참된 힘이 어디서부터 나오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인은 우선 내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시인의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나온 고백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셨던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시편을 읽으면서 우리들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저자인 시인들이 노래하고 있는 하나님은 모두 그들이 맛보고 경험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06:00) 그들은 한결같이 누구에게 듣고 배운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개인적이고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은혜 체험을 통해서 자신을 푸른 초장에 놓이시는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출만한 물가로 이끄시는 주님의 인도와 배려를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의 필요를 예비하시고 또한 우리를 평안 가운데 인도하시는 분이시지만이 같은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인도하심만을 가지고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인 우리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에는 충분치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유인 우리들이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단지 우리의 육신을 위하여 그렇게 준비하시고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호위를 힘입고 만족을 얻게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07:00) 먼저이 구절은 하나님과 시인과의 관계가 단순히 먹을 것을 주고받고 쉴 곳을 제공받는 물질적인 주고받음의 관계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은 반드시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들과의 관계는 그것보다 훨씬 더 깊고 넓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말합니다. 내 영혼을 소쟁시키시고 하나님의 더 넓고 깊은 인도와 예배하시는 은총은 시인의 영혼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는 어떻게 일하시는지 시인은 잘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영혼을 소생시키셨고 지금도 자기의 심령을 회복시키시며 앞으로도 자기의 신앙생활에 새로운 부흥을 주시리라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07:55)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은혜 인격과 은혜를 깊이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굳게 붙들고 살아가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영적 체험 곧 신앙의 회복은 바로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과의 관계는 단순히이 세상의 물질을 주고받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육신의 필요에는 민감하지만 영혼의 필요에는 둔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렇게 둔감한 우리의 영혼의 필요에 대하여 매우 세심한 배례를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의 필요를 채워 주고 싶어 하십니다.
(08:44) 시인은 이러한 개인적이고 영적인 체험이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일용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누리면서도 그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을 때마다 공급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육신의 목자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연약함에 둘러싸여 있고 결핍이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우리 영혼의 소생까지도 책임져 주시는 영혼의 목자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목자이시고 우리가 그분의 양떼임을 확증시켜 주는 가장 중요한 일이 영혼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09:34) 인간은 언제나 육신을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먹고 [콧방귀] 입고 마시는 것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만 먹이시고 입으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 없이 살아가는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기르고 먹이십니다. 마치 햇빛과 담비가 악인과 선인에게 거룩이 비치고 내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식탁만 살피시는 것이 아니라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식탁을 살피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이 세상에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 또 하나의 식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식탁입니다. 하나님이 그 영혼의 식탁에서 우리와 당신이 가족 관계에 있음을 확정하여 주십니다.
(10:29)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에게만 베풀어 주시는 특별한 은혜의 식탁으로 그들의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거품 신앙. 오늘날 우리 가운데 있는 심각한 위기는 신앙의 피상성입니다. 깊은 신앙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우선 신앙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상식의 거품을 걷어버려야 걷둬버려야 합니다. 신앙의 역적 특징을 깊이 파악하고 그 시체를 경험함으로써 신앙의 본질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의 문제와 다양한 세상 요구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답하 있는지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배워 가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도무지 신앙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11:21)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의 가치와 특성을 깊이 살펴보려고 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신앙의 본질에 대하여 생각하는 대신 복을 받아야 하겠다는 방향으로 생각을 돌리게 되면 문제는 점점 복잡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세적인 축복을 통하여 자기가 신앙적인 올바르다고 생각을 사실을 입증해 보려고 하는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그들은이 세상의 불을 누리고 어 번창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다는 증거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그 가치관과 사고가 복음을 영향을 통해 거듭나지 못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목자의 소원.
(12:17) 그러나 지인은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가 되시는 놀라운 증거가 바로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시 있다고 말합니다.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자기의 영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소생되는 영적인 회복의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또 낮고한 자신의 인생을 목자의 심정으로 돌아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각성합니다. 영혼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소생됨으로써 사람들은 기쁨과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죽은 자와 방불한 영적인 상태에서 소생을 하게 되고 재대신 화관을 근심되신 찬송의 옷을 입히시는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회복을 경험합니다. 이때 사람들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선한 목자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경험하게 됩니다.
(13:14) 성령 충만이 곧 운수 대통 만수 무강이라고 무강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의 신앙의 구도에서는 하나님의 목자 되심에 이러한 영적인 측면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침체 가운데 있던 영적인 삶이 놀랍게 회복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지치고 공고한 심령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소생시키시는 영적 체험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불신앙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은혜가 가치없는 나를 향하여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도 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단지 우리의 육신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14:06) 우리를 향한 목자이신 하나님의 진정한 관심은 우리의 육신적인 삶 이면에 있는 속사람의 상태입니다. 우리의 영혼 곧 우리의 내면의 영적 삶입니다. 시인은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며 일찍이 푸른 초장으로 자기를 인도하시고 목이 가람에 잔잔한 물가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와 려를 체험하였습니다. 이제껏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혜였고 지금도 오직 그 은혜를 인하여 살아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앞으로도 그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는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매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의 겉사람이 살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의 속사람 또한 날마다 공급하시는 영적인 은혜 없이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음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15:05) >> 관계를 새롭게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충만한 영적 삶을 기쁨 가운데 누리며 신앙의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시고 축복하시는 증거가 넘치고 있습니까? 혹시이 글을 읽으시는이 시간에 여러분은 여전히 공고하고 낙심한 가운데 영적인 침체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제껏 여러분의 인생의 여러 과정을 인도해 오신 그 사랑을 기억해 보십시오.이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향 향하여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길은 우리의 영적인 삶이 새로워지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갱신하는 것뿐입니다.
(15:57) 필요를 필요로 회복을 필요로 하는 공고한 영혼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유일한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이 자신이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영혼을 돌아보시고 은혜 베푸시기를 고대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만난 마리아의 찬양을 들어보십시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으면 그 계집종에 비천함을 돌 돌아보셨음이라.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으며 시키실 수 있으며 영적 삶의 소생 없이는 인생에 참된 기쁨이 깃들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소생을 경험하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은 나의 인생에 부족함이 없는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16:59) 이는 이는 또한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자들의 삶 속에도 회복이 필요한 영적 침체 상태를 겪게 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회복이 필요 없을 정도로 고향된 영적인 삶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누구나 침체를 경험하게 되고 공고한 영적인 상태에서 회복해 하시는 하나님의 소생의 손길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기 전에 지키시기 전에 먼저 우리는 그러한 영적인 소생의 필요를 느껴야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의 영적인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며 그것을 기초로 자신의 영적인 생 상태가 진정으로 회복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17:58) 그리고 회복된 가운데 살아가는 신앙생활과 지금처럼 침체 가운데 살아가는 삶이 만들어내는 신앙생활의 질적인 차이에 대하여 깊이 눈을 뜰 수 있어야 합니다.뿐만 뿐만 아니라 그러 자신의 현실을 향해 깊은 신앙을 늦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자신의 입이 무성한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별로 없게 만드는 그 모든 영적인 고갈의 뿌리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봐야 하는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영혼의 소망 하나님의 말씀. 그러므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자기 만족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에 영적인 회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그 회복의 길을 말씀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18:51) 계기가 무엇이고 방법이 어떤 것인지 이러한 영적 생활은 회복은 영적 회복인 생활 회복은 아니 영적인 회복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시작되고 진행됩니다. 내려오는 성경 읽거나 자기보다 훨씬 높은 영적인 생활을 영의하는 영의해 나가는 지체들과 대화하면서 그 위에 기틀에 있는 진리의 요소들로 말미암아 영적인 소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르고 강력하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지속적으로 귀를 기울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질 매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스스로 성경을 읽으며 쏟아지는 진리를 경험하고 주 앞에 자신의 삶을 결단하게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19:51) 기도의 영이 마르고 말씀을들을 수 있는 마음의 목마음이 없어서 들려오는 진리조차 깨닫지 못하는데 그가 어떻게 홀로 영혼의 놀라운 변화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영적인 회복을 갈망하는 사람은 먼저 침체에 빠진 자신의 영적 상태를 즉시하고 그러한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마음을 다해 고요의 길을 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무엇인가를 느끼려고 했쓰기보다는 깨려고 했쓰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망아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적당히 수리하며 하려고 들며 나아가 신앙을 자기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도구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20:4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특별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어 가지시고 영적인 회복을 주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기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결핍의 계곡을 지나게 하시고 환난의 파도를 해치게 하시는 때도 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의 우리 목자 되심을 붙들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비록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눈에 들리지도 아니하여도 하나님의 변함 없이 나를 돌보고 계시다는 놀라운 확진과 은혜 주심이 매일매일 영적인 삶 속에서 경험할 때 경험될 때 우리는 환경을 능강하는 사랑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 되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넘어 계를 지나고 노안 풍랑이 흰 이빨을 드러내며 의르렁되는 바다 한가운데 지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의 목자 되심을 붙으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오직 소생된 하나님과의
(21:49)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양된 우리의 관계를 단지 물질을 주고받는 관계로서만 확인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그런 차원의 관계를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 영혼의 목자이시며 영적인 삶의 주관자이심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을 의뢰하여야 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만이 우리의 목자이시고 참된 영혼을 회복시켜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굳게 믿으며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 수 있는 거룩한 회복을 주시기까지 말입니다. 개구리 곰탕 어느 대학의 실험실에서 개구리를 접시 위에 올려 놓고 열을 가하는 실험을 하였습니다.
(22:51) 평평한 접시 위에 참 물을 붓고 그 위에 개구리를 올려 놓았습니다. 물론 그 접시는 개구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뛰쳐 나올 수 있을만큼 평평하고 납작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접시 밑에 알콜올 램프를 켰습니다. 단지 심지를 조절해서 서서히 과열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매초 섭시 약 0.02도씩만 수온이 상승되도록 가열 장치를 조절해 놓았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약 1시간 30분 후 그 개구리는 접시 위에서 푹 삶아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만약 팔팔 끓는 뜨거운 물에 개구리를 집어넣었다면 그 접시에 들어가는 순간 개구리는 기겁을 해서 뛰쳐 나왔을 것입니다.
(23:40) 우리의 영적 침체도 이와 같습니다. 커다란 죄악을 저질러서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범죄자가 됨으로만 침체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명할 수 없는 죄를 범함으로써 침체에 빠지게 된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 지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너졌고 어느 지점에서 떨어지게 되었는지를 언제나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영적인 회복의 문제에 더욱 쉽게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 속에서 작은 죄들이 쌓여서 급기야 하나님과의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된 사람들은 침체 속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를 수 있습니다. 도로 갔다둘 수 도로 갖다 줄 수 없는 돌 세 사람의 군인이 개울가에 모여 돌을 죽고 있었습니다.
(24:39) 이들은 모두 한 사람당 50km의 돌을 부대에 담아오도록 지시를 받았습니다. 한 사람은 겨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50km 정도 되는 단 하나의 돌덩어리를 주어서 부대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20km와 30km 나가는 돌덩어리 두 개를 주어서 부대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공기돌 같이 자잘한 돌멩이로 50km 나갈 때까지 부대에 잔뜩 넣었습니다. 한 개와 두 개의 돌덩어리를 부대에 집어넣고 가던 사람들은 울퉁불퉁한 바위가 자신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며 급히 지정된 장소를 향해 바위를 날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잘다란 돌들도가 돌들로 가득찬 부대를지고 가는 군인은 어깨가 그리 아프지도 않았고 편안함을
(25:43) 느꼈습니다. 천천히 걸어서 지정된 장소로 갔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에 생겼습니다. 돌을 갖고 오라고 지시했던 상관이 세 사람에게 명령했습니다. 이제껏지고 온 돌들을 원래 위치로 위치에 도로 갔다 가져다 놓는다. 실시 돌덩어리 한계를 들고 온 병사는 가장 먼저 원래 위치를 찾아서 갖다 놓을 수 있었습니다. 두 개의 돌덩어를 매고 온 사병은 잠시 두 장소를 두리번거렸지만 곧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잘한 돌을 한 부대에 가득 담아온 사병은 한 개의 돌멩이도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죄의 문제도 이와 같습니다. 때로는 일상적으로 베풀되는 작은 죄와 허물들이 우리로 하여금 깊은 영적인 친체 가운데서 회어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하고 영이신 하나님과 예밀한 교재의 감각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도록
(26:49) 하기도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점점 더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리게 하여 세속적인 방식과 형식적인 신앙에 만족하여 살게 합니다.이 이 같은 일은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 흔히 경험되는 일입니다. >> 영적인 무감각과 침체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 되심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침체에 접어드는 어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목자가 되어 우리가 하나님이 목자가 되어 주셔서 그 세밀하신 하나님의 인도와 예배하심과 돌보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가 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심령의 침체를 경험하고 낭막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사람들은 목자이신 하나님을 돌보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만족하지 않습니다.
(27:43)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려는 신앙을 따라 살아음 살다가도 그 신앙이 식어지면 곧 다시 세상을 의지하려고 하는 것도 바로이 어 세상이 주는 사고 방식의 유혹에 말려 들어가기 때문입니다.이 이 모든 것들을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하나님의 자유로로 하여금 수생을 필요로 하는 영적인 침체에 들어가게 합니다. 이렇게 서서히 침투한 죄와 침체는 우리의 감각을 더욱 묻게 하고 자신의 영적 침체의 온인이 무엇인지를 찾기 어렵게 만듭니다. 전 자신의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흐려지고 어떻게 해야 분명한 해결에 도달할지에 대하여 점점 확신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28:35) 그때 우리는 그런 침체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침체 속에서 고통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부터 주어지는 영적인 은혜에 없이는 영적으로 경고하고 충만한 삶을 이어갈 수 없고 영적인 삶이 충만하고 경고해지는 일을 없이는 어두운 세상을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군사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인 삶에 있어서 있어 신랑한 기쁨을 언제나 승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분기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적인 침체에 들어가게 될 때마다 그 침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하여 애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29:21) 좋은 오엔의 지적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도 아시고 우리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도에 본 사람들이면 모두 다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회복되기를 사모하지만 그 일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인 침체 속에서 또한 지적인 혼돈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어둠에서 벗어나려고 그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종종 무엇인가를 느끼려고 예를 씁니다. 자신들의 표현대로 한다면 은혜를 받으려고 예를 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침체로부터 근원적으로 벗어나기 위하여 소위 은혜를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깨닫는 것입니다.
(30:14)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현상패와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바에 대하여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말씀에 비추어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고 어느 위치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한 무슨 생각을 가지고 계시며 하나님의 그 생각이 자신에게 무엇을 촉구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깨닫는 것이야말로 영적 회복을 위한 지름길입니다. 영적인 침체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정서적인 회복이나 자기 암시로 말미암는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치료되고 거쳐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관계를 통하여 예전과 같이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며 악한 세력들을 이기고 빛으로 소금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1:07)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영적 회복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적인 침체는 단지 부분적인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총체적인 문제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침체 가운데 회복을 소망하는 모든 사람들은 회복 자체를 갈망한 나머지 그 회복을 위하여 마땅히 밟아야 할 단계들을 지나쳐으로써 참된 회복에 도달하지 못하고 거짓된 회복을 완전한 회복인 것처럼 생각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 귀를 기울이라. 그러면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더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삶의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31:59) 그리고 또 하나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참된 영적 회복을 위하여 먼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신체 상태를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보다 급한 것은 그러체 상태에 있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의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런 형편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도록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은 단지 우리가 필요에 따라 하나님을 찾고 또다시 우리가 그분을 필요로 할 때까지 하나님을 하늘에 기다리시도록 대기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32:47)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께로 스스로 찾아갈 수 없는 죄인들을 하나님 자신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이 누구이시고 우리의 존재 참모습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 절대적인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거기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불만족과 고통의 원인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실로 이러한 단순한 원리를 따르지 않고는 영적인 회복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닫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사를 제외하고 이것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위대한 영적인 각성을 각성도 알고 보면 대다수 다수의 회중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잊혀졌던 복음의 진리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은
(33:51) 한결같이 듣는 데서 옵니다. 유대인들이 전절에 들기 전 자신이 하는 인사가 있습니다. 그 인사는 쉐마입니다.이 말은 히브리로 듣다라는 말에 명령형으로 들으라 혹은 귀기 귀기울지니라라는 어 뜻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뇌리에서 수천년 동안 잊혀지지 않는 한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선택된 백성들 관계는 그 백성들이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의 음성에 고여히 그리고 기꺼이 순종하려는 마음으로 길을 기울하고 되고 유지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떠리 어 떠벌리는 것만을 즐기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약한 사람들은 연약한 신앙생활을 떠날 수
(34:55) 없습니다. 언제나 선생되기만을 좋아하고 말 늘어놓기를 즐겨하며 하나님 말씀의 귀를 기울이는 일에 행복함을 느낄 수 없는 사람들은 언제나 속정와 같은 허한 영적 생활을 이어가기 쉽 십상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영적인 부흥을 누리는 시기에는 수많은 회중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설 설교자들은 자신의 설교가 그 시계 회중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되게 하기 위하여 깨어 있는 영과 정직한 지성으로 최선을 다했으며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어리석은 지혜가 섞임으로 진리의 빛을 바라지 아니하도록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렸습니다.
(35:50) 이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설교자에 의하여 장악된 강단에서 선부되는 말씀을 통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기 위하여 열심을 다해 길을 기울이었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영적 부흥과 그리스도의 회복을 위하여 지금도 이러한 일이 절박하게 필요합니다.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고통스러운 느낌을 여러 사람에게 한없이 늘어놓으므로 사람의 동정을 구하는 것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의 회복에 별로 도움을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문제 해결의 열쇠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해결의 열쇠를 당신의 말씀으로 나오는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36:36) 어떤 영적인 침체와 깊은 어둠 속에 있다 할지라도 두 가지 사실을 굳게 붙들고 이길 어 붙들면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선하시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회복시킨다는 사실입니다. >> 정직하라. 그러므로 진정한 영적 회복을 위한 두 번째 열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 대하여 정직한 인식과 솔직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상태를 감추려 하고 자신의 범죄와 영혼의 가난함과 심령의 고통스러운 상태를 합리화하려는 모든 시도는 자신의 이러한 영적 상태를 개선하론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영적 회복을 소망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가난하고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37:35) 물론 여러분이 경험하고 있는 영적인 침체는 커다란 고통을 가져왔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그 고통이 여러분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돌이킬 수 없는 범죄나 혹은 어떤 상황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다가온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여러분 자신이 그 모든 고통의 원인자가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에 대하여 한없는 연민과 자기 긍휼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주의 사람들이 여러분의 처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도 아닙니다.
(38:20)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느낌에 의하여 당신의 의지를 강요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 대하여 하나님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필으로 우리에게 한 가지 태도를 강력히 요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정직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에 대하여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이 정직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인 상태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든지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수긍할 수 있는 믿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에 대하여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39:12) >> 편견을 주의하라. 영적인 회복은 그 동기가 단순히 우리를 고통과 불편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침재 속에서 우리는 많은 고통과 아픔을 경험합니다.이 세상에 자기 혼자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인간적인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도 바로 이때입니다. 신령한 고독은 거룩한 정서를 불러오지만 인가적인 고독은 세족적인 정서에 공감하게 만듭니다. 영적인 깊은 침체 속에서 고통을 느껴본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견디고 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압니다. 눈 감으면 떠오르고 눈을 뜨며 생각나는 그 영적인 침체의 문제 앞에서 해결이 없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감당할 수 없는 무게 무거운 짐인지를 잘압니다.
(40:06) 따라서 그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회복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회복을 필로 하는 우리의 관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인 침체로부터 벗어나게 하시고 영혼을 소생시키는시는 것은 단지 우리를 영적인 고통과 삶의 불편함으로부터 건쳐 주시기 위함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우리의 영적인 삶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관계의 회복입니다. >> 언약의 경신. 우리는 구약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회복을 위해 언약을 갱신하였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
(40:59) 한 예를 예를 들어 봅시다. 애굽을 떠나 광야로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약 12개월 동안 체료하며 율법을 받았을 때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거기서 하나님의 하나님은 모세와 언약을 맺으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언약을 참여하였습니다. 언약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맺으신 언약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과 질적으로 다른 완전히 새로운 언약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언약을 동참하면서 다시 한번 조상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며 그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여기며 그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를 다짐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갱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하고 그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를 하나님 앞에 다짐하였습니다.
(41:55)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언약 관계에 대한 그러한 헌신을 기뻐하시고 은혜로 응답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바로 이러한 일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진정한 영적 회복입니다. 전지 침체로 말미암은 자신의 고통의 이유가 되어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예수고 잠시 여러 가지 정서적인 회복이나 다른 요인들을 인하여 그 고통을 잊게 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아니라 접근이 우리의 영적 성활에 대한 근모적인 치유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무엇을 위하여 진정한 영적 회복을 감망하고 있는지에 대한 동기를 정직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왜 이러한 점검이 필요합니까? 은혜만 받으면 됐지.
(42:46) 무엇 때문에 이런 어 약간 까다로운 것 같은 점검이 필요합니까? 피상적인 영적 생활과 깊이 있는 영적 생활이 있듯이 회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상적인 회복과 참된 영적 회복이 있습니다. 피상적인 회복도 사람들의 느낌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회복은 회복입니다. 그러나 그 회복은 참된 신앙생활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피상적인 회복이 가져다 주는 열매는 피상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무엇이 있는 것 같은 그러한 신앙생활입니다. 입이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과 나무처럼 형식은 풍성하면서도 내면의 세계는 항상화하고 교회 생활은 분주하면서도 언제나 영적으로 외워하는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신앙의 현실은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러한 삶이 바로 비상적인 신앙생활입니다.
(43:45) >> 네. 오늘 여기까지
피상적인 회복의 위험. 이런 피상적인 신앙생활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그릇된 자기 만족과 어리석음을 가져다 줍니다. 점점 자신의 실상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게 하는 그릇된 판단들을 갖게 되고 그 안에 자신의 삶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점점 더 정직해질 수 없게 만들고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하는 척도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이런 사람들로 말미암아 교회는 점점 형식화되어 갑니다. 풍성한 영적인 삶에 목말라하는 대신에 세속적인 만족을 중시하는 교회로 바뀌어가고 >>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는 신령한 삶을 경험하기보다는 교회라고 하는 틀 속에 익숙해져 교회의 구조는 굳대 갑니다.
교회가 그런 모습을 모습이 될수록 내면의 참된 생명과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는 자리는 점점 좋아집니다. 급기아 교회가 신자의 생명을 매마르게 하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그리하여 단지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그 관계를 통하여 주어지는 거룩한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군사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단지 우리를 불편함 가운데 해방시켜 주시는 회복이 아니라 영적인 소생 곧 심령의 부흥을 통하여 우리를 어두운 땅에서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어 가는 거룩하고 강한 군사들로 다시 태어나서 우리의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의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소생된 영혼만이 소생된 영혼이 아니고서 누가 의의 길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세상 속에 흐르고 있는 죽음의 세력을 능가하는 거룩한 생명의 능력을 간직한 자가 아니면 누가 그 어두운 죽음의 세력들을 꺾어 꺼지지 않는 생명의 불길를 어두운 땅에 밝힐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권세를 부어 주셔서 권능 있게 하신 어 사람이 아니면 누가이 불리한 세상에서 자기의 욕심을 버리고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로 자처하며 살아가겠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세상의 유혹과 육신의 죄된 성품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어둠움 가운데서 빛으로 불러내신 그리스도 예수의 위대한 구속의 목적에 응답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 없이이 모든 일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회복된 관계를 통하여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심령 부흥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기쁨이 요구됩니다. 세상에 있는 사소한 것들로 사라지게 할 수 없는 강인한 생명의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시련의 폭풍과 사망의 난관이 가로막을 수 없는 거룩한 생명의 물줄기가 사망으로 가득한 온 땅에 흐르게 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생명이 없는 땅에 두신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107쪽입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눈을 들어보면 어 눈을 들어 사면을 보십시오.
온 땅에 죽음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두운 세상이 부르는 모든 노래를 들어보십시오. 그곳에 어디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들을 수 있으며 세상을 만드신 여호와를 향한 경배를 읽을 수 있습니까? 누구든지 사람으로 태어나는 존재는 스스로 주인노를 하며 살고 싶어 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무관심은 안벽과 같이 더 높고 불신앙의 장벽은 초롱성 같습니다. 교회의 가날픈 복음의 전파를 비웃듯이 세상 속에 죽음의 행진은 우렁차고 생명을 위한 전진은 미약합니다. 와 권세와이 세상 어둠에 주관 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의 역사는 뚜렷하고 죄를 책망하고 죄인을 거듭나게 하는 능력 있는 구원의 역사는 점점 빛을 잃어갑니다.
교회를 판단하시던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사대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이가 가라사되 내가 내 행위를 아노니 내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하라. 내 하나님 앞에 내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그러면 무엇이 침체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렇듯 사망의 잠을 자는 것과 방불한 힘없는 삶으로부터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생명의 용사들의 진격으로 바꾸어 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잠들고 구원을 향하여 죽어 있는이 세상에 참다운 생명과 구령의 역사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진정한 운동력이
어디에서부터 어디로부터 말미암습니까? 죽은 자와 방불한 교회들을 새롭게 깨워 의와 거룩함과 절제를 위하여 살도록 만들어 줄 수 있는 변화의 능력이 어디로부터 옵니까? 누가 매마른 땅에 생명의 담비를 내려 순식간에 감뭄으로 시들어 있던 사나의 소생의 노래가 울려퍼지게 할 것입니까? 하나님 이외에이 일을 하실 뿐이 없습니다. 우리가이 시편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 주목하는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각양 좋은 것은 모두 하늘에 있는 아버지를 쫓아서 우리에게 내려옵니다.이 좋은 것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관계를 맺고 있는 자녀들을 기뻐하실 때 그분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답게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고 교회는 비로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드러내는 진리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 네. 우리 서길 목사님 읽어 주시겠습니까?이 >> 땅을 고치는 길. 그러므로 우리는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도다라고 고백한 시인의 고백을 통하여 이루를 받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영적인 친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콧방귀]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소생시키시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또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소망이 됩니다. 우리는 주의 백성이오니 주의 그 큰 이름 선포합니다.
이곳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교회를 세우시고이 땅 고쳐 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그 뜻 이루어지리이다. 신는 [콧방귀]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자가 되어 주신다는이 간격적이고 놀라운 사실을 영혼 속에서 경험하였습니다. [콧방귀] 그리고 그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영적 회복의 역사는 신에게뿐만 아니라 신과 더불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우리 모든 사람에게도 약속한 바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회복을 필요합니다. 그 회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하나님의 우리의 목자 되심을 생생하게 경험합니다. 우리의 삶과 또 내일을 삶을 하나님의 의탁할 수 있는 힘도 없습니다.
소생된 영적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은 갱신되고 그 언약의 중실함에 살 수 있는 세임이 솟아납니다. 우리의 영적인 회복이 물길 불길처럼 번져가야 하는 이유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 네. 우리 박성 목사님. >> 네. 영적 침체를 경험한 시인들. 시편에서 나타나고 있는 시인들의 영적 침체 원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유익합니다. 그것은 먼저 시편의 특성 때문입니다. 시편처럼 성경 속에 나타난 한 개인의 신앙을 자세히 살살펴보기에 적합한 성경도 흔치 않습니다. 시인은 주로 하나님만 의식하거나 1인칭 시점에 고백을 담고 있기 때문에 시인들의 영적인 삶의 실제를 피부로 느끼며 공감하기에 유익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러한 관찰을 통하여 영적인 침체 원인과 그 극복의 방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시편에 언급되어 있지 않는 다른 요인들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영적인 침체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양한 영적 침체에 관한 원인들에 대하여 깊이 있는 통찰과 이해를 갖는 것이 매우 유익합니다. 시편에 나타난 시인들의 경험을 토대로 살펴볼 때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적인 침체에 드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죄 때문이고 둘째는 진리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무지 때문이며 셋째는 오래도록 지속되는 고통 때문입니다. >> 범죄와 영적 침체.
영적 침체의 우선적인 원인은 첫째로 하나님께 대한 범죄 때문입니다. 신자가 죄를 범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영적인 깊은 침체 속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사실입니다. 시편 51편은 다이세바와 동침하는 죄를 범하고 난 뒤에 빠져들어갔던 영침를 보여줍니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소서. 다윗이 하나님께 범죄하자 깊은 영적 침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던 아름다운 목소리와 즐거운 노래를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던 길에서 멀리 떨어져 앞에 보이던 양떼들의 뒷모습이 사라져 버리고 어둡고 캄캄한 길에 시홀로 있어야 하는 깊은 침체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깊이 만났던 사람이었기에 그의 범죄는 그로 하여금 가혹할 많지 어둡고 긴 침체의 터널을 지나게 하였습니다. 그 긴 불안의 터널에서 고통하며 자신의 죄의 열매와 결과를 인하여 슬퍼하며 인내의 밤을 지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더 많이 경험하고 알게 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동일하게 다루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그 성품을 깊이 경험한 사람일수록 그는 더욱더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깨달은 신앙의 도를 인생의 외길로 삼으며 은혜를 주신 자에게 내리신 거룩한 사명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크신 하나님을 경험한 시인 다윗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죄악에 빠졌을 때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는 단숨의 날아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던 그의 몸은 정욕을 따라 흔적거리는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렸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마다 울리던 그의 영혼의 아름다운 수금은 줄이 끊어져 그 화려한 가락을 잃어버렸습니다.
범죄는 잠깐이었으나 흑암은 그를 끈질기게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한때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다윗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음성조차 들리지 않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만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범죄는 우리의 영적인 침체에 가장 커다란 원인입니다. 죄는 불순종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불순종은 질에 있어서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반역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고 영적인 침체 속에 들어가게 합니다. 태양을 등지고 걸어가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앞길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지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어두운 침체의 그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크고 뚜렷한 범죄가 우리를 급격히 어두운 침체로 접어들게 만듭니다. 그러나 모든 영적인 침체가 언제나 다윗과 같이 종류와 시점이 뚜렷한 범죄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뚜렷하고 확실한 범죄일 수 있고 때로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이 모여서 서서히 쌓인 범죄일 수도 있습니다. 부지불식간에 쌓여가는 우리의 악한 생각과 죄와 허물들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점점 더 심각하게 벌려 놓습니다. 그것이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죄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영적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깊은 침체에 접어들게 합니다. >> 침체로부터 벗어나는 길.
이러한 영적 침체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 외는 어떠한 대안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가도 그 세월이 이러한 범죄로 말미암아 비롯된 침체로부터 벗어나는 다른 묘책을 제시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 자리를 그 자리에 직면해야 합니다. 언제나 거기서 다시 서서 자신의 범죄를 생각나게 하시는 하나님과 회개하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주음한 촉구에 마주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하여 깊은 회개로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는 올룩과 같아서 우리 영혼과 마음깊은 곳에 지워질 수 없는 더러운 흔적을 남겨놓습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언제나 살아서 역사합니다. 제너 마치 하나님과의 우리 사이에 노인 명한 상에 묻은 더러운 얼룩과 같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인식을 곡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그 관계에서 오는 참된 영적인 공급을 잃어버리게 잃어버림으로써 바르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조차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오류를 낳고 그 오류가 다시 죄를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사람들은 이러한 고통스러운 악순환 속에 살아야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거기에 갇힌 자가 되어 마치 종처럼 그 죄의 법에 굴복하도록 강요받으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강제력을 느끼게 됩니다.
그 힘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살아갈 수 살아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강제력은 어디에서 나는 것일까요? >> 죄의 두려운 능력. 범죄한 것은 죄의 다스림이 있습니다. 죄가 다스리는 삶, 그 죄의 지배를 받는 생활이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더듬을 잃어버린 떨미와 같은 신세가 됩니다. 지식 각각 미차는 자신의 지식을 의지하며 판단하며 이리저리 환경과 사람의 말을 따라 흔들리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범죄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죄이며 그들의 삶을 다스리는 것은 그 죄의 세력들입니다.
그들의 세력은 강합니다. 누가 그들을 그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자신의 지혜로 그 죄의 끔찍한 다스림으로부터 스스로 헤어나올 수 있다는 말입니까? 몸무리쳐도 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 늦처럼 죄는 점점 범죄한 사람들의 온몸을 휘감하오고 결국은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방불하도록 만들어 버려야 맙니다.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용감하던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비굴한 자가 되게 합니다. 사망아 너에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에 쏘는 것이 어디이며 죄의 관역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이러한 범죄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단절의 위험은 전쟁에서 도가살의 위험과 같습니다.
이렇게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위험을 연약하고 어린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이 시를 노래하고 있는 시인은 일찍이 시편 51편을 눈물로 노래하였던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대저 나는 내 죄를 아오니 내가 항상 내 앞에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편 51편 3 4절 >> 실패 다윗 시 신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일평생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왔던 믿음의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던 성군이었습니다. 그가 비록 제왕으로서 한 나라를 다스렸으나 오히려 그에게는이 세상 왕국보다 더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왕이면서도
더 크고 완전하신 왕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을 그리워하 있습니다. 태평한 자신의 나라를 인하여 만족하기보다는 장차올 더 완전한 그리스도의 왕국의 도래를 사모하였습니다. 오래도록 하나님을 위한 전쟁에 능하여 왔고 열방을 향하여 믿음과 용기로 싸워서 어 화려한 승리의 전적을 쌓아온 다윗조차도 죄의 표적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강하고 뛰어난 믿음의 사람일수록이 범죄 화살에 집요한 표적이 됨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리고이 죄의 화살은 예고 없이 날아듭니다. 시인은 그 위대한 믿음의 싸움들을 싸우고 그 수한 시련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오직 신앙 하나로 견뎌 왔습니다.
폭풍과 같은 대적의 위들을 오직 믿음 하나로 잠재웠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확신 하나로 자신의 삶을 통하여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찬란하게 드러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의 삶은 어두운 이스라엘 역사의 불꽃이며 불이었습니다.이 시간도 우리는 다윗이 알았던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지식을 인하여 감탄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셨고 다도 하나님을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죄악의 화살이 다윗의 살깊이 박히자 그는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고 영적인 전쟁터에서 들 것에 실려 나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범죄 이후 다윗에게 일어난 1년의 사건들은 죄의 심각성과 그 무시무시함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18세기에 참참했던 영국의 역사를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문화적으로 구출했던 하나님의 도구 존 웨슬리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제게 하나님과 죄를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사람 100명을 주시옵소서. 영국을 변화시키겠습니다. >> 회개로 소문난 사람 이러한 범죄로 말미암는 침체로부터의 회복은 오직 참된 회개뿐입니다. 피상적인 회개는 언제나 피상적인 회복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피상적인 회복은 진정한 회복이 아닙니다. 다윗은 우리에게 범죄의 추문과 함께한 회개의 소문도 들려주었습니다. 다윗은 결코 소문을 내기 위하여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회개는 영혼의 깊은 곳에 붙어 있는 악한 죄악들을 드러내는 본질적인 회개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범죄의 비참함을 능가하는 위대한 회개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살아계심과 자비를 더욱 풍성하게 드러내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다윗의이 같은 연약한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주권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시인 다윗으로 하여금 세계에 이르게 하심으로써 그의 신앙을 더욱 깊게 하셨고 인간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심한 죄을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속하실 구주와 계속하시는 은혜를 갈망게 만들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으로 하여금에 대한 심한 통를 갖게 하시고 그 과정에서 위대한 복음을 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의 모든 더러운 언룩들을 지워내는 길은 오직 불과 물입니다.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받으셔야 했던 불명예와 성령을 근심케 한 것에 대한 깊은 회개에서 비롯된 눈물과 그 눈물을 받으시는 성령의 불길로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이 가깝고 쉽지는 않지만 그렇게 회개할 때 우리는 예전보다 더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범죄에 빠진 영혼들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 무지와 영적 침체. 영적 침체를 이야기하는 두 번째 원인은 무지입니다. 시편 73편의 저자도 무지 때문에 침체에 빠졌습니다.
그 시의 표재는 아삽의 시라고 적혀 있습니다. 아마이 시을 아삽의 가문에서 보존하고 전성해 왔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 씨의 저자는 경건한 하나님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악인의 형통함을 보며 깊은 침체에 빠져들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지인은 그러한 자신의 신앙의 경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인 자신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예전에 없는 특별한 고통을 겪게 되거나 하나님께 받았던 축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침체를 경험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어느 것은 어느날 시인이 자신의 지혜로 풀 수 없는 의문에 직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그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그름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내가 내 마음에 정의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를 행하였으리이다. 지인이 경험하고 있는 이러한 영적 침체는 범죄나 고통스러운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무지 때문입니다.
인간의 고통은 대부분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사실 엄격히 말해이 무지야 말로 영적 침체의 원인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원인입니다. 범죄로 말미암는 영적인 침체는 이러한 무지로 말미암아 비롯된 영적 침체보다 그 구조가 간단합니다. 그러나 무지로 말미암는 침체는 그 무지가 벗겨지기까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이합니다. 모든 영적인 침체로부터 해방을 위해서 항상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영적인 침체 원인이 시편 73편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자신의 신앙 인식의 한계로부터 오는 무죄일 경우에는 단순한 깨달음이 아니라 영적인 인식의 수준상수준이 상승하는 변화가 뒤따라야 합니다.
이어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그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이는 내가 악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시인이 실족할 뻔하고 신앙을 따라 살던 발걸음이 미끄러질 뻔한 것은 시인 자신에게 무슨 고통스러운 사태가 발생하거나 이전에 모르던 커다한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원인은 전혀 다른데 있었습니다. 어느 날 문떡 시인은 자신의 주위에 형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악한 사람들과 아무 염려 없이 행복한 얼굴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사실상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오만한 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인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 시인에게는 신앙 자체에 크다는 해를 가져오고 믿음으로 사는 삶 자체에 심각한 자절을 가져왔습니까? 뭐 때문에 그가 깊은 영적인 침체에 빠져들고 심지어 정결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였던 그 모든 거룩한 삶을 위한음을 헛된 것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 지식의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인식의 지평은 무엇이었습니까? 시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신다. 그가 가지고 있던 생각은 아주 당연하고 분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한결같이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 특별히 마음이 정결하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선하심으로 대우하신다. 대우해 주신다고 시인은 생각하였습니다.이 생각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 막 살아버릴 걸. 그런데 신인이 이런 신앙의 구도를 가지고 악한 사람들과 오만한 자들을 볼 때 커다란 신앙적인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악한 사람들은 형동할 수 있으며 오만한 자가 죽을 때까지 평안을 누릴 수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었습니다.시는 어디없서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즉시 형통한 악인과 그렇지 못한 자신, 부유하고 평안하게 살아가는 오만한 자들과 경거하나 부유하지 못하고 평안도 없는 자신을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정의하며 내 손을 씻어 무제한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칭책을 보았도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다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는 대하여 괴유를 행할으리이다. 시인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결국이 고백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그의 말은 복잡하지만 요는 이것입니다. 아 이럴수가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별짓 다 하며 살았는데 그럴바에도 나도 세상 사람들처럼 하나님 없이 막살아 버릴 것 이까지 신앙생활이 무엇이라? 그는 지금 다윗이 추락한 그 깊은 친체를 못지 않게 못지 않는 지장까지 내려갔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상황은 범죄 다윗의 경우보다 훨씬 더 심하였습니다. 다윗은 비록 심히 범죄했으나 바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내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다윗은 사실은 영적 침체의 원인이 자신의 죄악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잠잘 때나 깰 때나 언제나 그가 스스로 의식하며 있는 깊은 영적 침체를 침체에 뿌리는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범죄 우리의 아내 발스를 가음한 바로 그날의 죄가 죄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그 지점에서 자신의 악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 가혹하고 영적인 침체에서 비롯되는 불안과 고통이 크게 느껴질 [목을 가다듬음] 때마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체의 모든 원인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표한 자신의 범죄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 네. 박성 목사님 >> 계속 계속해요. >> 어 어떻게 할까요? 보다 보다 심각한 신체. 그러나 시편 73편의 경우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자신의 모든 날들은 손을 씹듯이 정결한 삶을 살려고 했었던 시간들로 이어져왔습니다. 그에게는 특이한 할만한 범죄가 없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다윗과 같이 크고 뚜렷한 범죄를 실행에 옮길 만한 악한 담대함이 수 없을 정도로 늘 경건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악의 형통함과 오만한 자의 평안함을 주목하는 순간 그 모든 하나님과의 관계가 일시에 무너지는 것 같은 침체에 빠져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려운 점입니다. 사실 조국 교회에서 헌신된 삶을 살고 있는 신자들의 대다수가 이러한 침체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회심했고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많은 은혜도 경험 체험했고 교회에서 충성스러운 일꾼들로 인정받고 있는 사람들이었들입니다. 주일뿐만 아니라 한 주간 동안에 여러 나를 교회에서 보냅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뚜렷한 죄악들을 실행에 옮길 만큼의 세상적인 악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몸에 벤 경건한 삶은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커다란 죄악에 빠지지 못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또 그들은 열심히 성경을 배우고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사람들 가운데도 깊은 영신체는 역사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을 내어주는 헌신된 삶으로 자신들의 영적인 가난함을 채워 보려고 하지만 언제나 결과는 요치 않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언제나 예수에게 미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지만 자신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은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이지만 내면적으로 골깊은 허암을 안고 살아가는 서아갈 때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아무도 자신의 허암을 드러내 놓고 고백하지는 않지만 바쁘고 복잡한 봉사 속에서 주의를 지키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은 마음의 공허함을 경험합니다.
요전은 이것입니다. 시편 73편에서 직면하고 있는 시인의 경우와 같은 영적인 침체로부터의 회복을 위해서는 시인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 속에서 죄를 찾으려 하고 삶에 있어서 어떤 어떤 불경건의 아 불경관한 오류를 찾아보려고 하는 시도는 영적인 침체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 되지 못합니다. 시편 51편 나타난 침체에서는 분명히 그런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시편 73편에서는 그런 식의 접근으로서는 해결이 어렵습니다. >> 무엇이 문제인가? 자, 그러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모지 때문에 영적인 침체의 자리에 들어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회복의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인식이 새롭게 확장되는 신앙 지식 혹은 영적인 수준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수준이란 전지
헌신된 삶을 살거나 남이 흔히 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을 위하여 힘을 기울이는 것이 아닙니다. 유창한 기도나 익숙해진 교회 생활이 사람의 신앙 수준을 보여주는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수준이란 하나님을 아는 인식의 수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식의 수준은 천차만별입니다. 시편 73편의 시인도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았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선을이 세상에서의 형통함과 평안함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다는 자기 나름의 편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신다는 그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마음이 정결한 자로 살아가도록 강한 동기를 제공하였습니다. 하지만 그한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함이이 세상 속에서만 드러나야 한다는 생각은 계시적인 신앙이 아니라 시인 스스로 빠지게 된 자기 편견이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신앙의 구도로서 어떻게 악인의 형통함과 오만한 자의 평안함을 설명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 모순이 있지 않나 하는 회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무지는 우리로 하여금이 같은 불신앙에 떨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더 깊은 깊이 있는 지식이 없으면 문제가 되는 상황을 만났을 때 그러한 무지는 더 문제가 됩니다. 또 다른 회복의 길. 그러면 그렇게 무지로 말미암는 불신앙의 헤허의로 영적인 어둠에 빠져 빠졌던 그가 언제 이러한 깊은 침체로부터 벗어나 이전에 누리던 것과 동일한 기쁨 아니 그 이상의 놀라운 희락과 영광 가운데 주님을 찬송하게 되었습니까? 무엇을 통하여 이러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시인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성수에 들어갈 때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바벨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항패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그가 성수에 들어갈 때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깨달음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이 세상에서의 주관자이실뿐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우리의 운명의 주관자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인간에게 말이 있으며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악한 모순들은 하나님의 모순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종말을 맞이할 것이고 그때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을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공의로우심으로 공의로우심을 드러내신다는 사실을 시인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시인은 여기서 다시 한번 신앙의 인식의 지평이 새로운 차원으로 열리는 위대한 영적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상과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게 되는 새로운 시야를 가지게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로 말미 그로 하여금 밑도 끝도 없는 깊은 영적 침체의 어둠움으로부터 단숨의 밝은 진리의 빛으로 나아오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도 흔히 할 수 없는 그의 영광스러운 신앙 고백은 오늘까지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세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기시라.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에 힘쓰십시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생활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깊이 인정하고 하나님이라 하는 크고 위대한 지식 속에서 살던 성경의 제자들과 말씀을 맡은 사람들의 증언을 증언의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스스로 생각하며 신과 같은 어리석은 고민에 빠지는 빠져나를 보내는 것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뛰어난 성경의 제자들과 서교자들의 말씀을 선포해 길을 기울이며 성령께서 마음을 여사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를 사모하는 것은 이러한 종류의 영적 침체로부터 벗어난 지름길입니다. 마음을 낮추십시오.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얼마나 초라한 사람인지를 고백하고 겸비해지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 [콧방귀] 세계 안에 묶여 계실 수 없는 분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인식의 세계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알기를 힘쓰십시오. 그리고 그를 아는 지식을 버리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 지식이 여러분을 경고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호세 선지자는 말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더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며 주실 것임이라 [콧방귀]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3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에 나오시는 새벽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시는 늦은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호세야 6장 1절에서 3절. >> 네. 오늘 여기까지 읽겠습니다.
고통과 영적 침체. 시편에서 살펴볼 수 있는 영적 침체의 원인 중 세 번째는 환경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시편은 여러 곳에서 대적으로 인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영적 침체에 들어가게 된 사례들을 풍부하게 보여줍니다. 시편 3편이나 13편 22편 같은 본문이 바로 이런 경우에 속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를 치는 자가 만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르쳐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니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나를 어찌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옵며 내 신엄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해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특별히 맨 처음 살펴본 시편 3편은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그를 피하여 도망가며 지은 시입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 반역의 무리들과 함께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참담한 상황에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다윗을 버렸다고 조소하였습니다. 다윗을 저주하는 백성들은 그것이 바로 사울의 집안을 멸한 다윗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떠들어댔습니다.
줄지에 닥친 그 참담한 위기 속에서 민심은 위반되었고 법계도 버려두고 성정도 뒤로 한 채 맨발로 죄를 무릎쓰고 울면서 감난산으로 올라갔습니다. 태학의 상황과 수많은 무리들의 도전 속에서 다윗은 비록 여호와여 주는 나라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다라고 고백했으나 오히려 앞서 살펴본 자신의 고백을 통하여 원수들의 공격 앞에 노출된 자신의 무방비한 상태와 대적들로 말미암아 받은 수치와 고난을 인하여 머리를 떨은 영적 침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 없이 살 수 없네. 인간은 강한 것 같지만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목자이신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양이 목자를 떠나 홀로 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 또한 아버지를 떠나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주 없이 살 수 없네 세월이 흐르고이 깊은 고독 속에 내 생명 끝나도 사나운 풍랑일 때 날 지켜주시고 내 곁에 계신 주님 늘 힘이 되시네. 우리는 이렇듯 우리를 외워싼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 자신이 의지하며 살던 모든 삶의 방식들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인생의 유일한 보호자시요 위로자이심을 인정하게 됩니다.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걸어갈 수 없었던 인생의 길을 하나님의 손에 으탁하는 포기의 지혜를 이러한 시련의 골짜기에서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러한 대적으로 말미암아 받는 고통과 시련 가운데 두실 때 우리는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한 원인으로 말미암는 영적 침체 가운데 있을 때는 자신 속에 있는 교만과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려고 하지 아니하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들이 철저하게 파괴되고 깨뜨려지는 변화가 있어야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최고의 선이시며 내 인생의 주인이시고 나의 미래를 향한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깊은 확신이 우리를 그 고통스러운 사망의 골짜기에서 건져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과 인격적인 신뢰의 필요성을 배웁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겸비하게 고백하게 됩니다. 오 하나님 이제 나의 삶의 보좌로 오시옵소서. 당신의 호를 저의 삶 구석구석을 향하여 드시므로 나의 마음과 삶과 모든 영혼이 주님의 통치에 복종하게 하시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의 모든 감각이 당신의 다스리심을 인하여 가슴실리도록 기뻐하게 하소서. 내 인생과 나의 시대가 오직 주님의 손 안에 있사옵나이다. >> 영혼을 소정시키시는 목자. 본문에서 지인은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이시라는 증거를 자기의 영혼을 소생시키신 하나님의 영적 회복의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비록 사막에 골짜기를지할지라도 자신의 침체된 영혼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과 자신이 어떤 관계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단 한번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가 [목을 가다듬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 주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새롭게 확인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목자와 양의 관계라고 하는 사실이 우리의이지 속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인격과 삶 안에서 충분히 경험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삶을 목자이신 하나님의 손에 위탁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목을 가다듬음] 시인은 침체 가운데 있었던 자신의 영적인 삶의 회복을 위하여이 세상에 있는 많은 것들이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랫토록 계속되는 고통이나 혹은 범죄나 영적인 지식의 부족으로 아 깊은 영적인 침체에 들게 될 때 세상에 있는 사람이나 환경의 변화가 다소는 우리의 삶속에서 느끼는 고통을 경감할 수 있을지는 못나 그로 말미암아 낙담한 우리의 영혼을 새로운 희망으로 소생케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신체된 영혼을 회복시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손 안에만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고 그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심을 우리의 온 인격과 삶으로 받드리고 그 관계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진정한 회복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예.
진정한 영적 회복. 진정한 의미의 영적 회복은 단지 고통으로부터의 구출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의 회복은 하나님과 우리의 영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고 그 관계가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다스림으로써 신앙이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의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이 이 세상에 어떤 것이 이러한 영적 관계의 회복을 흥리낼 수 있을까요? 세상에 있는 그 무엇이 침체되어 있는 영혼을 속생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를 대신할 수 있을까요? 물과 죄와 극도로 [목을 가다듬음] 힘든 환경으로 말미암아 공고한 심령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영적인 침체로부터 우리를 구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불신앙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특권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회복을 요구할 근리가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새롭게 고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자신의 무지와 제악으로 말미암아 때로는 우리가 스스로 뿌리 뿌린 잘못된 삶의 결과로 말미암아 당하게 되고당하게 된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려고 찾아오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분은 무슨 이유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 영혼을 새롭게 하십니까? 어떤 때는 어 자신이 회복되어야 할 사람임을 깨닫지도 못한 못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대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여 친히 보여주심으로 회복을 위한 소망을 갖게 하시고 그리하여 하나님을 찾게끔
만드시는데 도대체이 관건적인 하나님의 역사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을 수 없는 관계 그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결코 폐기될 수 없는 관계를 가진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상태나 우리의 선한 행실에 대한 소망을 기초로 그 관계를 지속하시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리심으로 이루신 그 구속을 기초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영혼을 깊은 침체로부터 회복시키시기 전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이유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우리를 위한 크신 희생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그 관계를 예수의 십자가로 이루시고 그 아들의 보혈의 공로를 기억하사 오늘도 소망없는 우리들에게 찾아오셔서 영적인 회복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이루신 그 놀라운 관계와 그 관계를 가능하게 하였던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구속의 보혈과 은혜를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은혜로 당신과 우리와의 관계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은혜를 소생시키실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놀라운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어떻게 느끼지 못하는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드릴 수 있겠으며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경험하지 못한 진리를 어떻게 붙들고 살겠으며 체험하지 못한 가치를 위하여 어떻게 생명을 걸겠습니까? 물이 고쳐 주소서.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적인 필요만을 채워 주는 일에 있어서 목자가 되시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삶을 향한 하나님의 세심한 모든 배려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비롯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이 땅에서 당신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는 우리의 영적인 삶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시인은 때가 됨에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목이 말에 잔잔한 물가로 이끄시는 목자이신 하나님의 세심한 배로가 우리의 영적인 삶을 향해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참된 회복을 갈망하는 하나님의 영적인 배려도 돌보심이 매일 매 순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함께만 줄이면 살아갈 기운을 잃어버린 연약한 우리의 육체를 보십시오. 한 덩어리의 빵과 한 잔의 물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육체에 없어서는 안 될 힘의 원덕력입니다. 우리의 속사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목자의 심적으로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회복시키는 영적인 은총과 돌보심이 없이는 도무지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이런 충만한 영적인 관계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시련과 환난을 잠재울 수 있을 만한 놀라운 기쁨과 충만한 신앙이 당신을 주장하고 있습니까? 혹시 공고하고 막 막 낙담한 가운데 혹은 죄사움을 받지 못해 시리에 찬 영혼을 안고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까?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는 고통으로 인하여 더 이상 이럴 기운을 잃어버렸습니까? 무지의 안개속을 헤매며 혼돈 가운데 영적인 곤핍함으로 고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제껏 여러분의 인생에 여러 과정들을 인도해 오신 사람을 기억하십시오. 그 모두 여러분을 자녀로 삼으신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선과 선행을 길로 이러한 행복과 은혜가 계속 되어 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과 여러분을 자녀로 부르신 그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한글 같은 마음이 여러분을 그렇게 부르셨던 것입니다.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오직 매일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나 인생의 앞길을 계획감에 있어서 공고한 영혼의 소생을 위해서나 언제나 하나님만을 바라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신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환경의 변화에 너무 희망을 걸지 마십시오. 여러분 주위에 누가 변해 주리라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의 영적 침체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영적인 회복은 오직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마라와 같이 선물을 먹어야 하는 고난 가운데서 오히려 노래 부르 노래 부르게 하며 국경 지대에서 호각을 불러야 하는 위기가 위기 앞에서 안연하게 하며 죽음의 위험이 가득한 사망의 골짜기를 찬송하게 찬송하며 지나가게 하고 어두운 세상을 찬란한 불꽃으로 살게 하는 것은 오직 소생된 영혼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매일같이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고 회복시키시며 당신과의 관계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붙들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영적인 회복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 기력을 상실한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요구됩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인 회복을 갈망하는 우리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라는 확신.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생명으로 사는 것을 간절히 소망하신다는 사실을 붙들 때에 이런 영적인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십시오. 회복과 하나님의 계획,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지 못하고 영적 생활이 침체에 들어가게 될 때 현실적인 고통과 영적인 불만족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인 불만족과 현실적인 고통은 그의 영적인 수준에 비례합니다. 신앙이 거의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신의 영적인 삶에 대하여 별로 커다란 불편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하나님과의 뛰어난 관계를 누렸던 사람들일수록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어지고 대적의 위협이나 범죄나 무지로 말미암아 깊은 신앙의 침체에 늪해 들어갈 때 더욱더 커다란 영적인 고통과 삶의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듭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자신들과의 관계가 새로워지기를 사모하는 그리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형식적이고 세속적인 신앙생활 속에서도 종종 양심에 호소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아,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신앙생활을 좀 더 제대로 하며 살아야 하는데라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불만족스러운 영적인 상태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진지한 마음의 소원이 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때로는 하나님을 바로 믿어보려고 간절히 열심히 노력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회복을 갈망하는 그 마음이 바로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이러한 영적인 회복의 역사가 분명한 목표와 구도를 가지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회복시키셔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영적인 회복은 갑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갑없이 주어진다는 것이 곧 무계획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구원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갑없이 주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가치 없는 죄인들을 긍휼로 용서하시고 은혜로 구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구원받은 후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감격하던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리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구원받은 이후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를 따라서 살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적인 침체로부터 회복시키시어 어두운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에도 하나님 나름대로의 분명한 계획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시인은 오늘 그 길을 의의 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선인과 악인을 분명히 나누고 의로운 자와 불리한 자를 확실히 구분합니다. 시인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의의 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와이 세상의 자녀들이 구분되는 것은 그들의 삶이 어느 길을 따라 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중계약서 결혼한지 했은 젊은 빌라를 하나 장만하게 되었습니다. 난 집에 평균이 년도 못 살고 자주 이사를 다니는 생활이 저를 고통스럽게 하던 차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때 작은 아파트를 잠시 갖고 있기는 했었지만 한 번도 변하게 제 집을 지니고 살아보지는 못했듯을 사고 등기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놀랄 만한 일을 경험하였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집을 팔고 살 때는 세금이었습니다. 별로 크고 좋은 집도 아닌데 세금이 700만 원 가량이나 남았습니다. 대금에 관한 업무를 처리해 주는 중개 사무소가 법무 사무실에서는 우리에게 두 개의 계약서를 쓰도록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는 실제로 집을 사고 판 진짜 계약서이고 단 하나는 세금을 적게 부과받을 목적으로 허위로 작성하는 관공서 제출하는 가짜 계약서였습니다. 그들은 법적으로 내야 하는 세금에 반만 내도록 가짜 계약서를 내라고 우리에게 충구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부터 모두 이런 식으로 집을 사고 판다고 가르쳐 주는 직원의 아 직원의 슬기로운 눈빛은 어느새 우리를 한심하다는 듯이 비웃는 눈빛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아주 잠깐 동안 몇 가지 생각이 스쳐 갔습니다. 그러나 지신 것은 옳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다른 윤리에 의해 구제받고 규제받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이를 인함이라. 너희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이 일에 항상 힘쓰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는 국세를 바치고 로마서 13장 6절에서 7절 무리할 정도로 힘들게 마련해서 세금을 납부했지만 납부하고 난 다음에는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행하는 길을 모두 행하는 길을 버리고 바른 길을 걸어가는 결정이 준 자유함이 경제적인 죽임 부담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그들만이 걸어가야 할 좁은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의의 길입니다. 불리한 사람들은 불리한 길로 걷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육체가 원하는 욕심대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또 다른 길이 있습니다. 똑같이 제약된 세상에 섞여 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여호와의 교를 행하는 완전한 길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길을 삶을 삶의 길을 걸어가기 원하십니다. 예. 두 큰 목적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것은 단지 우리를 영적 침체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불라한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실제적인 삶의 불편을 들어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통이나 불편함 삶 때문에 영적인 회복을 구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연한 방법이나 임시 방편적인 목표로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러나 그분에게는 우리를 향한 더 원대하고 완전한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것은 회복된 영혼으로 우리의 뜻대로 살게 하심이 아니요 하나님의 자녀답게 의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이 이 세상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불리한 길은 늙고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거기에는 번영이 있고 형통함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고독도 없고 세상으로부터 소외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의의 길은 협착합니다. 다니는 사람들이 매우 적습니다. 거기에는 언제나 죽음의 위협이 있고 생명을 건싸움이 기다리고 있으며 대적의 세력들이 맹복하여 있습니다. 누가이 세상의 판단을 가지고 보상된 약속이 있는 불리의 길을 버리고 고난과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세상에서의 보상이 약속되어 있지 않은 의의 길을 믿음이라는 이유와 하나 때문에 어가려고 합니까? 누가 그러한 희생을 택하겠습니까? 누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즐기는 부기와 안일함과 명성과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믿음이라는 가치 하나 때문에 불확실하고 고난이 많은 그 협착한 길을 걸어가겠습니까? 그 길은 오직 어 오직 그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분명한 신적 확신이 있고 군난이 오더라도 그 길을 걸어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신앙의 변화가 없는 사람들은 걸어갈 수 없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고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이가 적으니라. 그러나 소생된 영혼이 아니고 누가 그 좁은 의의 길을 따라 살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핍박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시련을 넘어서는 소망이 그들을 붙잡고 주관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어떻게 눈에 보이는 소망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아니하는 소망을 택하겠습니까? 십자가는 많은데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은 늘어감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악해지는 것을 인하여 탄탄합니다.
어둠 밤 언덕 위에 올라 시내를 내려다 보면 온통 붉은 십자가 천지인데 왜 이렇게 세상은 사랑이 매마르고 악해져만 가느냐고 문합니다. 언제나 이러한 질문은 별 분명한 대답 없이 독과 같이 끝나버리기 일수입니다. 그렇지만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입술로는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에 대한 사랑과 세상이 주는 가치관들을 그대로 붙들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때 영혼은 거듭났는지 모르나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인생을 바라보는 가치의 체계들이 비성경적인 사고 사 고로 가득차서 고쳐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받은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 나라를 실현하는데 어떻게 기여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어떻게 해야만 자신의 인생을 밀어주시는 하나님의 후원을 받아 잘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바뀌기보다 하나님을 바꾸기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소들이 많을수록 세상은 기독교적 분위기로 가득찰 수 있으나 의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세상 속에서 여전히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얼음만지사 당신의 살아 계심을 확실하게 하시고 그 영혼을 변화시켜서 의의 길을러 가고자 하는 거룩한 소망에 불타도록 이들을 변화시켜 주시지 아니하면 세상은 변화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소생된 영혼이 아니면 하나님께서 다시 생명을 주셔서 살아나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튼튼히 든든히 붙들며 살아가도록 그 관계를 충실히 하며 언약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헌신하는 영적인 삶의 갱신이 없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희망은 무엇입니까?이 땅에 살아간 날 동안에 우리의 영원한 기도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형식적이고 타성의 전 건조한 영적인 삶을 청산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 속에서 역사하실 때 그들은 세상의 유익을 사랑하여 불리한 길을 거지 않고 영원한 사랑 영원한 나라에서 상금을 위하여 의의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대신 온 땅의 주인이고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이름의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삽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들이 함께 불리한 모든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의의 길을 걸어가며 그 안에서 하나님을 즐거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일을 꿈꾸며 우리는 불리한 세상에서 오직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사랑과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은혜를 인하여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의 길로 행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삶의 의미가 없음을 고백하며이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예. 백두산에서 환라산까지 몇태 전 우리 나라 전역이 대통령 선거의 열기로 달아오르던 때였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세 명의 대순 후보들이 중국을 누비며 유세하는 광경을 자세히 보도하였습니다. 그때 저의 눈길를 끈 것은 태국 태극기를 들고 특정 후보의 이름 석자를 연호하며 구름처럼 유세장으로 모여드는 인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일당 만원에 모였던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진심으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어 나라를 다스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거기에 모였을 것입니다. 그 한우성은 서울의 여의도 강장만이 아니라 중국의 크고 작은 도시 곳곳에 울려 퍼졌습니다. 방방 곳곳에 태극기가 나붙기고 열강하는 시민들이 인판을 이루었습니다. 멀리서 카메라로 비추어 주는 태극기의 물결을 보며 그때 저는 마음속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바로 저것입니다. 언젠가이 조국의 백성들이 백두산에서 할라산까지 온 땅에서 크고 작은 마을 방방 곡구마다 이렇게 십자가 깃발을 흔들며 예수 우리 왕이여 이곳에 오소서 보자로 주여 임하사 찬양을 받아 주소서 왕이신 예수여 오소서 자정하사이 나라를 다스리소서라고 찬양하는 날이이 척박한 조국에 통일된 강토 위에 오 하서 종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그 기쁜 나를 보게 하옵소서.
는 맺는말. 그러므로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온 땅이 여호와의 이름을 즐거워하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전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오직 그분의 이름만을 위하여 의로운 길을 걸어가로 이윽고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우리 바다를 덮음같이 온 땅에 가득하도록 말입니다. 우리가 영혼의 소생을 그토록 간절하게 사모하는 것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모합니다. 피상적인 치유를 넘어서는 진정한 영적인 회복 아니 단순한 영적인 회복을 넘어서는 진정한 영적 부흥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사는 것이 아니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아멘.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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