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이 섬에 오다

2026 여름 비전트립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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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중고등부 여름 제주 비전트립

사도행전 1:8 NKRV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이 밤에 많은 일정을 마치고 이 자리에 온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한다. 오늘 여러분과 어느 교회를 탐방했는가? 그렇다. 금성교회를 다녀왔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다녀온 금성교회는 그냥 오래된 교회가 아니다. 한 사람의 믿음이 한 마을을 바꾼 장소이다. 여러분은 학교에서 친한 친구 한 명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혹시 친구들이 이상하게 볼까 봐, 거절당할까 봐 망설이기도 한다. 그런데 약 120년 전 제주에는 그런 두려움을 넘어선 한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조봉호이다. 조봉호는 제주를 떠나 서울의 경신학교와 평양 숭실학교에서 공부하며 예수님을 만났다. 그곳에서 복음을 듣고, 신앙을 배우고,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보통이라면 ‘서울이나 평양에서 성공해야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봉호는 달랐다.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되었으니, 가장 먼저 우리 고향 사람들이 이 복음을 들어야 한다.” 그는 다시 제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몇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처음에는 한 사람의 집에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 작은 가정예배가 바로 오늘 우리가 다녀온 금성교회의 시작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작은 예배를 멈추지 않으셨다. 이 교회에서 자란 사람들 가운데는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한 조봉호 집사님도 있었고, 제주 4·3의 아픔 속에서도 끝까지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제주 출신 첫 목사 이도종 목사님도 있었다. 한 사람의 믿음이 교회를 만들었고, 한 교회가 사람을 세웠으며, 그 사람들이 다시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오래된 건물을 구경한 것이 아니다. ‘복음이 한 사람을 바꾸고, 한 사람이 마을을 바꾸고, 그 마을이 역사를 바꾸는 현장’을 직접 걸어보고 온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그 이야기를 과거에서 끝내지 않으신다. 오늘 그 자리에 우리가 서 있다.
여러분과 2박 3일 동안 한국교회에 중요한 한 사람의 인물을 중심으로 메세지를 전하려고 한다. 우리가 마지막 날 방문하게 될 이기풍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다. 이기풍 목사님은 1868년 11월 21일에 평양에서 태어나셨다. 어릴 적 똑똑했던 탓에 6살에 사서오경(대학, 중용, 논어, 맹자,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9권의 책)을 한문으로 2000-3000페이지 이상 되는 수십만의 한자를 외울 정도였다. 12살에는 글쓰기 대회에서 붓글씨를 써서 1등을 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대신 써주는 일을 했었다. 그러나 성격은 엄청난 테토남 그 자체였다고 한다. 청년 때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술도 엄청 잘마시고, 박치기로 동네에서 싸움을 이겨낼 사람이 없다고 한다. 어느 날은 술에 거하게 취해서 평양성 거리를 비틀비틀 걸어다니다가 평양 좌수가 말을 타며 군중을 지나가는 것을 본 것이다. 평양 좌수는 요즘식으로 도지사 같은 고위급 공무원이다. 그런 평양 좌수를 보고 얼마나 싫었으면 “저 고약한 진드기 같은 놈. 백성의 피를 발아먹고 뱃가죽에 살이 디룩디룩 찐 날강도놈!”하면서 좌수에게 달려들어 다리를 덥석 잡고 확 끌어당겨서 땅에 집어던졌다. 결국 포승줄에 묶여 관가에 끌려가서 3달을 목에 형틀을 쓰고 옥살이를 할 정도로 이러한 화끈한 성격으로 여러 사건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1885년 4월 5일 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부부가 한국 땅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후로도 미국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조선으로 들어와 평양에 자리를 잡았다. 하루는 당시 청년 이기풍은 친구를 만나러 대문을 막 나서는 순간 생전 구경해본 적도 없는 코가 큰 사람이 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보기 드문 큰 체구에다가 도도하기 짝이 없는 거만한 몸짓으로 가슴을 내밀고 걸어가는 꼴을 보니 비위가 상해 구역질이 났다고 한다. 그때 사무엘 마펫(마포삼열)이라는 선교사님의 뒤통수를 노려보면서 조용히 따라갔다. ‘저 코 큰 양놈들이 뭘하러 우리나라에 왔을까? 저것들도 날도둑놈들이 아닌가? 그래, 저놈들을 우리나라에서 어서 몰아내자.’라고 생각하면서 가슴속에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바로 친구들을 불러 마펫 선교사님 집 대문을 여러 번 걷어찾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면서 “요새끼, 돌 맛 좀 봐라” 하면서 주변에 돌이란 돌을 주워모아서 다같이 돌을 쏟아 던졌다. 그렇게 쨍그랑 소리와 유리창이 깨지고 기왓장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웬일인지 마펫 선교사님의 집안은 고요했다. 이상하게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직접 그 거만한 양놈과 대결하지 못한 것이 더 분했고 기분이 개운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한 달 후에 우연히 장터에 지나가다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뭔일인가 심심하던 차에 군중을 헤치고 들어갔다. 들어가서 보는 순간 머리 끝까지 화나갔다. 그 꼴보기 싫었던 양놈이 무슨 책자를 들고 서투른 조선말로 띄엄띄엄 지껄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바로 발 밑에 있는 돌을 주워들었다. “요새끼, 잘 만났다. 내 돌 맛 좀 봐라” 하고 짱돌을 날렸다. 날아간 돌은 마펫 선교사님의 턱에 정통으로 맞았고 그 자리에 거꾸러져 피를 계속해서 쏟아내었다. 아무도 마펫 선교사님을 일으킨 사람은 없었고 이기풍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후 이기풍은 이상하게 마펫 선교사님의 쓰러진 모습이 마음의 상처가 되어 밥맛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선교사님들이 한참 건축하고 있는 장대현교회를 때려부쉈다고 한다.
그러다가 1894년에 한반도에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한순간에 평양 시장통이 완전히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이기풍은 폐허가 되어버린 평양을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가며 죽음을 각오하고 원산으로 갔다. 희망을 걸고 원산에 갔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고 이제는 있는 것마저 팔아 없애면서 안타까운 나날을 보내면서 다른 대책이 없었다. 친구의 권유로 담뱃대에 그림을 새겨서 팔기 시작했다. 이기풍은 붓글씨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하루는 그림을 그린 담뱃대를 한 묶음 들고 힘없이 걸어가다가 스왈른(소안론)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 선교사님을 보자마자 정신이 아찔해졌다. 평양에서 돌로 때려눕힌 양놈(마펫 선교사)이 오버랩되면서 그때가 확 생각난 것이다. 턱에 돌을 던져 피 흘리게 한 후로부터 지금까지 자꾸만 그 양놈이 잊혀지지 않고 꿈에까지 나타나서 마음 한구석을 괴롭혀 왔다. 평양 좌수를 말에서 끌어내렸을 때는 옥살이를 했지만, 돌로 때린 선교사는 아무런 처벌이나 신고나 보복을 하지 않았다. 그 선교사를 길에서 만난 후부터 이기풍의 양심은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왜 죄 없는 사람을 돌로 쳤을까? 그 사람은 왜 돌에 맞아도 반항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언제든지 만나면 사과라도 해야 마음이 편해질 것만 같았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으라고 권했다. ‘예수가 얼마나 대단한 위인이길래 저 생난리를 피울까?’하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린 채 집으로 돌아와서 마루에 누워 평양 장터에서 양놈의 턱에 돌을 던져 피흘리게 했던 일을 한참 생각하다가 스르르 잠에 들었는데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더니 머리에 가시관을 쓴 분이 나타났다고 한다. 너무나도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때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이런 소리를 듣고 놀라서 깨보니 꿈이었다.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기풍은 그 자리에서 엎드렸다. 생전 한번도 눈물을 흘릴 줄 몰랐던 이기풍의 눈에서 회개의 눈물이 콧물과 뒤범벅되어 한없이 흘러내렸다. 과거에 지은 수많은 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나서 아무리 가슴을 치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통곡을 해도 이 죄는 누구에게도 사함 받을 길이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왜 그 선량한 분의 턱에다가 돌을 던져서 피흘리게 했을까’ 울고 또 울어도 답답한 심정을 풀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기풍은 생각하다가 전에 자기에게 달라붙어 예수를 믿어보라고 권했던 그 사람의 집으로 달려갔다. 헐레벌떡 뛰어가 대문을 밀고 들어가니 그 사람이 외양간에서 소에게 여물을 주다가 방긋 웃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 어찌 된 일이오? 무슨 큰 일이라도 생겼소?” 그 사람은 이기풍이 급하게 들이닥친 이유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아 걱정하는 얼굴로 물었다. 이기풍은 잠깐 숨을 돌리고 꿈 이야기와 자기의 죄책감이 들었던 고민을 솔직하게 낱낱히 고백했다. 이기풍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손목을 끌고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따라가 보니 뜻밖에도 담뱃대 묶음을 들고 가다가 만났던 그 코 큰 양반의 집이었다. 그는 얼떨떨하고 말문이 막혀 말을 못하고 있는 이기풍을 대신하여 차근차근 꿈 이야기를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스왈른 선교사님은 얼굴에 큰 미소를 띠더니 처음 본 이기풍의 손을 꼭 쥐고 먼저 머리 숙여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나서 고개를 들고 이기풍을 한참 쳐다보더니 띄엄띄엄 서투른 조선말로 이야기하였다.
“분명히 당신은 예수님이 귀하게 쓰실 징조요. 당신 죄는 예수님이 다 사하여 주셨소. 기뻐하시오.” 이렇게 말해주는 소알론 선교사님의 밝은 미소를 본 이기풍은 비슷하게 생긴 마펫 선교사님 생각이 나서 어린아이 같이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그리고 스왈른 선교사님에게 하나도 숨김없이 과거에 지은 죄를 고백했다. 또 마펫 선교사님의 집에 돌을 쏟아 던졌던 일과 장터에서 만나 턱에 돌을 던져 피 흘려 쓰러지게 한 무서운 죄도 빠짐없이 고백하고 회개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맹세했다. 그 후로부터 이기풍의 생활은 전적으로 달라졌다. 아침에 해가 뜨면 나가서 전도하는 것이 하루 일상이었다. 완전히 예수에게 미쳐 버렸다. 30세의 혈기왕성한 청년 시절이었으니 피곤한 줄도 몰랐다. 얼마나 열심으로 전도를 하고 다녔는지 하루는 살고 있는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기풍에게는 쫓겨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영원한 지옥에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그 감격을 무슨 방법으로 표현해야 될지 몰라 이기풍의 젊은 가슴은 성령의 불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1901년에 장로가 되었고 그 해에 이기풍은 신학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청일전쟁이 끝나고 이기풍은 그리웠던 평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옛날의 거칠고 억센 모습은 전부 사라지고, 사랑과 온유와 겸손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고향 땅을 다시 밟았다. 옛날 저질렀던 온갖 못된 장난과 남을 따라다니며 괴롭힌 추억이 새삼스럽게 이기풍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불량배로 유명해던 이기풍은 어린아이들에게까지도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시할 정도로 겸손과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모든 행동이 이전과는 완전히 정반대로 변했다. 옛날에 같이 어울렸던 술친구들이 변해버린 이기풍을 보고 아무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비웃으며 하나 둘 떨어져 나가 나중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이기풍은 평양에 도착하자 이전에 짱돌을 날렸던 마펫 선교사님의 집에 찾아갔다. 괴롭고 무거운 심정으로 사과하러 갔던 것이다. 조용히 문을 열고 나오는 마펫 선교사님을 보자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마펫 선교사님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펫 선교사님의 턱에는 길게 찢어진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기풍은 목이 콱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이 무거운 죄를 용서받을 것인가?’ 이기풍은 마펫 선교사님의 두 손을 꽉 감싸쥐었다. 그리고 자기가 과거에 집 안으로 돌을 던지고 턱에 상처를 낸 못된 놈이라고 말하고, 그 후 회개하여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흐느끼며 자기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했다. 그러자 마펫 선교사님은 감격스럽고 기이한 사실에 대하여 오직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릴 뿐이었다. 그렇게 1903년 평양신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그 마펫 선교사님은 평양신학대학교의 초대 교장이었다. 그리고 1907년 최초로 신학교 졸업생 7명이 목사 고시를 시험을 치룬 후 목사로 세웠다. 그 중에 한 명이 바로 이기풍 목사님이다. 그렇게 최초 한국인 7명의 목사가 탄생한 기념으로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이 되었다.
그렇게 이기풍 목사님이 파송하기로 결정이 되어 이제 선교사로 준비하기 위해 마펫 목사님의 집을 자주 드나드셨다. 이기풍 목사님은 제주도 선교사로 가기로 결정된 후부터는 걱정이 많이 되었는지 기도하러 자주 평양신학교에 갔다. 그러면서 1907년에 평양에서 한반도를 흔드는 강력한 부흥이 일어나 엄청난 복음의 위력이 대한민국 제일 남쪽에 있는 제주도까지 퍼져가야한다는 역사적인 순간을 누구도 막을 없는 때가 오게 되었다. 이기풍 목사님은 제주도 선교사로 가는 것을 결심했지만, 마음은 너무나 약해져 있었다. 이때 이기풍 목사님의 사모님이 강력하게 말씀하셨다. 이 한 문구를 보고 나 또한 이런 자매를 만나기를 간절해졌다. “우리가 안 가면 누가 불쌍한 영혼을 구하겠어요. 두 말 말고 속히 떠납시다.” 그렇게 평양에 있는 교인들은 제주도에 선교하러 가는 이기풍 목사님 가족과 그 선교사업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였다. 그렇게 이기풍 목사님의 가족은 조그마한 나무 배를 타고 인천 바다를 떠났다. 그렇게 고향 땅을 떠나 제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목사님의 어깨는 무거웠다. 언어(사투리)도 어려운데다가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납득시켜 전도할까 고민이었다. 몇 번이나 큰 풍랑을 만나며 간신히 군산항을 거쳐 겨우 목포에 다다르게 되었다. 목포에 오자 목사님은 사모님을 남겨 두고 먼저 제주도에 들어가서 살펴보고 집도 준비해 놓고 데려가기로 했다. 그러나 목포에서 떠날 때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한 달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제주도로 가던 배가 난파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모님은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고생해서 전라남도까지 와놓고 제주도 땅도 밟아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물속에 빠져 죽었을 것을 생각에 불안한 마음만 쌓여갔다. 그렇게 한 달하고도 14일만에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배가 난파하여 모든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지만, 이기풍 목사님만 겨우 헤엄을 쳐서 추자도라는 섬에 상륙해 간신히 목숨을 구했으니 안심하라는 소식이 편지를 통해 전해져 온 것이다. 그때의 기쁨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만난 것 같았다고 했다. 그 후 이기풍 목사님은 제주도로 가는 배를 타게 되어 겨우 목적지인 제주도 땅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항상 그리던 제주도에 그들을 위하여 전도의 사명을 가지고 온 것을 생각할 때 너무도 감격하여 복받쳤다.
그러나 이기풍 목사님의 희망과 정반대의 일들이 일어났다. 전혀 언어가 통하지 않아 고통을 느끼고, 천주교 학살이 있고난 직후라 모두 기독교를 향한 증오에 찬 눈으로 바라볼 뿐 전도하는 말에 반응하지도 않고, 어떤 사람은 맹렬하게 반대하며 핍박했다. 이기풍 목사님은 잠잘 숙소도 얻지 못했다. 아무도 방을 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밤이 되면 할 수 없이 한라산 기슭에서 돌을 베개 삼고 바위를 의지하여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찬 이슬이 온 몸을 적셨다. 밤바람은 유독 찼고 수많은 별빛만 고요히 빛날 뿐 간간히 들리는 부엉이 소리만이 적막한 밤공기를 울렸다. 그러나 이기풍 목사님의 마음은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어떻게 해야 저 불쌍한 영혼들을 구해낼 수 있을까? 온통 그 생각 뿐이었다. 바위를 부둥켜안고 밤을 새워가며 눈물로써 하나님께 매달렸다. “주여, 나에게 힘을 주소서. 저 백성을 감동하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새워가며 기도했다. 그 후로 사모님을 목포에서 제주도로 데려왔다. 사모님은 피부가 하얗고 예뻤기에 제주의 청년들이 “귀신 닮았다(예쁘다)”고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했다. 말이 통하지 않을뿐더러 제주의 풍속과 문화가 너무 달라 사모님은 매일 외롭고 쓸쓸한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제주에서 사람을 만나야 전도를 하든지 밥을 먹든지 하겠는데 가끔 낯선 사람을 만나도 고개를 돌리고 손을 저으며 도망쳐 버리기 일쑤였다. 터벅터벅 모래사장을 걸어가던 중 이기풍 목사님은 갑자기 중심을 잃고 모래 사장에 쓰러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목사님을 흔들어 깨웠다. 모깃소리처럼 작은 소리가 들려 정신을 차려 눈을 떠보니 사람이 살고 있는 방이었다. 알고 보니 그곳은 해녀의 집이었다. 실신해 있는 목사님을 장정 두사람이 끌고 들어왔다고 한다. 그렇게 처음으로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를 드렸다. 며칠을 그 집에서 묵는 동안 그 해녀에게 전도하기 시작하자 하나님께서 기적을 나타내 주셨다. 그 해녀의 마음을 움직여 주신 것이다. 한국 초대교회 역사에 이기풍 목사님이 제주도에 도착해서 제일 처음 전도한 사람이 바로 해녀라는 기록이 있다.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섭리와 일하심은 측량할 수 없다. 목사님은 자주 한라산을 한 바퀴씩 돌면서 전도를 하셨는데 조랑말로 한라산을 한 바퀴 도는데 거의 한 달이 걸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밭일을 도와주러 왔다는 핑계로 며칠 동안 열심히 일을해 주다가 서로 얼굴이 낯이 익고 친해졌을 때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서 전도를 시작하셨다. 제주도에는 해녀가 많았기 때문에 밭에서 일하는 남자들의 일손이 모자라서 목사님이 일해 주러 왔다고 할 때만 환영을 받으셨다. 제주도는 비바람이 강해서 며칠씩 비가 계속 내릴 때에는 홍수가 자주 났다. 한번은 성 안에서 흘러내려 가는 냇가에 큰 홍수가 나서 물살에 휩쓸려 농작물이며, 가구, 돼지떼 등이 떠내려갔다. 그것들과 함께 사람들도 뗏목을 타고 떠내려왔다. 사정을 살피러 나가시던 목사님은 그 사람들을 보자마자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예전에 평양 대동강에서 헤엄치던 실력을 발휘해서 목숨을 걸고 다섯 사람을 살려내셨다. 이렇게 이기풍 목사님은 말보다 행동으로 또한 주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대했고 그러는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마음들이 점점 열리게 되어 마침내 하나 둘씩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목사님은 각 집에 모셔놓은 뱀을 우상으로 섬기는 제주도의 문화가 있는데, ‘구렁이 때려잡기 운동’을 시작하다가 두들겨 맞으셔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고 그때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생명을 지켜주셨다고 고백했다. 목사님이 제주도에 도착한 직후 처음으로 선교를 하는 중에 너무나도 괴로워서 제주도를 떠나려고 했던 일이 있었다. 목사님의 마음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서 이제 더 이상 용기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좌절감에 빠져 있을 때다. 약 두 달만에 마펫 선교사님에게서 온 답장이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기풍 목사의 편지를 잘 받았소이다. 그런데 당신이 내 턱을 때린 흉터가 아직 아물지를 않고 있으니 이 흉터가 아물 때까지 더욱 분투 노력하시오” 목사님께서는 편지를 받아보는 순간 과거의 잘못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하여 온 몸에 경련이 일어나서 그 자리에 쓰러져 대성통곡을 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다. 얼마간 울다가 일어나니 목사님의 마음에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그래서 어찌된 일인지 이기풍 목사님의 마음속에는 새 희망과 새로운 용기가 솟구쳐 올랐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마음이 약했을 때 평양으로 돌아가려고 꾸려 놓았던 짐들을 다 풀어 버렸다. 또다시 새 힘을 가지고 전도를 하기 시작했다. 1908년부터 1917년까지 이기풍 목사님은 제주도에 많은 복음의 씨를 뿌렸다. 제주에 지금 존재하는 여러 교회도 마찬가지고, 오늘 우리가 보았던 금성교회도 이 일들을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죄인 중에 괴수였던 이기풍 목사님에게도 역사하신 것이다. 어떠한 환난과 고통 중에서도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며 전진한 끝에 이와 같은 놀라운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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