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참함을 아는 자가 침체에서 벗어난다
Notes
Transcript
대만선교
대만선교를 잘 다녀왔습니다. 새벽은 물론, 공 예배 때와 무시로 저희 팀을 위해 기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만이 우리나라보다 남쪽에 위치해 있고, 섬이다보니 많이 더울 것이라고 예상하셨을 텐데, 한국보다 시원했습니다. 정말 시의 적절하게 구름이 해를 가리고, 바닷바람이 불어오며, 필요할 때는 비가 그치기도 했습니다. 그런 작은 것 하나까지 감사로 이어지는 대만선교였습니다.
저희 팀은 전 연령층으로 어린이 3명, 40대 3명, 60대 5명, 총11명이 한 팀을 이루었습니다. 박찬구 선교사님과 연결이 되어서 대만을 이해하고, 현지 사역자가 담임하고 있는 명수교회를 섬기는 것이 저희의 주요 사역이었습니다. 매일 몇 장의 사진과 사역보고를 교역자 카톡방에 공유했었는데, 그 내용이 기도팀에 전달되었고, 또 선교팀원들이 속한 목장까지 전달되어서 한 마음으로 기도해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세세하게 다 말씀드리기에는 오후예배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선교를 통해 하나님의 열심을 보여주신다.” 하나님의 열심은 하나님의 구원과 연결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하나님은 그들을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실족하지 않게 견인하시며 보존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그 날까지 신실하게 그 일을 이루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실 앞에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선교지에서 만나는 영혼들에게만 국한 되지 않고, 선교지로 보냄 받은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해서 “은혜를 끼치러 갔다가 은혜를 받고 돌아오는 것”이 바로 선교라는 이야기입니다.
선교지에서 은혜를 받고 왔다 하면, ‘어떤 놀라운 일을 경험했을까?’ 궁금해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에서 남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신비한 일을 겪었나? 추측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선교에 그런 일들은 없었습니다. 다만 제가 경험한 거라고는 불평과 불만이 감사로 바뀌고, 말랐던 눈에 눈물이 나며, 좁았던 시야가 조금은 더 넓어진 것입니다.
2.영적침체
한국에 계셨던 여러분들은 어떠셨습니까? 한 주간 감사가 많으셨습니까? 불평과 불만이 많으셨습니까? 말씀에 찔리고 위로를 받아 눈물을 흘려본 적은 언제입니까? 다른 사람을 존중하기보다 내 목소리만 높이며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제가 경험한 것을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일반화 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를 잃어버리고, 눈물이 메마르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만 옳다고 여기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영적 침체를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침체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여전히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으니까요. 직분도 감당하고 있습니다. 봉사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인정받으며 살아갑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의 생각을 뒤집어 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을 성전에 세우십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바리새인이 신앙의 모범이었고, 세리는 죄인의 대표였습니다. 누구나 바리새인이 의롭다 하심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은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면 바리새인은 종교적인 열심도 있었고, 금식도 했으며, 십일조도 드렸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두 사람의 차이였습니까? 그 차이는 행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비참함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비참함을 아는 자가 침체에서 벗어납니다.' 영적 침체는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할 때 더욱 깊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연약함, 그리고 비참함을 정직하게 깨닫는 순간, 바로 그 자리에서 회복은 시작됩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영적 회복의 길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3.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먼저, 예수님께서 왜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지 문맥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갑자기 등장한 비유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17장부터 이어지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17장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눅17:20)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언제 드러나게 되는지, 그 때를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눈에 보이는 나라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 가운데 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아리송했을까요?
그런데 이어지는 17장 22절부터 37절까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때의 징조들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설명해주십니다. 분명한 것은 마지막 때가 반드시 도래한다는 것과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습니까? 마지막까지 신앙부여잡고 믿음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지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지만, 어떤 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하나님처럼 느껴질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불현듯 시험이 찾아옵니다. 자꾸만 불안해하고, 낙심한 채 한숨만 푹푹 내쉴 때가 있습니다. 끝까지 이 길을 가는 것이 맞나?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8장 1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되”(눅18:1)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과부와 재판장 비유로 이해를 도와주십니다. 과부가 불의한 재판장에게 끝까지 간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낙심 될 때가 왜 없겠는가? 그러나 항상 기도하고 깨어있으라’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신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앞 구절인 18장 8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드러날 때까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보기 원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많은 종교적 행위를 하는 믿음입니까?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신앙입니까? 예수님은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 두 사람을 통해 그 질문에 답하십니다.
4.바리새인의 기도
먼저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18:11) 당시 유대인들은 대체로 하나님이 바리새인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가장 엄격하고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하며 일반 백성들에게 본이 되는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바리새인 역시 그러했습니다. 자신의 지위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의식했습니다. 세리와 같은 자리에서 기도하는 것을 불결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서 따로’ 기도한 것입니다. 아마도 성전의 안뜰까지 깊숙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내용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죄를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 즉 토색(권력을 이용하여 부당하게 돈이나 재물을 빼앗거나 강제로 거두는 행위), 불의, 간음, 세리와 자신은 다르다는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어떤 일을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남다르다는 것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2절도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2) 이제는 아예 대놓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모든 유대인들에게 요구하는 금식은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24시간 금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소득의 십일조 역시 의무 범위를 초과해서 드렸습니다.
어떤 학자는 바리새인의 이 기도를 한 줄로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님 저는 감사드립니다. 제가 너무 잘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학자는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고까지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은 하면서 사실은 내가 남다르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 말입니다. 아버지가 은퇴를 하시며 오늘 오전 마지막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일 이사를 하십니다. 아버지가 목사님이라는 사실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 태화교회에서 11년째 사역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그런데 제 마음을 들여다보니 어느 순간 그것을 은혜로 감사하기보다, 저를 증명하는 경력처럼 붙잡고 있는 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저를 소개할 때도 하나님보다 제 이력을 먼저 말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제 안에도 바리새인의 마음이 있음을 보게 하셨습니다. 어떠십니까? 겉으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겸양은 떨면서 속으로는 나 잘났다고 말하는 속삭임이 들리지 않으십니까?
선교지에서도 똑같은 일들을 경험합니다. 낙후된 환경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몸과 마음이 온전치 않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나는 저들과 다르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 나는 저들과 다르다는 것에 감사해합니다. 이런 좋은 환경, 좋은 부모, 좋은 교회에서 신앙생활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실까요? 우리는 복을 많이 받았고, 저들은 복을 못 받았다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저들이 필요해서, 우리를 선교지로 보내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에게 나누어주라고 말입니다. 선교를 통해서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바리새인의 모습을 직시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기 원하시는 믿음은 바리새인의 기도가 아니라, 세리의 기도입니다.
5.세리의 기도
13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18:13) 예수님은 이제 바리새인과 전혀 다른 한 사람을 보여주십니다. 바리새인은 성전 안쪽으로 가까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늘을 향해 당당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감히 눈도 들지 못합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를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기 죄밖에 말하지 않습니다.
몸의 자세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마음의 자세가 달랐습니다. 세리가 드린 기도는 길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원문에서는 "나는 죄인입니다."가 아니라 "나는 그 죄인입니다." 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마치 세상에 죄인이 자기 한 사람뿐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바라본 것입니다. 세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은 "나는 저 사람과 다릅니다."라고 말했지만 세리는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참된 기독교의 기쁨을 경험하려면 먼저 자신의 비참함을 알아야 한다. 결국 사람을 그리스도께 이끌어 그리스도만 의지하게 만드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유죄 선고뿐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죄를 깊이 본 사람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크게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리가 자존감이 낮거나 내향적이라서 멀리 선 것이 아닙니다.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로 얼룩진 자신의 비참함을 보았습니다. 그 비참함을 아는 순간이 바로 은혜가 시작되는 자리였습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사람은 절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붙드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회복은 자신의 의를 보는 데서 시작되지 않고, 자신의 비참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사역 한 명수교회 목사님의 이야기를 잠깐 해드리려고 합니다. 목사님은 스무 살 무렵 친구의 권유로 시작한 마약 때문에 13년 동안 중독자로 살았습니다. 감옥에도 다녀왔고, 도박과 폭력 속에서 결국 죽음까지 생각했다고 합니다. 작은 호기심이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무너뜨린 것입니다. 그 뒤로 마약재활센터에 입원했을 때였다고 들었는데요.
우연히 들은 시편3편 말씀이 목사님을 살렸습니다. 시편3편 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시3:3) 자신이 저지른 지난 일들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을 때, 이 말씀이 들린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나의 고개를 드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 때부터 목사님 삶 가운데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참했던 삶 가운데 한줄기 빛으로 찾아오셔서, 그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빛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목사님은 간증을 하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매일 마약을 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얼마든지 오늘도 넘어질 수 있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오늘 본문의 세리가 떠올랐습니다. 세리도 자신의 의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긍휼만 붙들었습니다. 명수교회 목사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이제 괜찮아졌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넘어질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사람은 자신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알고 하나님의 긍휼을 붙드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의를 붙드는 사람은 결국 넘어지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사람은 다시 일어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세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6.자기를 낮추라
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14) 예수님은 이제 비유의 결론을 내려주십니다. 그 결론은 당시 사람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사람들은 바리새인이 의롭다 하심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은 많은 종교적 행위를 했지만 자신의 의를 붙들었습니다. 반면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긍휼만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사람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영적인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여기서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일부러 자신을 비하하거나 가치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참된 모습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자신의 신앙과 경험, 봉사와 헌신을 의지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의 의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 붙듭니다.
영적 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침체된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회복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메마름과 교만, 비참함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회복은 시작됩니다. 자신의 죄를 보는 사람은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게 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높이시는 사람은 스스로 높아진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은혜만 붙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런 겸손한 심령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7.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바리새인입니까? 아니면 세리입니까?' 우리는 쉽게 바리새인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바리새인의 모습이 우리 안에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스스로 만족하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보다 내가 이룬 것을 더 붙들고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반대로 세리는 자신을 변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붙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사람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이번 대만 선교를 다녀오며 하나님께서 제게 보여주신 것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선교는 내가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변화시키시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은혜를 전하러 갔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제 안에 숨어 있던 교만을 보여주셨고, 메말랐던 감사와 눈물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돌아보면 영적 침체는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역의 많고 적음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의 비참함을 보지 못하는 것이 침체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반대로 회복은 거창한 곳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라고 고백하는 자리에서 시작되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공로를 찾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경력도, 직분도, 봉사의 양도 먼저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심령입니다. 혹시 오늘 영적으로 메말라 있습니까? 감사가 사라졌습니까? 기도의 눈물이 마른 지 오래되었습니까? 그렇다면 더 열심히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기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그리고 세리처럼 고백하십시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 회복은 자신의 강함을 발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붙드는 데 있습니다. 비참함을 아는 사람이 침체에서 벗어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사람이 은혜를 경험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하나님께 높임을 받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붙들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