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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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지게 하는 말, 모이게 하는 말

본문 | 야고보서 3:1-12 시리즈 |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 (시 19:14) — 1주차 설교 분량 | 약 30분 One Point | 부정적인 말은 사람을 흩어놓습니다. 우리를 모으는 말은 축복의 말이며, 그 말은 십자가에서 저주를 다 받으시고 축복으로 갚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받은 사람에게서만 나옵니다.

서론 — 말은 왜 이렇게 오래 남을까요

여러분, 요즘 카톡 하실 때 이런 고민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상대방이 뭘 물어봤습니다. 그래서 대답을 해야 하는데, 뭐라고 쓸지 3초를 고민합니다. "네"라고 쓸까, "넵"이라고 쓸까, "넹"이라고 쓸까.
그냥 "네"라고 보내면 왠지 차가워 보입니다. 화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넵"이라고 씁니다. 그런데 "넵"은 좀 딱딱한 것 같아서 "넹"이라고 씁니다. 그러다가 결국 "넹~^^"까지 갑니다. 뒤에 물결 표시 하나 붙이려고 우리가 이렇게 고민을 합니다.
한 글자입니다. 그런데 그 한 글자 차이로 하루 종일 마음이 불편합니다. "아까 그 사람이 나한테 '네'라고 했는데, 나한테 화난 건가?"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사실 이건 굉장히 정직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말이 얼마나 힘이 센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한 글자를 놓고 3초를 고민하는 겁니다.
심리학에는 이걸 설명하는 잘 알려진 개념이 있습니다. **'부정성 편향(negativity bias)'**입니다.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가 2001년에 여러 연구를 종합해서 발표한 논문 제목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Bad is stronger than good", 즉 **"나쁜 것이 좋은 것보다 강하다"**입니다.
이 연구가 보여주는 건 간단합니다. 우리 마음은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을 훨씬 더 크게, 훨씬 더 오래 기억한다는 겁니다. 칭찬 열 마디를 들어도 비난 한 마디가 그날 밤 잠자리에서 떠오릅니다. 열 명이 잘했다고 해도 한 명이 던진 말이 몇 년을 갑니다.
여러분,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까. 작년에 누가 나한테 해준 칭찬은 기억이 잘 안 납니다. 그런데 10년 전에 누가 나한테 던진 그 한마디는, 지금도 토씨 하나까지 기억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봅시다. 2003년에 UCLA의 나오미 아이젠버거라는 연구자가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사람을 fMRI 기계 안에 눕혀놓고, 화면으로 간단한 공 주고받기 게임을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게임 중간에 다른 참가자들이 갑자기 이 사람을 빼놓고 자기들끼리만 공을 주고받습니다. 따돌림을 당하는 겁니다. 그냥 화면 속 게임인데도 말입니다.
그때 뇌를 찍어봤더니, 몸에 물리적인 통증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바로 그 부위가 똑같이 켜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는 표현은 비유가 아니었던 겁니다. 우리 뇌는 말로 받은 상처를 진짜 통증으로 처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건 심리학이 최근에 발견한 게 아닙니다. 2천 년 전에 야고보가 이미 이렇게 말했습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약 3:6)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약 3:8)
죽이는 독. 야고보는 우리 입 안에 독이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부터 다섯 주 동안 저는 여러분과 함께 '말'에 대해서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우리를 흩어놓는 말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야고보서 3장 1절부터 12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본론 1 — 우리의 말은 왜 사람을 흩어놓습니까

작은 것이 방향을 결정합니다

먼저 본문의 배경을 짚고 가겠습니다. 1절을 보시면 야고보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이 말씀은 원래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람들,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저 같은 사람이 제일 먼저 찔려야 할 본문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2절에서 곧바로 대상을 넓힙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선생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리고 3절부터 5절까지, 야고보는 세 가지 그림을 보여줍니다.
첫째, 재갈입니다. 말(馬)의 입에 물리는 그 작은 쇠붙이 하나가 500킬로그램짜리 몸을 움직입니다.
둘째, 입니다. 거대한 배가 광풍에 밀려가는데, 그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건 뒤에 달린 작은 키 하나입니다.
셋째, 불씨입니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앞의 두 개는 방향에 대한 이야기이고, 세 번째는 파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야고보의 논리가 여기서 한 단계 올라갑니다. 혀는 작지만 방향을 결정하고, 작지만 다 태워버린다는 겁니다.
여러분, 산불 나는 것 보십시오. 담뱃재 하나입니다. 그런데 며칠 만에 산 하나가 없어집니다. 불의 무서운 점이 뭡니까. 불은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번집니다. 그리고 태운 것은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오래된 이야기 하나를 나누겠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이 마을 사람에 대해 험담을 하고 다녔습니다. 나중에 그게 사실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양심에 찔려서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랍비가 말합니다. "깃털 베개를 하나 가지고 마을 언덕 꼭대기로 올라가시오. 그리고 베개를 찢어서 깃털을 바람에 날리시오."
이 사람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시킨 대로 했습니다. 깃털이 온 마을에 흩날렸습니다. 다시 랍비에게 와서 말합니다. "다 했습니다. 이제 용서받은 겁니까?"
그러자 랍비가 말합니다. "이제 나가서 그 깃털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시 주워 담아 오시오."
여러분, 이게 말입니다. 뱉는 데는 3초 걸립니다. 그런데 주워 담는 건 평생 걸려도 못 합니다. 아니, 못 합니다. 깃털은 이미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이야기에서 한 단어에 주목합니다. 흩어졌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의 결과는 언제나 '흩어짐'입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보시면, 말이 무너지는 사건이 하나 나옵니다.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탑을 쌓습니다. 그들이 한 말이 뭐였습니까.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였습니다. 흩어지기 싫어서 모인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신 일이 뭡니까.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 겁니다. 그 결과가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말이 무너지니까 사람이 흩어졌습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원리입니다. 말이 깨지면 사람이 흩어집니다. 부정적인 말의 결과는 언제나 흩어짐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이걸 아주 정밀하게 관찰한 연구자가 있습니다. 워싱턴 대학교의 존 가트맨이라는 심리학자입니다. 이분은 부부들을 실험실에 초대해서 대화하는 장면을 수천 시간 녹화하고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15분 대화만 보고도 이 부부가 몇 년 안에 이혼할지를 90% 이상 맞혔습니다.
그가 찾아낸 것이 그 유명한 **'네 명의 기사'**입니다. 관계를 무너뜨리는 네 가지 대화 방식이 있는데, 비난, 방어, 담쌓기, 그리고 경멸입니다.
이 중에서 이혼을 가장 강력하게 예측하는 하나가 뭐였을 것 같습니까. 경멸이었습니다. 상대를 깎아내리는 말, 비웃는 말, "네가 그럼 그렇지"라고 하는 말입니다.
가트맨은 『행복한 결혼을 위한 7원칙』에서 이 경멸을 <q>관계를 죽이는 황산</q>과 같다는 취지로 표현합니다. 황산은 뭘 합니까. 녹입니다. 붙어 있던 것을 떨어뜨립니다.
또 하나 기억할 만한 발견이 있습니다. 안정된 부부는 부정적인 상호작용 하나당 긍정적인 상호작용이 다섯 배 있었다는 겁니다. 5대 1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부정적인 말 한마디를 지우려면 좋은 말 다섯 마디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안에서, 우리 가정 안에서, 우리 소그룹 안에서 이 계산이 맞아떨어지고 있습니까?

진짜 문제는 혀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야고보가 우리를 아주 불편한 곳으로 데려갑니다. 7절과 8절입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여러분, 이 구절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사자를 길들입니다. 코끼리를 길들입니다. 돌고래한테 재주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자기 입 안에 있는 이 작은 살덩어리 하나는 못 길들인다는 겁니다.
여기서 원문의 표현을 하나 봐주십시오. 헬라어 원문은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 중에는'**이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표현입니다. 야고보는 지금 "노력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정반대입니다. "너희들 힘으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설교를 듣고 나가시면서 "그래, 이번 주부터는 말조심해야지" 하고 결심하시면, 그건 야고보의 의도를 정확히 놓치는 겁니다. 야고보는 결심을 요구한 게 아니라 절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된다는 절망 말입니다.
왜 안 될까요? 혀가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9절과 10절을 보십시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같은 입입니다. 아침 예배 때 "주님을 찬양합니다" 했던 그 입으로, 점심 먹으면서 사람을 씹습니다. 이게 우리입니다.
야고보의 진단은 명확합니다. 혀는 증상이고, 병은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마음 안에 뭐가 있길래 자꾸 이런 말이 나옵니까?
디트리히 본회퍼가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아주 날카로운 말을 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을 다루면서, <q>혀를 억제하는 사람이 자기 몸과 마음도 다스린다</q>고 야고보서 3장을 인용해 말합니다. 그런데 본회퍼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그 다음입니다. 그는 우리가 형제에 대해 말하는 순간, 대개는 그 형제를 심판하는 자리에 앉아 있다고 지적합니다. 험담의 본질은 정보 전달이 아니라 심판이라는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누군가를 깎아내릴 때 실제로 우리 마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그 사람이 내려가는 만큼, 내가 올라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걔는 그렇더라"라고 말할 때, 그 문장에는 숨겨진 뒷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안 그런데." 이게 진짜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C.S.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에서 교만을 다루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q>교만은 본질적으로 경쟁적이다.</q> 루이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만은 뭘 가져서 기뻐하는 게 아니라, 옆 사람보다 더 가져서 기뻐한다는 겁니다. 내가 부자여서 기쁜 게 아니라 저 사람보다 부자여서 기쁘고, 내가 잘해서 기쁜 게 아니라 저 사람보다 잘해서 기쁘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만한 마음이 가장 쉽게 쓰는 도구가 뭐겠습니까. 말입니다. 돈을 더 벌려면 오래 걸립니다. 실력을 더 쌓으려면 몇 년이 걸립니다. 그런데 말 한마디로는 3초 만에 저 사람을 내 아래로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부정적인 말은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값싸고 가장 빠른 자기구원의 방법입니다. 남을 깎아내려서 내 자리를 확보하려는 겁니다.
내가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우리는 남을 깎아내립니다. 내가 불안할 때, 우리는 남을 비교합니다. 내가 나를 증명해야 한다고 느낄 때, 우리 입에서 독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똑같습니다. 흩어짐입니다. 야고보는 조금 뒤 3장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여기 '혼란'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질서가 무너지고 뿔뿔이 흩어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벨입니다. 우리 입이 바벨을 만들고 있습니다.

본론 2 — 그러면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우리에게는 이미 축복하는 입이 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입을 닫고 살아야 합니까?
야고보의 대답은 그게 아닙니다. 9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여러분, 이 구절이 얼마나 놀라운지 아십니까. 야고보는 우리 혀가 저주만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혀는 찬송도 합니다. 축복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그 능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축복하는 법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축복할 줄 압니다. 다만 같은 입에서 저주도 나온다는 것, 그게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말은 무엇입니까? 야고보는 9절에서 아주 중요한 힌트를 줍니다. 우리가 저주하는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
여기가 핵심입니다. 야고보는 지금 "험담은 나쁜 짓이다"라고 도덕적으로 훈계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는 신학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지금 씹고 있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작품에 침을 뱉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입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저주하는 것, 야고보는 그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합니다.
C.S. 루이스가 『영광의 무게』라는 설교에서 이 문제를 아주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q>당신은 단지 죽을 뿐인 존재와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q> 우리가 옆에 앉은 지루한 사람, 나를 짜증나게 하는 사람, 뒤에서 흉보고 싶은 그 사람은 사실 영원히 살 존재라는 겁니다. 루이스는 그래서 이 세상에 평범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관점 하나가 바뀌면 말이 바뀝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말은 결국 우리가 그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그대로 흘려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축복'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입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여기 "도리어"라는 말에 주목해주십시오. 이건 침묵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참으라는 말도 아닙니다. 갚으라는 말입니다. 다만 갚는 방식이 반대일 뿐입니다. 욕을 받았으면 축복으로 갚으라는 겁니다.
그리고 뒤에 붙은 말이 놀랍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축복하는 것이 우리의 취미가 아니라 우리의 소명이라는 겁니다.
에베소서 4장 29절은 더 구체적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여기에 세 가지 기준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 세우는 말인가. 무너뜨리는 말이 아니라 세우는 말인가. 둘째, 필요한 때에 맞는 말인가. "소용되는 대로"라는 건, 그 사람에게 지금 필요한 말이냐는 겁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요. 셋째, 은혜를 끼치는 말인가. 듣고 나서 그 사람이 은혜를 받는가.
이 세 가지 질문을 말하기 전에 통과시키면, 우리 입에서 나갈 말의 절반은 사라질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훨씬 좋은 말이 될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게 개인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생존이 걸린 문제입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에이미 에드먼슨 교수가 수십 년간 연구한 주제가 '심리적 안전감'입니다. 그의 책 『두려움 없는 조직』의 핵심 발견은 이렇습니다. 어떤 팀이 성과를 내는가를 조사했더니, 똑똑한 사람이 모인 팀이 아니었습니다. 실수해도 안전하다고 느끼는 팀이었습니다.
에드먼슨은 심리적 안전감을 <q>대인관계의 위험을 감수해도 안전하다는 믿음</q>이라는 취지로 정의합니다. 쉽게 말하면, 여기서 내가 모른다고 말해도, 실수했다고 말해도, 다르게 생각한다고 말해도 찍히지 않는다는 확신입니다.
구글이 자기 회사의 수백 개 팀을 몇 년간 분석한 '아리스토텔레스 프로젝트'에서도 결론은 같았습니다. 최고의 팀을 만드는 1순위 요인이 심리적 안전감이었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이 왜 교회에서 마음을 열지 않습니까. 왜 소그룹에서 진짜 이야기가 안 나옵니까. 왜 나눔 시간에 다들 좋은 이야기만 합니까.
여기서 말한 게 어디까지 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번 뒷담화가 도는 교회는, 그 다음부터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몸은 앉아 있지만 마음은 이미 흩어져 있습니다. 이게 조용한 바벨입니다. 겉으로는 모여 있는데, 속으로는 다 흩어져 있는 겁니다.
반대로 축복의 말이 도는 공동체에서는 사람이 모입니다. 서로에게 다가옵니다.

바벨의 반대편에 오순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성경의 아름다운 반전을 보십시오.
창세기 11장에서 말이 혼잡해지고 사람들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 오순절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령이 임하시자 사람들이 각각 자기 언어로 알아듣습니다.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온 세상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큰 일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날 삼천 명이 모입니다.
바벨에서 말 때문에 흩어졌던 인류가, 오순절에 말을 통해 다시 모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입은 어느 쪽에 서 있습니까. 바벨 쪽입니까, 오순절 쪽입니까. 우리의 말은 사람을 흩고 있습니까, 모으고 있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막힙니다

자, 그러면 이제 결론이 나온 것 같습니다. "축복합시다. 세우는 말을 합시다."
그런데 여러분, 이대로 끝나면 오늘 설교는 실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걸 알고 있었고, 이미 여러 번 결심했고, 이미 여러 번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우리를 그 자리에 그냥 두지 않습니다. 11절과 12절을 보십시오.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여러분, 짠 샘물에 대고 "단 물 좀 내라"고 아무리 말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포도나무를 붙들고 "무화과 좀 맺어봐라" 해도 안 됩니다.
야고보의 말은 이겁니다. 열매를 고치려 하지 말고 나무를 보라. 물을 고치려 하지 말고 샘을 보라.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우리 마음이라는 샘에서 길어 올린 물입니다. 샘이 바뀌지 않으면 물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샘은 어떻게 바뀝니까?

결론 — 저주를 다 받으시고 축복으로 갚으신 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한 사람을 봐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심한 말을 들으신 분이 계십니다.
사람들은 그분에게 "귀신 들렸다"고 했습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재판정에서는 거짓 증인들이 일어나 없는 말을 지어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온 백성이 한목소리로 외친 말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도 말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대제사장들은 조롱했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여러분, 예수님은 인류가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악한 말들을 한 몸에 다 받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서 놀라운 해석을 붙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그러니까 그날 십자가 위에서 벌어진 일은 이겁니다. 우리가 마땅히 들어야 할 모든 저주가, 그분께로 갔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퍼부었던 말, 우리가 뒤에서 씹었던 말, 우리가 사람 마음에 박아 넣었던 그 못 같은 말들의 심판이 그분에게 쏟아졌습니다.
그러면 그분은 그 저주를 받고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베드로전서 2장 23절이 증언합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침묵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입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여러분, 이게 저주를 축복으로 갚는다는 말의 진짜 의미입니다. 그분은 저주를 다 받으시고, 축복으로 갚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의 대상이 바로 그분을 저주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들입니다.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갑시다. 짠 샘이 어떻게 단 물을 냅니까?
우리 마음이 짠 물을 내는 이유는 우리가 목마르기 때문입니다. 인정에 목마르고, 사랑에 목마르고, 내 자리를 확인받는 데 목말라서, 우리는 남을 깎아내려서라도 그 갈증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입에서 독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 서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나를 저주해야 마땅한 그분이, 오히려 나를 위해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나를 심판하실 자격이 있는 유일한 분이, 나를 변호하고 계십니다.
팀 켈러가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적 겸손은 자기를 더 좋게 생각하는 것도, 더 나쁘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라 <q>자기 자신을 덜 생각하는 것</q>이라고요. 켈러는 이것을 '자기를 잊어버림'이라고 부릅니다.
왜 잊어버릴 수 있습니까? 이미 판결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나에 대해 이미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선언하셨는데, 내가 왜 아직도 사람들 앞에서 나를 증명하려고 애를 씁니까. 내가 왜 아직도 남을 내려서 나를 올려야 합니까.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인정받은 사람은 남을 깎아내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더 이상 남의 어깨를 밟고 올라설 필요가 없습니다.
이게 샘이 바뀌는 방식입니다. 결심이 아니라, 복음이 마음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인정받은 사람은 어떻게 삽니까?
베드로전서 3장 9절이 다시 대답합니다.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어받는다'는 말이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복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받은 복을 흘려보내는 사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이제 그 축복을 다음 사람에게 넘겨줍니다.
우리 주님이 저주를 받으시고 축복으로 갚으셨다면, 그분 안에 있는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그분과 함께 사는 삶입니다.
이번 한 주 동안 세 가지를 해보시겠습니까.
첫째, 하루에 한 사람에게 축복의 말을 하십시오. 마음에 떠오른 좋은 생각을 삼키지 마시고, 소리 내서 말하십시오. "당신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은 참 귀한 사람입니다." 3초면 됩니다. 우리는 3초 만에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3초 만에 세울 수도 있습니다.
둘째, 험담이 도는 자리에서 딱 한 마디만 하십시오. 같이 씹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한 마디를 변호해 주십시오. "그래도 그 사람은 이런 면이 있더라." 그 한 마디가 그 자리의 방향을 바꿉니다. 작은 키가 배의 방향을 바꾸듯이 말입니다.
셋째, 오늘 이 자리에서 한 사람을 떠올리십시오. 내 말로 상처를 준 사람 말입니다. 깃털은 다 주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과 한마디는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주에는 두 번째 시간으로,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에 대해 나누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가장 많이 부정적인 말을 퍼붓는 대상은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말씀을 한 절로 마치겠습니다. 이번 다섯 주 동안 우리의 기도가 될 말씀입니다. 시편 19편 14절입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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