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11:1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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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라 이미 준비된 자리이다

1 ‘끝없이 배신하며 영적 간음에 빠진 백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심판의 고통을 넘어서라도 기어이 온전하게 회복시키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애타고 끈질긴 사랑(헤세드)' 라는 정의를 다시 한 번 읽어보면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2주 전에 하파크와 카마르라는 단어를 기억하십니까? 본문에 돌이킨다는 말씀과 긍휼이 끓어 오른다는 단언인데 마치 하나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충돌하고 충돌로 인한 빛이 일어나고 이 빛은 우리를 향하는 구원의 빛이라는 은유를 통해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연결해 보았습니다. 이런 내용은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을 요동치게 합니다. 시편 8:4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라는 기도자의 참 고백을 경험합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12절을 직역하면 ‘그들은 에워쌓다 거짓으로’라고 시작합니다. 에브라임과 이스라엘은 북 이스라엘가 남 유다 모두를 이르는 표현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여러 왕들의 시기를 거치며 북 이스라엘 멸망을 강력하게 전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는 물질적 번영과 군사적으로도 전성기였습니다. 3.그러니 누가 알아 들었겠습니까? 하지만 물질적 풍요는 항상 약자의 빈곤이라는 양극화 현상과 우상 숭배라는 이중성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라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약자의 것을 취하는 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대기업은 자영업자의 이익을 취하고, 새로운 기술은 일반 노동자의 노동력을 취합니다. 이런 불평등이 심해지면 자연스럽게 폭력이 따라 옵니다.
풍요를 지키기 위한 우상숭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때는 과학이 없으니 그렇다 말하면서 지금은 아니라고 할 것 같아도 불과 얼마전 무슨무슨 법사니하면서 나라를 뒤흔들 일은 결코 남에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권력을 가진 자나 부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미래를 반드시 알고자 하는 불안한 인간의 심리가 깊게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여로보암 2세가 죽은 후에 30년동안 무려 6명의 왕이 바뀌었는데 그중 4명이 암살이나 쿠데타로 왕권을 차지한 폭력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니 민생을 돌아볼 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신흥 강국 앗수르 눈에는 먹잇감에 불과한 상태인 것이죠.
4.여러분 흩어진 생각의 조각을 좀 맞춰보겠습니다. 지난 주에 포로의 시기는 지금의 북 이스라엘이 아니라 한참 뒤에 남 유다의 포로기가 시작될 때 잡혀 간 다니엘을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 역사 뒤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말씀 드렸습니다. 무너진 남 유다 안에서 아히감을 통해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숨을 보존하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전해주신 말씀이 서기관 바룩에 의해 기록하게 하시고 그 말씀이 총리가 된 다니엘에게 전해지고 다니엘이 회복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구원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오늘 호세아의 메세지 속에도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여러분께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소선지서 중에 우리가 다루지 않는 요나서가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멸망의 주인공인 앗수르라는 제국의 도시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외쳤고 그들이 회개하는 놀라운 기록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5. 이게 무슨 말씀이냐 하면 호세아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계획하고 있으니까 잘 듣고 생각해보고 결정해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핵심은 하나님께서는 이미 시작하신 일, 말씀과 역사가 함께 일어나는 즉 말씀하시는대로 천지가 창조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나를 통해서 이미 앞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서 회개를 외쳤고 그 결과로 인해 앗수르가 대외적으로 팽창이 잠시 멈춘 상태가 얼마 후 멸망할 북 이스라엘에게 돌아오라는 회개의 시간을 만들어 놓고 부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돌아오라 할 때, 기도해라 할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돌아올 자리를 만들어 두시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6.그런데 이들은 오히려 이 기회를 자신의 부를 축척할 기회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입니다. 오히려 절호의 기회로 여긴 그들은 부를 쌓고 군사력을 올리는 것이 무슨 문제냐 하겠지만 당연한 세상의 이치는 늘 하나님의 이치와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7.지난 주 말씀에 하나님의 책망은 ‘너희가 내게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로는 왜 기도하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기도는 아픈 사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구하고 나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살려 달라는 간구가 전부는 아닙니다. 이미 준비된 하나님의 뜻하심을 묻고 깨닫고 그래서 믿음을 고백하는 자리임을 3년이 넘는 시편을 통해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은 자는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의 그러함을 아뢰고 말씀을 내 삶에 받아 들이는 문을 열기 위해 기도가 함께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라는 배신의 상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절호의 기회를 자신의 이익으로 바꾼 자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8.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이 그렇습니다. 힘들고 아프고 일이 잘 안될 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 출석에 열을 올립니다. 그러다 상황이 개선되고 바빠지기 시작하면 바쁘다는 핑계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갑니다. 북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12장 1절에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고 종일토록 거짓과 포악을 더하여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좀 말랑해진 앗수르야 말로 거래하기 좋은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트집로 기름을 보냈다는 말씀은 정치적 평화일 수도 있고 돈을 벌기 위한 무역과 같은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종일토록 거짓과 포악을 더하여라는 말씀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는 세상의 이치가 히브리서를 통해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하나님 자녀와 충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그런 충돌이 있습니까? 그런 충돌이 없다면 우리는 멈춰서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이방 니느웨 심판 유보는 결국 회개를 통한 돌아선 행동에 있습니다. 이들처럼 북 이스라엘도 돌아서야 했습니다. 그런데 더 이방인스럽게 물 들어올 때 노을 저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왜 돌이키지 못했을까요? 우리의 태생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9.그래서 성경은 대표적인 인물인 야곱을 소환합니다. 야곱이 모태에서 형의 발뒤꿈치를 잡은 자처럼 다시 말해서 거짓을 일삼으면서도 결국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야곱을 등장시킴으로 거짓말쟁이를 벧엘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개입을 실제화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너 야곱 알지, 어떤 인물이고 너희와 똑같은 거짓된 인생이었지만 내가 간섭하고 개입해서 결국 벧엘로 이끌었어’라는 메시지입니다. 10. 6절에 그런즉 너희도 정신차리고 돌아와라 지금 거짓말쟁이의 길을 버리고 신실한 태도로 바로 서라는 하나님의 요구인 것입니다.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희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이 말씀이 바로 소선지서의 주제 아닙니까?
저와 여러분이 아직도 ‘옳은 길’이 뭐죠라고 물어서는 안 됩니다. 수 차례 미가서의 말씀을 되풀이 했고, 소선지서와 히브리서 말씀을 통해서 그 의미를 살폈기 때문입니다. 11.그럼에도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린다면 마치 갖된 아이가 엄마의 품안에서 모든 것을 공급 받으면서 서로의 만족이 극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자라난 아이가 부모의 손을 잡고 위험한 길을 아장아장 걸어가면서 길과 부모의 손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장해서 손을 놓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좋은 대학가서 성공하고 이름을 알려 많은 사람 앞에서 하나님 자랑의 멘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하나님께서 잡은 손이 있음을 알고 겸손하게 다른 손으로 타인의 손을 잡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의 구현이죠. 하나님의 자녀로 배운대로 성장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한 극치가 무엇입니까? 친구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자기 희생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죠. 그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자기를 버리심으로 이루어내신 삶을 방향으로 설정하라는 것입니다.
12.본문 7절에 보면 “그는 상인이라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속이기를 좋아”한다고 하신 말씀은 그런 삶에서부터 떠나라는 것입니다. 상인들이 ‘저는 밑지고 파는 거에요’라고 자신을 속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들의 생각이 8절에 “내가 정말 부자가 되었구나 이제는 한 밑천 톡톡히 잡았다 모두 내가 피땀을 흘려서 모은 재산이니 누가 나더러 부정으로 재산을 모았다고 말하겠는가” 라는 새 번역의 말투가 정확한 것입니다. 그런 그들임에도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부터 인도하셨다라고 말씀을 이어갑니다. 몰라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0절에 “여러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 주셨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13.이렇게 그때를 생각해보라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특히 기독교는 ‘기억의 종교’입니다. 앞을 본다는 건 미래를 말하죠. 내일 내가 어떻게 될 것인가? 내일 증시가 어떨것인가? 이런 미래는 예측의 개념을 만듭니다. 앞서 부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무슨 법사니 하면서 점집에 들락날락 거리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짜 미래를 보려는 모든 것들의 기반인 ‘예측’은 다른 말로 하면 ‘기억’ 즉 과거입니다. 어제 어땠는가? 그제 어땠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 멀리 보기를 원하면 그만큼 더 먼 과거를 기억해야하는 것이죠. 병원을 찾아갑니다. 지금의 아픈 상황 때문이죠. 그래서 내일 낫겠는가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의사들의 지금의 진단은 과거의 증상을 보면서 시작하고 그 결과 네! 낫습니다하고 처방을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환자는 5분이라도 아니 10분이라도 더 말하고 싶은 것이 과거이지 않습니까? 이런 병이 온 이유, 왜 내가 아픈지를 알고 싶고 처방뿐만 아니라 진단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부터 아프셨나요? 어제 무엇을 드셨나요? 최근 이런 일이 있었나요? 혹시 가족 중에 비슷하게 아픈 분이 있나요? 하는 것처럼 내밀한 정보를 요구해도 당연히 의사 앞에서 의심의 문을 열고 모두 말하는 것 아닌가요?
인생의 깊이를 다루는 철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이데거는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세상에 던져진 피투성이다”라고 아주 냉철하게 이야기한 다음 그래서 “누군가의 무조건적인 돌봄 염려와 배려가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라고 까지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억의 종교라는 말은 내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지금의 방향을 정확하게 알려 주시기 위해서 과거를 다시 소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몸과 생각이 앗수르와 애굽을 행해 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은 저울을 속이고 세상 방식으로 부자가 되자 내가 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자신까지 속이는 상태가 되었음을 진단하시고 이제 깨닫고 돌아서도록 처방하시는 것입니다.
14.여기 등장하는 길르앗은 과거 야곱이 하나님의 군대 마하나임을 만난 은혜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호세아 6:8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는 곳으로 바뀌었는데 이것이 길르앗의 잘못이냐고 하나님께서는 묻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길갈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통과해 요단을 건너 처음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킨 언약이 갱신된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알과 혼합하여 수송아지를 바치는 우상과 불법이 판치는 중심지로 변질된 것입니다. 그래서 밭이랑에 쌓인 돌무더기처럼 아무런 가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밭을 일굴 때 다 치워버리는 것처럼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5.앞서 스스로 노력해서 부를 이루었다는 8절의 말씀을 살폈죠. 그러나 야곱이 아내를 얻기 위해 사람을 섬겼던 것처럼 자신의 영광으로 취하는 다시 말해 교만한 모습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들이라고 진단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애굽에서 430년의 종살이라는 고난의 길이 지금 앗수르에 의한 멸망의 길과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에 모세를 통한 구원과 그렇지 못한 14절 에브라임의 멸망을 극명하게 대조합니다. 결국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이주와 이방 혼합 정책으로 순수한 혈통의 퇴로를 차단합니다. 북 이스라엘의 심판은 되돌이키지 못하는 심판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심판 이전부터 이방과 혼합되어 버렸기 때문에 앗수르에 의해서만 그렇게 된 것 같아도 계속해서 자신들이 그 길로 걸어 들어간 것입니다.
16.다시 말해서 계속 간 그 길 끝에 멸망에 다달은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저 정도면 돌아설 법도 한데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절망이라는 것,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다 인정하면서 그길로 계속해서 가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반면 오늘 본문에 야곱은 비천한 상태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고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습니다. 그렇게 꼬꾸라진 자리가 은혜의 자리가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잘 꼬꾸라지는 것 같아도 스멀스멀 과거의 나, 보상 받지 못한 나, 나름 괜찮은 나라는 이상한 실마리를 당기다가 결국 옷이 전부 풀어지면서 벗겨지는 수치를 당합니다. 한 번 당긴 실마리를 끊거나, 묶거나 불로 지져서라도 막는 하나님의 은혜가 발동되지 못하면 얼마 못가서 상실한 상태 즉 돌이킬 수 없습니다. 기억하시죠 히브리서에서도 성령의 은혜를 무시하는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라는 말씀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17.하나님께서 돌아오라는 경고는 이미 준비해두시고 오라하시는 은혜입니다. 살면서 '마지막 기회니 답을 잘해'라는 요구는 사실 다 알면서도 묻는 것이자 용서하겠다는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것이지 않습니까? 사람 일도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떠하시겠습니까? 위기만 넘기면 된다고 다급하게 내뱉는 변명이 당장은 그럴싸해 보여도 살다보면 깨닫게 됩니다. 얼마가지 못해 결국 쌓이고 쌓여 연인끼리는 이별을 통보 받기도 하고, 법의 심판을 받기도 하고, 관계가 깨어지기도 하는 인생의 쓴 맛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스스로 부를 쌓았다고 착각하며 하나님이 주신 기회의 시간을 낭비했던 에브라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비열한 거짓말쟁이였으나 결국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꺾어졌던 야곱도 보았습니다. 은혜는 내가 이룬 것을 뽐내는 자리가 아니라, 나의 바닥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손을 잡는 데서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의지하는 각자의 앗수르와 이집트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시선을 거둡시다. 이미 우리를 살리시려고 모든 자리를 다 마련해 두시고 "돌아오라" 부르시는 그 아버지의 음성에, 핑계 없이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 손을 잡아 주옵소서"라고 아이가 부모의 품을 찾듯 그런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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