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6:1-6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 view
Notes
Transcript
8월 2일 청년대학부 설교
본문: 호세아 6:1–6
서론
오늘은 8월의 말씀을 가지고서 하나님 말씀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매달 바이블팀에서 이달의 말씀을 3가지를 저에게 올려줍니다. 그러면 제가 기도하면서 이 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을 정하곤 합니다.
그래서 사역자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매달 첫째 주는 이 달의 말씀, 한달간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말씀을 갖고서 설교를 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매달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8월 한달간 여러분이 살아가는 중간중간에 떠올라서 여러분의 마음을 지킬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8월은 우리에게 굉장히 바쁜 시간입니다. 여름 수련회도 있고 치앙마이 단기 선교도 있고 각자마다 산으로 바다로 여름 휴가를 다녀올 계획도 있으실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8월은 분주하고 정신 없이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분명 놓치게 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중심과 본질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 말씀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매주 광고 때마다 8월의 말씀을 함께 읽을 때에 이 말씀을 되도록 외우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호세아서 6장 1절 말씀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이 본문은 제이어스 때문에 떴다고 할 수 있는 여러분들에게 익숙한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이게 되게 신앙적이고, 감동적인 고백같아 보이지만 사실 이 고백을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회개를 하고 있는지 그 배경을 알면 오늘 본문이 좀더 입체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당시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신종강호로 떠오르던 나라가 앗수르라는 나라였습니다. 나중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 앗수르라는 나라에게 흔적도 없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앗수르가 점점 세력을 확장해나가고 있을 무렵에 앗수르를 견제하고 있던 몇몇 나라들이 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결성합니다. 그 때, 남유다에게도 손을 내밀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저 앗수르를 무찔러버리자. 그런데 남유다가 거절을 합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과 아람 군대가 자신들의 손을 잡지 않은 남유다를 침공했던 것입니다. 그 때 남유다가 패권국가였던 앗수르한테 sos 요청을 보냅니다. 우리가 당신들께 조공을 바칠테니 우리를 연합군들의 손에서 보호해달라. 안그래도 이 연합군은 앗수르에게는 눈에 가시였습니다. 마땅한 명목이 없었던 터에 남유다가 떡하니 좋은 명목을 던져주니까 앗수르가 기다렸다는듯이 이 연합군을 격파해나가는데, 북이스라엘이 완전히 반토막이 나버렸습니다. 요단강 동편 땅은 완전히 앗수르의 손에 넘어가버렸고 수도였던 사마리아 성과 주변 에브라임 산지의 작은 영토만 간신히 남겨둔 초라한 국가로 전락해버린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하에 오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그럴싸한 회개의 기도문을 써올린 것입니다.
1-3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이들이 갖는 소망이 입체적으로 보이실 것입니다. 이들은 지금 나라가 멸망 직전까지 내몰린 상황입니다. 그들이 갖는 소망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도로 낫게하시고 싸매어 주실 것이다.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이틀, 삼일이라는 것은 그냥 빠른 시간 내에라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속히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다. 3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여러분 잠을 잘 때, 우리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내일 6시쯤 되면 어김없이 아침이 온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누구도, 내일은 아침이 올까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제도 그랬고, 그저께도 그랬고 늘 밤이 지나면 새벽빛이 세상을 밝혔습니다. 또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때가되면 매년 거르지 않고 늦은 비가 하늘에서 내렸었습니다. 사람들은 올해도 비가 내릴까 굳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매년 그랬듯, 그것이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타나심도 이러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틀린 말입니까? 맞는 말입니까?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새벽빛 같이 매년 어김없이 내리는 늦은 비와 같이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회개를 받지 않으신 데에는 한가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4절 보실까요?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너희의 인애가 아침 잠깐 껴있는 구름 같고, 잠깐 있었다가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같다는 것입니다. 인애가 무엇입니까? 새번역 성경이 정확하게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너희의 마음인 것입니다.
6절을 볼까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기서도 새번역 성경에서 뭐라고 말하고 있냐면 내가 원하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그들의 회개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 필요해서였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해결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하자 그들은 기지를 발휘하여 아주 겸손하고 흠이없는 회개의 기도를 한 토막 꺼내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의 고백은 완전했습니다. 1절에 오라! 우리가라고 할 때, 오라는 와라 이런 의미가 아니라 자자!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갑시다 이런 의미입니다. 또 3절에 보면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어떻게?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들은 진심이었고 열심을 다짐했고 주님께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동기가 무엇이었다는 거예요? 인애가 아니라 제사였다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메세지 성경에서 이 제사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더 많은 종교. 내가 찾는 것은 너희의 변함없는 사랑이지, 더 많은 종교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지, 더 많은 기도회에 나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너희의 변함없는 사랑이지, 나를 또 하나의 종교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너희가 나를 아는 것이지 더 많은 기도회에 나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종교란 무엇인가? 우리의 모든 신앙행위에 사랑이 빠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종교생활로 변하는 순간은 믿음의 대상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우리는 그분께 헌신을 드립니다. 다 고결하고 존귀한 것들이죠.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사랑이 빠졌을 때, 그 모든 행위가, 겉으로 보기에 고결하고 존귀한 만큼, 하나님 보시기엔 가증하고 더러운 종교적 위선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꽤나 자주 종교적인 신앙생활로 빠지게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사라진 채 종교적인 행위만 남게 되면, 그 신앙은 우리 안에 아주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첫 번째로, 종교적인 신앙은 하나님을 수단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말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원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나라가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원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 자신들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의 회개는 구원을 얻기 위한 거래였습니다.”
사랑이 빠지면 신앙은 관계가 아니라 거래가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수단이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간이 아니라 복을 받기 위한 조건이 됩니다. 순종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벌을 피하거나 보상을 얻기 위한 행동이 됩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수단이 되고 맙니다.
두 번째로, 종교적인 신앙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신앙의 가장 무서운 점은 하나님과 멀어져 있으면서도 자신은 하나님과 가깝다고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했기 때문에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적인 행위는 우리의 실제 모습을 가려줄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이 불순종을 가려주고,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교만을 가려주고,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과 멀어진 마음을 가려줄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회개해야 할 이유를 잃어버립니다.
“나는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니까 괜찮아.”
“나는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니까 괜찮아.”
“나는 남들보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가 몇 번 예배를 드렸는가만이 아닙니다. 그 예배를 드리고 난 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십니다.
종교적인 신앙은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데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진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종교적인 신앙은 위기가 끝나면 쉽게 무너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사랑이 아침 구름 같고 이슬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깐 나타났다가 곧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의 신앙은 오래가지 못했습니까? 그들의 신앙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필요가 있을 때는 뜨겁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는 간절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더 이상 하나님이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 그 뜨거움은 사라집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을 때도 무너집니다. 기도했는데 응답되지 않습니다. 믿었는데 상황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순종했는데 오히려 손해를 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믿었다면, 그 결과가 주어지지 않을 때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신앙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상황이 좋으면 하나님을 믿고, 상황이 나쁘면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응답받으면 감사하고, 응답받지 못하면 신앙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상황을 이해해서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붙듭니다.
네 번째로, 종교적인 신앙은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 것은 제사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제사를 드리면서도 그들의 삶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렸지만 여전히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한다고 고백했지만 삶의 방향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렇다면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결심한다고 해서 사랑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억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감정이 아닙니다. 오늘부터 하나님을 두 배로 사랑해야지 결심한다고 해서 마음속에서 갑자기 사랑이 솟아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께서는 “나를 더 사랑하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나를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도 비슷합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깊이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알아가면서 사랑이 자라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알게 될수록,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 번째 길은 우리가 사랑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다시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메말랐을 때 우리는 흔히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 시간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를 더 많이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봉사를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들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회복하는 시작은 더 많은 종교행위가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 다시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왜 사랑하셨을까?”
“예수님께서 왜 나를 위해 죽으셨을까?”
“나는 하나님을 떠났는데, 하나님은 왜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을까?”
이 은혜를 깊이 깨달을 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2).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거룩한 감정입니다. “당신의 성경 지식과 신학 지식이 당신 안에 거룩한 감정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헛된 지식일 뿐입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