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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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0:25-37

찬송가 220장 사랑하는 주님 앞에
오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겠습니다. 여러분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 은광교회에서 말씀을 나눌 수 있어서 참 감사합니다. 우리 옆에 있는 지체와 이렇게 한번 인사할까요? ‘말씀을 행합시다’ 오늘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할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장발장’이라는 소설을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원래 제목은 ‘레미제라블’이라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19세기 프랑스 빅토르 위고라는 사람이 적은 소설인데요, 이 당시 프랑스 민중들의 비참한 삶을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장발장은 어떤 사람이에요? 조카들을 위해 빵 한조각 훔쳤다가 5년 형을 선고받습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런데 이후 여러 차례 탈옥을 시도하다가 형이 계속늘어나 19년 만에야 석방되게 됩니다. 빵 한조각에 19년이라니요. 참 암울하지요. 여러분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장발장은 전과자라는 신분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전과자는 어떻게 보면 낙인과 같습니다.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죠. 여관에서도 마을에서도 그를 받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밥 한끼, 잠자리 하나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이 소설에는 장발장을 바라보는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명은 바로 자베르 경감이라는 사람입니다. 자베르라는 사람이 사는 세상은 아주 명확했습니다. 그의 기준은 아주 명확합니다. 법과 정의입니다. 그에게 사람은 딱 둘로 구분되는거죠. 법과 정의를 지키는 정직한 사람, 또 한 부류는요, 법을 어긴 죄인, 자베르 경감은 장발장을 어떤 시선으로 보았을까요? 전과자, 죄인, 계속해서 감시해야 할 사람으로 지켜 봅니다.
또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밀리엘 주교라는 사람입니다. 장발장의 소문은 파다했습니다. 얼마나 악질이면 19년이나 형을 살고 나왔을까, 그를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고요, 먹고 살기가 너무나 힘겨웠습니다. 그럴 때 그 전과자 장발장을 자신의 집에서 재워주고, 먹을 것을 베풀고 잠을 재워줍니다.
그런데 장발장이 어떻게 해요? 그 주교의 집에 있는 은식기를 가지고 도망가버립니다. 그런데 잡혀서 주교 집에 온거에요. 그러니깐 밀리엘 주교가 뭐라고 한지 아세요? 아니 왜 내가 당신에게 준 은식기 인데, 은촛대도 마저 가져가지 않았냐면서, 그를 품어줍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제 그 돈으로 가서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그를 보내줍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이 사람은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살아가면서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인생의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나름의 기준을 확고히 가집니다. 사람에 대해도 그렇게 해요. 여러분 전과자를 어떻게 대해야 되겠습니까? 자베르 경감은 알고 있죠. 저놈의 전과자들은 나와도 또 죄를 지을게 뻔하다. 숱하게 보아왔고, 경험해왔을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밀리에 주교는 몰랐을까요? 그도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대했겠지요.
이처럼 사람들은 살아가며 늘 경계를 짓습니다. 나름의 기준들을 가지고 말이지요. “저 사람은 나와 성향이 맞지 않아” “저런 부류의 사람들은 상종하면 안되” 나름대로 인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준짓고 살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마음의 울타리를 치고요, 울타리 밖의 사람들과는 일정한 거리감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나를 지키는 지혜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로 어떤 삶이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인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깨닫는 지혜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본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불리는 이야기이지요.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내용은 너무나 익숙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도를 만나게 됩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죽을 만큼 맞고 거의 죽어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때 마침 한 제사장이 지나가는데요, 도와주지 않고 지나가버립니다. 레위인 역시 지나가는데요 그도 역시 도와주지 않고 지나가버립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는데요, 그는 그를 지나치지 않고, 극진히 보살펴 주고, 그가 회복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줍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이야기는요 교회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다양하고 폭넓게 읽혀 왔습니다. 그만큼 성도들에게 감동을 줬던 예수님의 가르침인 것이죠. 초대교회 역사에 어거스틴이라는 교부는요, 이 이야기 전체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으로 이 이야기를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아담, 사마리아인이 그리스도, 그가 회복했던 여관을 교회로 이해하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에 앞서서, 정말로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먼저는 이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 우리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의 내용은요, 뭐는 뭐고, 뭐는 뭐다라는 비밀이 담겨있다기 보다, 예수님께서 한 율법교사가 던진 아주 구체적인 질문에 답을 하시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인데요, 한번 다시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질문합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영생에 관심이 있어 보입니다. 율법교사면 뭐에요. 하나님의 말씀, 구약도 아주 잘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의 의도는 무엇이죠?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나아왔다, 질문했다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의도를 알고 이렇게 대답하시죠. 그래 그렇다면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그는 율법교사답게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합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죠. 이것을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깐 예수님이 그래요. 네 대답이 맞아,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래 너가 알고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하라는거에요. 그렇게 살라는거에요. 그러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여러분 그렇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네 얻을 수 있습니다. 율법의 100%를 완벽히 지키면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삶을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지키면 영생을 얻을 수 있어요. 그게 율법의 가르침 맞습니다. 아쉬운 것은 그럴 인생이 없다는 것이 문제겠지요.
그런데 이 대답을 듣고 율법교사는 한가지 더 질문을 합니다. 29절에 그렇다면 이웃 사랑하는거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이 뭘 하시는거에요. 대답하시면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거에요.
여러분들에게 질문해볼게요. 예수님 믿는 사람이라면 이웃을 사랑해야지요? 그럼 한 가지더 질문해볼게요. 그럼 그 이웃은 누구입니까? 이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으세요? 여러분들이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에 정말로 진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교사 역시 내 이웃 사랑하기를 할 것이다라고 대답하면서, 결국 무엇에 대해 질문하냐면요, 말씀이 말하는 네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질문하고 있는거에요.
그가 이렇게 말한 의도에 대해 29절에 보세요. 정확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질문했다라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요, 지금 내가 맞고 예수 당신은 틀렸다는 말이에요. 뭐가요? 당신의 삶에 드러난 그 이웃의 정의가 틀렸다는거죠. 어떻게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세리와 죄인와 창기와 어울릴 수 있는가? 당신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틀린 사람이다. 그 사람들은 우리의 이웃이 아니다. 라고 예수님 앞에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그 율법교사에게는요, 자신이 사랑해야 될 이웃이 누구인지 정의가 내려져 있는거에요. 같은 동족, 유대인, 마지노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이지요. 이미 그에게는 그 이웃에 포함되는 인간과, 그렇지 못하는 인간이 정확하게 나뉘어져 있는거에요. 그것을 예수님도 알고 있는지, 당신의 삶이 율법에 합당한지 질문하고 있는겁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고, 이야기를 말씀하시는거에요. 그게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인 것이죠.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하여 아주 중요한 것을 그에게 말씀하시면서, 교회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경계선에 대한 문제입니다.
첫번째 살펴볼 부분은 신앙의 경계선입니다. 어떤 사람이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여리고는요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예루살렘은 언덕, 즉 해발 760미터에 성이 있고요, 여리고는 해수면보다 240미터 낮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니깐 완전 급격하게 내려가는 길인거에요. 이 당시에 이 길은 험한 산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위틈 곳곳에 숨어 강도가 자주 나타나는 지역이었다고 해요. 그니깐 예수님은 그 당시에 일어났던 흔한 일을 가지고 예화 삼아서 가르치시고 계시는거에요.
예수님은 이 사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범죄자인지 의로운 사람인지 전혀 이야기 하지 않으세요. 어떤 사람이라고 지칭합니다. 그리고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빼앗겨 벌거벗어지고요, 맞아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때 신분이 정확히 밝혀진 사람 두 사람이 등장하지요. 첫번째 사람은요? 바로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똑같은 구조로 바로 다음절에 레위인이 지나갑니다. 이 두 절의 구조를 보면요, 인물만 다르지 문장 구조가 똑같이 되어 있습니다.
이 제사장과 레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쉽게 말하면, 하나님 잘 믿는 사람이지요. 방금 예루살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무엇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까? 명절이었는지 모릅니다. 성전에서 해야 될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 제사장은 제사를 집도했겠구요, 레위인은 성전의 맡은 임무를 감당했겠죠. 그것이 끝나고 내려가고 있는 길이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예배 잘 드리고, 기도도 잘하고, 봉사도 잘하고 집으로 가고 있는 길이겠지요.
그런데 누가 보여요? 죽어가는 사람이 보이는거에요.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지나쳐가버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은 옹호해보려고 이렇게 보기도 합니다. 제사장이니깐, 만약에 시체일 경우에 부정하게 되니깐 그랬겠지, 율법을 지키려고 그랬겠지 라고 이야기 하는데요, 그럴 수가 없어요. 그들은 이미 직무가 끝나고 내려가는 길이었다니깐요. 게다가 율법에 21절에 시체에 대한 부정함에 대해 설명하는데요, 유대교 안에서 이제 율법을 해석하는 미쉬나라는 책이 있거든요, 거기에 보면 ‘메트 미츠바’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이 개념은, 버려진 시신, 연고자가 전혀 없는 시신을 방치하면 안된다. 정결 의무가 있는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버려진 시신을 발견하면 반드시 장사를 지내주어야 한다라는 전통이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뭐에요. 괜히 엮기기 싫으니깐, 힘드니깐,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나 싶으니깐 그들은 지나쳐버린거에요.
여기서 예수님은 무엇을 짚고 있는거에요? 율법교사, 그래 너희 유대인들이 말하는 신앙의 경계선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너네 뭐 하나님 앞에 제사도 잘드리고, 기도도 하루에 세번 꼬박꼬박하고, 뭣도 잘지키고 율법도 잘지키고 그런다고 하면서 실상은 뭐에요? 정말로 죽어가는 사람 하나, 생명조차 귀히 여기지 않는, 도와주지 않는, 위선적인 삶, 신앙과 삶이 분리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도전하고 있는겁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도 이런 신앙의 경계선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들처럼 열심히 예배당에서 예배도 하고, 기도도하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지만, 정작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 앞에서는, 저들처럼, 그냥 지나쳐버리는 삶 그게 우리의 삶은 아닐까요?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세요. 우리는 늘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지나쳐버립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서로에 대한 배려, 도움, 사랑이 점점더 없어져가고 있습니다. 뉴스에서도 그러잖아요. 도와주니깐, cpr해서 살려주니깐 성추행으로 신고해버리고, 오히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니깐 보따리 내놓으라는 상황이 많은거죠. 그러니깐 사람들은 어찌 생각해요. 뭐하러 내가 도와줘서 낭패보냐는거에요. 뭐하러 괜히 나섰다가 피곤해지냐는거죠.
그런데 그게 진짜 예수님이 원하시는 모습아닐까요? 만약에 밀리에 교주가 장발장 도와줬잖아요. 도와주니깐 장발장은 뭐했어요? 은식기 훔쳐갔어요. 밀리에 주교가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괜히 범죄자놈 도와줘서 내가 낭패봤다, 그렇게 생각했으면요,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저놈 당장 감옥에 쳐넣어라,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이다 이야기했겠지 않았겠어요?
이게 예수님의 모습 아닙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어요? 우리 도와주려고, 우리 구원해줄려고 오셨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뭐하고 있어요. 그 예수님의 사랑도 모르고, 십자가에 못박아버린다니깐요. 그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인거에요.
우리는 늘 죄인이어서 뭐만 생각해요? 내가 당할 피해만 생각합니다. 내가 억울한 일은 당하지 않을까. 괜히 귀찮은 일에 엮기지 않을까. 하나 손해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예배 잘드리는거 중요합니다. 기도 열심히하셔야죠. 봉사도 열심히 해야죠. 그런데 정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삶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이런 신앙의 경계를 확장하는 일입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를 정말로 우리의 삶에서 나누는 일입니다. 때로는 내가 손해보고, 귀찮아지고, 곤경에 빠지더라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의 삶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누구입니까? 바로 사마리아인입니다. 함께 33절 말씀 읽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앞선 두 사람과 똑같은 동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도 왔고, 그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다르지요. 제사장과 레위인은요?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요? 불쌍히 여겼다라고 말씀합니다. 똑같은 장면을 보고도, 똑같은 사람을 보고도 완전히 다른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도와준 사람을 누구로 지칭해요? 사마리아인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청중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제사장이 그 사람을 보고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레위인이 그 모습을 보고 지나갔습니다. 여러분 여기까지 이야기를 몰입해서 듣고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그렇다면 이 불쌍한 사람을 도와줄 인물이 누구인가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누가 이 사람을 도와줄까 상상하지 않겠어요. 어떤 선한 사람이 나타날 것인가, 아니면 종교인들은 지나쳤으니깐, 그냥 평범한 유대인이 나서서 그를 도와줄까? 이런 기대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에요? 사마리아인이었대요. 이 내용은요 당시에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겁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는 원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안인이 서로 상종하지 않았다 이런 내용은 많이 들어보셨죠? 이 역사는 이제 북이스라엘 멸망으로 올라가죠. 주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됩니다. 앗수르에 의해서요. 앗수르는 정복정책이 뭐였냐, 혼혈정책을 폈습니다. 앗수르 민족을 북이스라엘 땅에 정착시켜 살게 한거죠. 그래서 피가 어떻게 되요? 섞여버립니다. 그래서 전통 유대인들은 그 섞인 혈통을 사마리아인으로 여기며 그들을 자신의 동족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보면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을 방해하는 그림들이 등장합니다.
그래도 어째야 되요? 사마리아인들도 하나님 믿고 싶잖아요, 그래서 주전 4세기경에, 그리심 산에 별도의 성전을 세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보기에 어때요? 쟤들 우리 민족도 아닌데, 성전에서 제사하는게 보기가 싫은거에요. 그래서 주전 128년에 사마리아 성전을 유대인들이 파괴해버려요. 사마리아인들 역시 복수를 해요, 주후 8년에 유월절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명절을 세러 싹 모였을 때에, 성전 주위에 죽은 사람 뼈를 막 뿌려가지고 유월절 행사를 방해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 때에요.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원수 사이인거에요. 유대인들은 그들을 향해서 더러운 돼지라고 했고요 회당에서 공공연하게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고 해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누가 나와요? 바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사람이 사마리아 인이었다는거에요. 이것을 듣고 있던 유대 청중들에게는 아주 충격적인 말인거에요. 원수같은 자가 나타나서, 그를 지나간게 아니라, 오히려 그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줬다는거에요.
이 사마리아 사람의 선행을 예수님은 아주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정성을 다해 그를 보살펴 줘요, 자신이 가진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싸매고요, 짐승에 태워서 주막에 맡겨줍니다. 그리고 주막에 돌보아줄 비용 데나리온 둘을 맡겨줍니다. 이 비용은 당시 3주치 숙박비였다고 해요. 그것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치유될 때까지 돌보아 달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주겠다 이렇게까지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 이 사마리아사람은요, 지금 강도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내가 도와줘야 될 사람인지, 그렇지 않아야 될 사람인지, 내게 어떤 이득을 줄 사람인지 계산하지 않습니다.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사용해 그를 회복시켜주려고 합니다. 여러분 사마리아 사람이 바보였을까요? 자기가 이 사람을 살리려면 도와주려면 어떤 수고와 손해를 감수해야 할지 몰랐을까요? 알았겠죠. 낯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주고, 심지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책임까지 떠 안고요. 심지어 깨어나면 이 사람이 자신에게 보따리 내놓으라고 할 수 있었다는 것도 그는 알았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모든 일을 기꺼이 감당합니다.
서두에 말했던 장발장에서 밀리에 주교가 그런 사람 아니겠습니까? 기껏 도와줬더니 은식기를 가져가버려요. 그가 잡혀왔을 때 뭐라고 말해줍니까. 은촛대도 가져가라 했는데 왜 안가져갔냐 그를 감싸주지 않습니까. 그 소설에 보면요, 장발장이 그 순간 변화합니다. 그는 이제 새로운 삶을 살기로 작정합니다. 그래서 그 소설에 보면요, 그는 마들렌이라는 새 이름으로 살아가는대요, 공장을 운영하며 가난한 이들을 돕고, 지역 사회에 존경을 받아 시장의 자리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무엇이 그를 바꾸었습니까? 불쌍히 여기는, 그 사랑이 그를 바꾼거에요.
예수님의 사랑은 이렇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우리가 잘아는 삭개오가 나오지 않습니까. 삭개오가 얼마나 나쁜 사람입니까. 그는 세리장입니다. 자기 친족들 세금 걷어다가 로마에 가져다 바치면서 재산 착복하는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이 왜 변화했습니까? 예수님이 그의 집에 거하겠대요. 삭개오야 이름을 불러주시면서요, 그와 같이 식사를 하겠대요. 당시에 유대인들은요, 절대 상종안하는 죄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식탁문화라는 것은요, 천국가서 함께 밥먹을 식구라는 의미가 있어요. 근데 예수님이 자기보고 친구래요, 네가 내 형제래요. 나와 같이 밥먹자 하는거에요.
그 사랑이 누구를 바꿔요? 삭개오를 바꾸는거에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예수님께 어떠한 사랑을 받았습니까? 이런 사마리아인과 같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 삭개오와 같은, 나밖에 모르고 세상의 것에 미쳐 살아갔던 나를 위하여,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내 인생 변한거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런 사랑을 해야 되는거에요. 이게 진정 주님의 사랑 받은 자의 삶 아니겠습니까? 진정한 사랑은요, 마음속으로 적당히 계산해서 베푸는 친절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죄인을 위하여, 원수를 위하여,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이 사마리아인의 삶처럼, 예수님의 삶처럼, 누군가를 위하여 진정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그러한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대지 — "가서 이와 같이 하라": 삶의 현장으로 나가는 신앙 (36-37절)
여러분 마지막으로요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질문합니다. 36절 보세요.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여러분 이 이야기는 어떤 질문해서 시작했습니까?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물어봤잖아요. 내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이 누구냐고요.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렇게 질문했단 말이에요. 근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대답을 하고 계시는거에요. 사랑해야 될 이웃이 누구냐고 질문했는데, 그럼 답이 뭐여야 해요? 강도 만난 사람이 네 이웃이다 이렇게 대답하면 될텐데. 그 말이 아니라 뭘 해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냐? 라고 질문하고 계시는거에요.
이 차이가 아주 결정적인 가르침의 내용입니다. 율법교사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웃이 있었던거에요. 내가 사랑해야 될 이웃이 누구인지 그는 분명했습니다. 저 사람이 내 이웃인가? 사랑을 베풀어야 할 명단에 들어간 사람인가? 빠지는 사람인가? 이것을 물었죠.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대답을 하고 계세요. 애초에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거에요. 당신이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줘야 되는게 이웃 사랑의 가르침이지, 이웃을 규정하고 경계를 짓고 하는 것이 그 계명의 가르침의 의미가 아니라는겁니다.
율법교사는 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는 사마리아인이라는 이름조차 입에 담지 않습니다. 왜요? 여전히 그 안에는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이웃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정은 하죠. 자비를 베푼 자가 그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었다고요. 그러니깐 예수님은 정확히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한번 따라해보겠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게 바로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읽었던 맨처음 25절로 돌아가게 됩니다. 율법교사가 그랬죠.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하셨어요.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리고 긴 이야기가 끝나고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처음 대답과 마지막 똑같습니다. 영생이라는 것은 관념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 사랑의 삶으로 완성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가르치고 계십니다. 율법교사에게 너는 자꾸 이웃이 누구인지, 네가 사랑하기로 결정한 사람, 그 이웃에게만 관심이 있냐는거에요. 진짜 이웃사랑은 그게 아니라는거죠. 도움이 필요한 어느 사람에게라도 이웃이 되어주는 것 그게 진짜 하나님이 가르치신 이웃 사랑이라는거에요.
우리도 흔히 저 율법교사처럼 생각합니다. 나의 이웃이라는 범위가 뚜렷히 정해져있습니다. 내 가족, 내 친척, 내 친구, 교회 안에서도 나랑 말이 통하는 사람, 이것을 벗어나는 사람은 뭐에요? 얼마든지 미워해도 되고, 도와주지 않아도 되고, 정죄해도 되는 인간으로 구분하려 합니다.
여러분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런 잣대로 사랑하셨다면, 나는 사랑받을 사람입니까? 그럴 부류에 속한 인간입니까? 예수님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라면 누구에게든지 이웃이 되어주셨습니다. 병든자, 고통 당하는 자, 부정한 자, 사마리아인, 세리, 창기, 죄인들, 이방인 어느 하나 가릴 것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하나님과 원수된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아낌 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예수님은 말씀을 알라 라고 하지 않으시고요, 가서 행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번 한주간의 삶도, 누구에게나 진정한 이웃이 되어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문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저희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경계선을 긋고 살아왔는지 돌아봅니다. 이 사람은 내 이웃이고, 저 사람은 아니라고, 나름의 기준으로 사랑할 대상과 외면해도 되는 대상을 나누며 살아온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배당에서는 주님을 사랑한다 고백하면서도, 삶의 현장에서는 죽어가는 한 사람 앞에서 그냥 지나쳐버린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이 바로 저희의 모습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저희를 이런 자로 살게 하지 마시고, 계산하지 않고 다가가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손해가 될까, 곤경에 빠질까 먼저 재는 마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 앞에서 기꺼이 가진 것을 내어주는 마음을 저희에게 부어주옵소서. 그 사랑이 세상에서 배운 계산이 아니라, 저희를 먼저 그렇게 사랑하신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임을 늘 기억하게 하옵소서.
저희는 본래 강도 만나 거의 죽어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먼저 저희에게 다가오셔서, 원수 되었던 저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값없이 받은 그 사랑을 저희도 세상 속에서 흘려보내게 하옵소서. 가족에게, 이웃에게, 그리고 저희가 미워하고 밀어냈던 사람들에게까지 먼저 다가가 이웃이 되어주는 저희 되게 하옵소서.
이 말씀을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게 하옵소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오늘 저희의 발걸음이 되게 하시고, 이번 한 주간 저희가 만나는 모든 자리에서 그 말씀이 삶으로 증명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헌금기도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리나이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에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복된 주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며 말씀 듣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 시간 은혜 받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귀중한 물질을 올려드립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 왔음을 고백하여 드립니다. 형편에 따라 최선의 것을 주님 앞에 올려 드립니다. 이 감사의 고백이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해 사용되게 하옵소서.
세계 선교와, 주의 복된 소식이 전파되는 일에,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올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우리 안에 주님을 향한 감사가 넘쳐나게 하시고, 이 시간 참석한 모든 성도님들의 가정과 일터위에 더 큰 은혜로 채워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께 더 많이 드리게 하시고, 더 감사하게 하시고,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복된 우리의 삶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모든 만물의 주인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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