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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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존중과 출산(낙태)
생명 존중과 출산(낙태)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사랑합니다. 꿈사땅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에게 질문 하나를 해보려고 한다. 만약 길을 가다가 휴대폰 하나를 주웠다고 생각해 보자. 오래된 휴대폰이라면 “주인을 찾아줘야겠다.” 정도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최신 스마트폰이라면 어떨까? 아마 더 조심해서 다루고, 혹시라도 흠집이 생기지 않도록 신경 쓸 것이다. 왜 그럴까? 가치가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반대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쉽게 버리고 쉽게 포기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돈일까? 성적일까? 인기일까?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이다. 우리는 아기가 태어나면 모두 함께 축하한다. 갓 태어난 아기를 보면 “정말 귀엽다.”, “정말 소중하다.”라고 말한다. 생명이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태어나기 전에는 어떨까?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도 같은 생명일까? 아니면 아직 사람이 아닐까? 사실 이 질문은 오늘날 전 세계가 계속해서 논쟁하고 있는 질문이다. 어떤 사람은 태아도 처음부터 생명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아직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낙태를 둘러싼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할까?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여론이나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139편은 하나님께서 태어나기 전의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시는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 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우리를 알고 계셨고, 우리의 몸을 친히 지으셨으며, 우리의 모든 삶을 계획하셨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왜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시는지, 그리고 그 생명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39편은 다윗이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전능하심을 찬양하는 시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잘 아시는지를 생각하다가 한 가지 사실에 도달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가장 잘 아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직접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13절을 함께 보자.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생명이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당시에도 사람들은 아이가 부모를 통해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을 단순한 자연의 과정으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부모를 통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맞지만, 그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고 계셨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 세상을 떠나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친밀하게 관여하시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직접 지으시는 창조주이시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기묘하다’는 말은 단순히 “신기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이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놀랍고 경이롭다는 뜻이다. 우리의 심장, 뇌, 눈, 손가락 하나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의 결과이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존재를 바라보며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찬양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묘하심”이라는 원래 이 단어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찬양을 불러일으킬 만큼 놀랍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이어지는 “기이하다”라는 표현 역시 사람이 쉽게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단어가 시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역사 가운데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설명할 때 반복해서 사용된다는 점이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만 놀라운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명을 창조하시는 일 역시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 병원에서 아기가 태어나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러운 일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생명의 탄생은 단순한 생물학적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 사역이라고 선포한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5절에서도 같은 고백이 이어진다. 여기서 “땅의 깊은 곳”은 실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윗은 창세기 2장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던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생명을 친히 지으시는 창조주이심을 노래하는 것이다.이어지는 16절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준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다윗은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을 보고 계셨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난 이후에야 우리를 아신 것이 아니다. 잉태되기 전부터 우리를 알고 계셨고, 모태에서 자라는 모든 과정을 보고 계셨으며, 앞으로 살아갈 삶까지도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예지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만 아시는 분도 아니고 현재만 보시는 분도 아니다. 우리의 시작과 끝을 모두 알고 계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태아의 발달 단계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윗이 말하고 싶은 것은 아직 완전한 모습이 갖추어지기 전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을 알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이 구절을 통해 생명이 언제 시작되는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선포한다. 그래서 다윗은 이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날을 아시고 붙들고 계신다고 고백한다. 우리의 삶은 우연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마지막으로 17-18절에서 다윗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찬양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생각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생명을 향해 가지고 계신 생각은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고 깊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생각이 너무도 크고 깊어서 “그 수가 모래보다 많다.”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생명의 가치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직접 지으셨고, 태어나기 전부터 알고 계셨으며, 그 삶을 향한 뜻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먼저 우리는 생명을 바라보는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야 한다. 오늘날 세상은 생명의 가치를 상황과 조건에 따라 판단하려고 한다. 어떤 생명은 환영받고, 어떤 생명은 부담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분명히 말한다. 생명의 가치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다.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시고,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생명이기에 우리는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생명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은 단지 태아의 생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학교에서 친구를 함부로 놀리거나 왕따를 방관하는 것, 장애인을 무시하거나 노인을 귀찮은 존재로 여기는 것, 누군가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말과 행동 역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한 작품으로 바라보신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낙태의 문제도 바라보아야 한다. 오늘 본문은 낙태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태에서부터 생명을 지으시고, 아직 완전한 모습이 갖추어지기 전부터 그 생명을 알고 계셨다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엄마의 뱃속에 있는 생명도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시는 생명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그 생명을 함부로 끊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주권을 가볍게 여기는 일이 될 수 있다. 물론 현실에는 우리가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아픔과 어려움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군가를 정죄하기보다 사랑으로 품고 도와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생명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는 분명히 붙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여론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생명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사람인 것이다.
사랑하는 꿈사땅 친구들. 오늘 우리는 시편 139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를 살펴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로 보지 않으셨다. 우리가 모태에 있기 전부터 우리를 아셨고, 친히 우리를 지으셨으며, 지금도 우리의 삶을 붙들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이 세상에 가치 없는 생명이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은 단지 말씀으로만 증명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죄로 죽어 가던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를 보여 주셨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사건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존중하는 이유가 단순히 윤리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다. 생명을 만드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다. 이번 한 주 동안 여러분이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친구를 바라볼 때도, 약한 사람을 바라볼 때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을 생각할 때도 먼저 이렇게 질문해 보자. “하나님은 이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실까?” 그 질문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바꾸고, 우리의 선택을 바꾸며, 우리의 삶을 바꾸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생명을 우리도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꿈사땅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