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802 청년교회

청년교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 views
Notes
Transcript

Ezekiel 34:11–24 NKRV
11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12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13 내가 그것들을 만민 가운데에서 끌어내며 여러 백성 가운데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14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15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6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17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의 양 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 사이와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심판하노라 18 너희가 좋은 꼴을 먹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 19 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곧 내가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서 심판하리라 21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를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 22 그러므로 내가 내 양 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거리가 되지 아니하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24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되돌릴 것이 하나도 없는 자리

에스겔은 제사장 부시의 아들이었습니다. 주전 597년, 여호야긴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간 첫 번째 포로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에스겔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앞부분은 심판이고 뒷부분은 회복인데, 그 사이를 나누는 사건이 33장에 나옵니다. 예루살렘에서 도망친 사람이 와서 성이 함락되었다고 전합니다. 주전 585년의 일입니다.
이 소식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나라가 없어졌습니다. 성전이 불탔습니다. 다윗부터 이어져 온 왕조가 끊어졌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부터 잘하면 회복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무너질 것은 이미 다 무너진 뒤였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34장을 여십니다. 그리고 앞부분에서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먼저 말씀하십니다.
1절부터 10절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여기서 목자는 양 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 목자는 왕과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목자라는 말은 '먹이다'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목자라는 이름 안에 이미 먹이는 사람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2절에서 목자들은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고 하실 때, 원어로 읽으면 먹이는 자들이 먹여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3절이 말합니다. 양의 기름을 먹고 양털을 입고 살진 양을 잡아먹었습니다. 먹이라고 세운 사람들이 양으로 자기 배를 채웠습니다. 그리고 5절에 결과가 나옵니다. 목자가 없으므로 양이 흩어졌습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양들이 이렇게 된 데에는 양이 만들지 않은 몫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자기 배를 채운 결과를 양이 뒤집어썼습니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 중에도 우리가 만들지 않은 몫이 있습니다. 그것까지 다 자기 탓으로 짊어질 필요는 없습니다.

첫째, 양은 스스로 나올 수 없습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이 이 무너진 자리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첫마디가 특이합니다. 나 곧 내가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에서는 '나'라는 대명사를 두 번 겹쳐 놓았습니다. 강조하는 방식입니다. 사람에게 맡겨 놓았더니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는 내가 직접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다음이 찾고 찾되입니다. 이것은 같은 말의 반복이 아니다. 원어에서는 서로 다른 두 동사입니다. 앞은 찾는다는 뜻이고, 뒤는 살펴본다는 뜻입니다. 뒤의 낱말은 목자가 양을 한 마리씩 붙잡고 어디 다쳤는지 몸을 확인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양 떼를 무리째 몰아오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씩 찾아서 한 마리씩 확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찾으시는 양은 어떤 양입니까. 16절에 네 종류가 나옵니다. 잃어버린 자, 쫓기는 자, 상한 자, 병든 자입니다. 이 넷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넷 다 양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특히 상한 자라는 말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히브리어는 뼈가 부러졌다는 뜻입니다. 다리가 부러진 양은 목장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못 가는 것이 아닙니다. 길을 알아도 갈 수 없습니다. 의지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움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양에게 필요한 것은 방향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와서 안고 가는 사람입니다.
12절에는 흐리고 캄캄한 날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이 표현은 원래 심판의 날, 앞이 안 보이는 무서운 날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양이 만들지도 않았고 막을 수도 없는 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날이 지나간 다음에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날 한가운데로 들어오셔서 양을 찾아내십니다.
11절부터 16절까지를 천천히 읽어 보면 한 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동사의 주어가 전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찾겠다, 내가 살피겠다, 내가 건져내겠다, 내가 모으겠다, 내가 먹이겠다, 내가 싸매겠다, 내가 강하게 하겠다. 열다섯 번이 넘습니다. 그런데 이 긴 목록에서 양이 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로 붙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서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리가 부러진 양은 찾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반대로 생각합니다. 내가 정신을 좀 차려야, 내 상태가 좀 나아져야,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정리해야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반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정리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정리할 수 없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자격을 갖춰서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못 움직여서 찾아오십니다.
한 가지를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기도하면 내일 상황이 바뀐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는 오래 기다렸는데 아직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안 찾아오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본문이 약속하는 것은 모든 문제가 오늘 해결된다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무리 전체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씩 보십니다.

둘째, 양 떼도 답이 아닙니다

17절에서 말씀의 방향이 바뀝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나쁜 목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런데 17절에서는 양 떼를 부르십니다. 나의 양 떼 너희여. 그러고는 내가 양과 양 사이를 심판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나쁜 목자만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사라진다고 문제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양 떼 안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18절과 19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살진 양들이 좋은 꼴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다 먹고 나서 남은 꼴을 발로 밟아 놓았습니다. 맑은 물을 실컷 마시고 나서 남은 물을 흐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뒤에 온 양들은 밟힌 꼴을 먹고 흐려진 물을 마셔야 했습니다.
21절을 보면 이것이 어쩌다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뜨리고, 병든 양을 뿔로 받아서 무리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지나가다 밟힌 것이 아니라 밀어낸 것입니다.
21절 끝의 낱말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흩어지게 한다는 말입니다. 5절에서 목자가 없어서 양이 흩어졌다고 할 때 쓴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34장은 흩어짐의 원인을 두 번 지목합니다. 5절에서는 목자가 원인이고, 21절에서는 같은 양이 원인입니다. 위에서 놓아 버려서 흩어지고, 옆에서 밀어서 흩어집니다.
이 대목이 우리에게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받는 상처가 바로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개 세상에서 상처받을 각오는 하고 삽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받는 상처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는 안전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큰 사건 하나로 오지 않습니다. 대개는 작은 일들이 쌓입니다. 인사를 했는데 못 본 척 지나간 일, 다들 아는 이야기를 나만 몰랐던 일, 조 편성에서 늘 마지막에 남는 일, 내가 한 이야기가 다른 데서 다른 모양으로 돌아온 일, 힘든 시기를 지나는 동안 아무도 연락하지 않은 일. 하나하나는 너무 작아서 말하기도 민망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몇 달, 몇 년 쌓이면 사람이 조용히 밖으로 나옵니다.
이런 상처가 특히 힘든 이유가 있습니다. 억울하다고 말할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대놓고 잘못한 것도 아닙니다. 밀어낸 사람은 자기가 밀었다는 것을 모릅니다. 옆 사람들도 모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자기 자신을 의심하게 됩니다. 내가 예민한 건가. 내가 믿음이 약한 건가.
그런데 19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내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흐린 물을 마시는도다. 이 문장의 시선이 어디에 있습니까. 밟은 자가 아니라 밟힌 것을 먹은 자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광경을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남은 물이 흐려진 것도, 그 흐린 물을 누가 마셨는지도 아십니다.
우리도 이 자리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뿔로 받은 적은 없어도, 내가 이미 지나온 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뒤에 오는 사람에게 알려주지 않은 적은 있습니다. 밀어뜨린 적은 없어도, 편한 사람들끼리 있느라 밖에 서 있는 사람을 못 본 척한 적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정직하게 마주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쁜 목자를 치우면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양 떼 안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이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답이 없습니다. 위에 있는 사람에게도 없었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도 답이 아니었습니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밀어내는 양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사람을 봅니다. 저 목사님이 괜찮으면, 저 리더가 좋은 사람이면, 저 공동체가 건강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그 기대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정직하게 보여 줍니다.
22절에서 하나님은 두 가지를 함께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양 떼를 구원하겠고, 양과 양 사이를 심판하겠다. 이 둘은 다른 일이 아닙니다. 다리가 부러진 양을 안고 목장에 돌아왔는데 그 목장에 아직 뿔로 받는 양이 있으면 그 양은 또 밀려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것은 돌아온 양이 다시 밀려나지 않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셋째, 그래서 한 목자를 세우십니다

23절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십니다. 내가 한 목자를 세우겠다, 내 종 다윗을 세우겠다.
이 약속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목자에게도 답이 없고 양 떼에게도 답이 없다는 것을 다 보이신 다음입니다. 사람 쪽에서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이 드러난 자리에서 하나님이 한 목자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다윗은 다윗 본인이 아닙니다.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나올 왕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을 하실 때 다윗 왕조는 이미 끝나 있었습니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 채 끌려갔습니다. 끝난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그 끝난 이름을 다시 부르십니다.
24절에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개역개정이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로 옮겼는데, 여기서 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왕을 가리키는 보통 낱말이 아닙니다. 지도자, 앞서 가는 자를 뜻하는 다른 낱말입니다. 문장 순서도 그렇습니다.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가 먼저 나오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가 뒤에 나옵니다. 왕권은 하나님께 있고, 세움 받은 다윗은 백성 가운데 있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을 무너뜨린 것이 왕들의 권력 남용이었으니, 회복된 다윗은 전혀 다른 종류의 통치자여야 했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물음이 남습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친히 목자가 되겠다고 하셨는데, 23절에서는 한 목자를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시겠다는 것인지 사람을 세우시겠다는 것인지 본문 안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 물음의 답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나왔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하나님이 친히 오시겠다고 하신 약속과 다윗의 자손을 세우시겠다고 하신 약속이 한 분 안에서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대신할 사람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백성 위가 아니라 백성 가운데 오셨고, 섬김을 받는 방식이 아니라 목숨을 버리는 방식으로 오셨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셔야 했습니까. 사람 쪽에서 나올 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목자도 아니고 양 떼도 아니고 나 자신도 아니었습니다. 다리가 부러진 양을 안고 나오는 값을 아무도 치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자가 자기 목숨으로 그 값을 치르셨습니다.

마치며

오늘 이 말씀 앞에서 한 가지를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내 시선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자기를 봅니다. 내가 왜 이것밖에 안 될까, 내가 뭘 잘못해서 이렇게 됐을까. 그런데 다리가 부러진 양은 자기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 자주 사람을 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저 공동체가 나를 받아 주는지. 그런데 오늘 본문은 목자도 양 떼도 답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이 본문이 우리 시선을 옮겨 놓는 곳은 한 군데입니다. 나 곧 내가 찾겠다고 하신 그분, 흐리고 캄캄한 날 안으로 들어오셔서 한 마리씩 붙잡고 살피시는 그분, 그리고 그 양을 안고 나오려고 자기 목숨을 내신 그 목자입니다.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리는 신앙이 끝나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걸을 수 있는 양이 아니라 걸을 수 없는 양을 찾으러 나가십니다.
교회에서 받은 상처로 마음이 닫혀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다 보고 계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상처 때문에 사람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면, 그 돌린 시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이 본문이 말해 줍니다. 사람에게 실망한 자리에서 우리가 볼 곳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 목자이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걸어 나오지 않았습니다. 업혀서 나왔습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를 들여다보는 데서, 사람을 쳐다보는 데서 시선을 들어 목자를 봅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