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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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 안에서 여러분들은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로 인치심을 입었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몸을 버리심으로 행하신 그리스도의 할례입니다.

우리가 골로새서를 공부하며 집중적으로 보는 것이 큰 그림입니다. 말씀을 자세히 풀어야 할 때도 있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봐야 하는 것이 현재 우리에게는 더 필요한 일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바울은 골로새 지역의 새내기 교인들에게 이 편지를 써야만 했는 가를 보는 것이 첫번째입니다. 두번째는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떤 그림을 보여주고 싶어했을까를 보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이 편지를 쓰던 당시에 먼 후의 우리들까지 생각하며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편지가 골로새 교회 뿐 아니라 그 당시 새로 태어나고 있는 교회들에게도 적용되리라는 것을 생각했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는 새로 태어난 교회를 위한 새내기 지침서와 같은 편지라 보시면 됩니다. 이제 우리는 골로새서의 중심 내용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저번 설교가 그 내용의 첫번째 단추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기억하셔야 하는데, 그래서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 앞서 잠시 기억을 되살려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육체라는 집입니다. 그 집에 누가 사시냐면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으시고 이 세상에 사셨을 때 하나님께서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 안에 사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육체를 입으신 지금도 하나님께서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 안에 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체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담는 그릇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그릇을 고르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택하신 그릇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릇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그릇을 선택하시고 그 안으로 들어오신 예수님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실 것인가를 이미 계획하시고 실행하고 계십니다. 우리 현재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과거 역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 시각으로 완성된 존재입니다. 현재 그 모습이 안보인다고해서 실망하거나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획하셨고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입니다. 그 예수님 안에서 우리들은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 할례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99세에 하나님과 계약을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증거를 육체에 남기시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사인을 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과 연결이 되는 지점입니다. 우리 육체 안에 예수님께서 거하십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 거하시는 증거를 예수님 안에 두었고 그것이 할례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그 증거를 가지고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에 우리 역시 그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약속하셨다는 증표를 육체에 남기신 것으로 이제 그 증표는 영원히 예수님 안에 새겨 넣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할례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가 아닌가 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새내기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증표일 뿐이고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 증표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 말을 바울이 새내기 그리스도인들에게 하고 있을까요? 누군가가 이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예수님을 믿은 것은 기본이고 이제 할례를 받아서 너희의 구원을 완성하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당시 많은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이들에게 할례는 태어나면서부터 자동적으로 가진 표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새로 믿은 그리스도인들 중 특히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할례가 특이한 표식이었고 이것은 유대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해야하는 의식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이셨던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들에게 할례는 해야 하는 통과 의례로 생각되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할례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모르면 왜 해야 하는지, 또는 왜 하면 안되는지를 판단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속아 넘어갑니다. 성경을 모르고 말씀을 읽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기본이고 그 외에 이러한 일들을 해야하고 하면 안되고 하는 그 모든 것이 성경에 있지 않는 한 거짓입니다. 그리고 그 거짓을 오랫동안 했다는 이유로 사실처럼 인식을 해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그 일을 하는지 또는 하면 안되는 지를 말입니다. 질문해야 하고 답을 얻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에 정착된 대표적인 전통이 ‘주일 성수’ ‘십일조’ ‘새벽 기도’ 입니다. 저는 이 전통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이것이 중요하고 왜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좋고 이것을 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다고 여겨지는 것이 그동안의 현실이었습니다. 이러한 전통들이 또 다른 모습의 할례로 처음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유혹한다면 안됩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들에게 이유없이 이것을 해야 한다 또는 하면 안된다 말하면 성경으로 돌아가셔 합니다. 성경에서 그 답을 찾으셔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그 답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정직하게 묻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성경에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전통과 인간의 예의와 인간의 아무리 지극히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속고 있을 뿐입니다. 오랫동안 속고 있어서 그게 속고 있는 지도 모를 뿐입니다.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성도들을 속이고 유혹하는 실체는 결국 악한 영입니다. 그들은 거짓에 능하고 속임수에 능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경계해야 하고 알아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침례로 (예수님과) 함께 매장되었고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일으킴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바울은 이제 우리가 해야하는 새로운 의식에 대해 말합니다. 바로 침례입니다. 굳이 침례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성경 원어가 그렇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에 잠기는 의식이 침례입니다. 세례 역시 침례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더 넓은 범위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저는 굳이 침례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입니다. 자신도 할례를 받았고 평생을 유대의 전통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 할례를 이제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새내기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이렇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신경써야 하는 의식이 따로 있다고 말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이 예수님 위에 쓰신 새로운 증표, 할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담은 그릇인 우리는 더 이상 할례를 따로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새로운 의식은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를 벗으심으로 할례를 받으셨다면, 우리는 그 예수님과 함께 물에 잠기는 의식으로 함께 매장된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침례는 이제 우리에게 할례와 같은 표식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침례를 받았다고 다 그리스도인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확히 이 이유를 알아야 그리고 그 근거를 알아야 됩니다.
할례와 침례가 다른 점은, 할례는 하나님께서 명하셔서 사람이 자신의 육체에 행한 일이었다면, 침례는 이미 하나님께서 다 하신 그 일을 사람이 의식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치 연극이나 드라마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일입니다. 이 일이 가능한 것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살리셨고,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에서 부활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스스로 행하신 할례라고 한다면, 침례는 우리가 그 예수님과 함께 매장되었고 그분이 다시 사심과 함께 같이 살아났다는 것을 보여주고 표현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믿음’ 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새내기 교인들에게 침례의 의미를 정확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대다수의 골로새 교인들은 이미 침례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의미를 모른채로 받았을 것입니다. 설명은 들었지만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침례를 받지 않은 교인들을 위해서도 이 설명은 필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의미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세례나 침례를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에서 의식 전에 교육도 하고 설명도 합니다만, 많은 경우 형식에 그치는 일이 대다수입니다. 교인이 되기 위해 받는 의식적인 행사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할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침례를 받아야 구원이 되는가? 입니다. 아주 간단한 답은 ‘노’ 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 답을 알기 위해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침례에 대해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침례가 또 다른 할례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침례는 그 구원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증표로 행하는 예식입니다.

그리고 죄 안에서 죽은 존재였고 육체적으로 무할례였던 여러분을 그분과 함께 초자연적으로 살리시고 모든 범죄에서 용서함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새내기 교인들이 영적으로 어떤 상태였는지를 다시 한번 말해줌으로 영과 육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영적으로는 죄 안에서 죽은 상태였고, 육체적으로는 할례를 받지 못한 즉, 하나님과는 어떤 연관도 없었던 사람들이었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골로새 교인들을 영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초자연적으로 살리셨고 그 결과로 이제는 골로새 교인들이 죄와 아무 연관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계속해서 설명하고 말씀 드리는 것은 죄는 행위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하나의 커다란 영역입니다. 그 영역 안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죄의 영토에 속한 사람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역 안에 속한 사람들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과 그리스도인은 공존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잘 못할 수 있고 죄의 영역에 사는 사람들과 별 다름 없이 사는 것 역시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사람들을 죄인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좀 모자란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덜 성숙했고 부족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바울 역시 이점을 골로새 교인들이 확실히 알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너희는 더이상 죄의 영역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너희 나라가 바뀌었다, 이제 너희는 하나님께 속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다 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이걸 아느냐 모르느냐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을 정해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계시는 여러분들도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믿는다고 시인했다면 이제 더 이상 죄의 영역에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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