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적 은혜,임박한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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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alm 5:1–3 NKRV
1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찬송가: 38장 예수 우리 왕이여
Isaiah 19:16–20:6 NKRV
16 그 날에 애굽이 부녀와 같을 것이라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흔드시는 손이 그들 위에 흔들림으로 말미암아 떨며 두려워할 것이며 17 유다의 땅은 애굽의 두려움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계획으로 말미암음이라 그 소문을 듣는 자마다 떨리라 18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멸망의 성읍이라 칭하리라 19 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20 이것이 애굽 땅에서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징조와 증거가 되리니 이는 그들이 그 압박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겠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한 구원자이자 보호자를 보내사 그들을 건지실 것임이라 21 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니 그 날에 애굽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경배할 것이요 여호와께 서원하고 그대로 행하리라 22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시리라 23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1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니라 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 4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 5 그들이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6 그 날에 이 해변 주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두 장면이 함께 등장합니다.
이사야 19장 후반부에는 애굽이 하나님께 돌아와 예배하는 놀라운 구원의 장면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향하여 “나의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반면 이사야 20장에는 애굽과 구스를 향한 임박한 심판이 선포됩니다. 애굽을 의지했던 사람들은 수치를 당하고, 그들의 기대는 무너집니다.
한쪽에서는 구원을 말씀하시고, 다른 한쪽에서는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두 말씀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은혜는 현재의 죄를 묵인하는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의지처를 심판하시고, 그 심판을 통하여 사람들을 참된 구원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개의 시간표를 보여 줍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루실 궁극적인 구원의 시간표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 곧 닥쳐올 심판의 시간표입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십자가 죽음 이후에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해결되어야 은혜가 임합니다.

1. 애굽을 떨게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오늘 본문은 19장 16절부터 시작하지만, 그 내용을 이해하려면 19장 앞부분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애굽은 당시 고대 근동에서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풍요로운 나일강이 있었고, 발달한 문명과 군사력이 있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들과 지혜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19장 앞부분에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모든 자랑을 하나씩 무너뜨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임하시자 우상이 떨고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애굽에는 내분이 일어나고, 잔인한 통치자가 등장합니다. 나일강의 물이 마르고 경제가 무너집니다. 어부와 직조공들의 생계가 끊어집니다. 애굽이 자랑하던 지혜자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애굽의 문제는 군사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혜자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애굽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들의 힘과 지혜를 하나님처럼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16절은 그 결과를 이렇게 보여 줍니다.
“그 날에 애굽이 부녀와 같을 것이라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흔드시는 손이 그 위를 흔듦으로 말미암아 떨며 두려워할 것이며”
여기에서 “부녀와 같다”는 표현은 여성을 낮추는 말이 아닙니다. 고대 사회에서 무기를 들지 않은 사람처럼 전쟁 앞에서 아무런 방어 능력이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강대국 애굽이 하나님의 손 앞에서는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17절에서는 유다 땅이 애굽의 두려움이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유다가 애굽보다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유다를 다스리시는 여호와께서 애굽을 향하여 심판을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애굽은 그동안 유다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러 오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애굽이 유다를 바라보며 떨게 됩니다. 작은 유다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작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연약 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강한가가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계시는가가 중요합니다.

2. 심판을 넘어 애굽까지 구원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18절부터 본문의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심판받던 애굽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가나안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히브리어를 배운다는 뜻이 아닙니다.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고 고백하며, 언약의 백성이 사용하는 신앙의 언어를 말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한다는 것은 그들이 여호와께 충성을 서약하고 하나님을 자신들의 주로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섯 성읍이 정확히 어느 도시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우상으로 가득했던 애굽 땅에서 여호와를 예배하는 공동체가 생겨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9절과 20절은 더 놀라운 장면을 보여 줍니다.
“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애굽 땅 중앙에 제단이 있고, 국경에는 여호와를 위한 기둥이 세워집니다. 중앙에서부터 국경까지 애굽 전역이 여호와를 예배하는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애굽은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나라였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남자아이들을 나일강에 던지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애굽 사람들이 압제받으며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위하여 한 구원자와 보호자를 보내어 그들을 건지십니다.
출애굽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애굽을 압제자로부터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민족의 경계를 넘어 애굽에까지 미칩니다.
21절과 22절은 그 구원의 과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 고치실 것이므로”
여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지닌 목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치시지만, 멸망시키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치신 후에 고치십니다. 상처를 드러내시고 그 상처를 치료하십니다. 우상을 무너뜨리시고 참된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백성을 버리시는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를 거짓된 의지처에서 돌이켜 참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은혜의 손길입니다.
더 놀라운 말씀은 23절부터 나타납니다.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애굽과 앗수르는 서로 적대하던 강대국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있는 이스라엘은 두 나라의 충돌로 끊임없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 대로가 놓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대로는 단순한 무역로가 아닙니다. 화해와 예배의 길입니다.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게 됩니다. 인간이 만든 적대의 장벽을 하나님께서 허무시는 것입니다.
24절과 25절은 이사야서에서도 가장 놀라운 구원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내 백성 애굽이요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요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무엇이라고 부르십니까?
“내 백성 애굽”이라고 부르십니다.
앗수르는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라고 부르시고, 이스라엘은 “나의 기업”이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애굽과 앗수르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 함께 예배하게 하십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의 성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고, 민족과 나라의 장벽을 넘어 하나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루실 궁극적인 은혜입니다.

3. 그러나 지금 애굽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 19장이 궁극적인 구원을 보여 준다면, 20장은 임박한 심판을 보여 줍니다.
20장 1절에는 당시의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 등장합니다.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니라.”
사르곤 2세는 주전 722년부터 705년까지 앗수르를 통치했던 왕입니다. “다르단”은 사람의 이름이라기보다 앗수르 군대의 최고 지휘관을 가리키는 직책입니다.
당시 블레셋의 도시 아스돗은 앗수르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아스돗은 주변 나라들과 연합하여 앗수르에 저항하려 했고, 그 배후에서 애굽과 구스의 지원을 기대했습니다. 이 반란은 주전 711년경 앗수르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당시 구스 출신 통치자들은 애굽을 지배하거나 통치권을 강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애굽과 구스가 함께 언급됩니다. 유다 역시 애굽과 구스를 의지하여 앗수르에 대항하고 싶은 유혹을 받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을 내리십니다.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이사야는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맨발로 다녔습니다. 이는 반드시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는 뜻이라기보다 겉옷을 벗고 포로와 같은 초라한 모습으로 다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 전쟁에서 포로들은 겉옷을 빼앗기고 맨발로 끌려갔습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모습은 앞으로 애굽과 구스 사람들이 앗수르에 사로잡혀 끌려가게 될 것을 보여 주는 살아 있는 표지였습니다.
이사야는 하루 이틀이 아니라 삼 년 동안 이 표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을 것입니다.
“너희가 의지하는 애굽이 저렇게 될 것이다.”
“너희가 구원자라고 생각하는 구스가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의지하지 말라.”
결국 애굽과 구스는 앗수르의 공격 앞에서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이 예언은 이후 앗수르가 애굽을 침공하는 과정에서 더욱 분명하게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20장 5절과 6절은 애굽을 의지했던 사람들의 절망을 기록합니다.
“그들이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그들이 애굽을 단순히 외교적 협력자로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애굽을 그들이 “바라던” 나라라고 표현합니다. 애굽이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애굽의 군대와 전차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의지하던 애굽을 무너뜨리십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이사야 19장에서는 애굽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르면서, 왜 20장에서는 애굽을 심판하십니까?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유다의 구원자로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애굽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 할 백성으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애굽은 다른 사람을 구원할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께 구원받아야 할 나라입니다. 애굽이 참된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만나려면 먼저 자신이 구원자라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심판 이전의 애굽은 거짓된 의지처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애굽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형제가 됩니다.

맺는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가르쳐 줍니다.
첫째, 우리에게도 애굽과 같은 거짓된 의지처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돈과 건강, 자녀와 사람, 경력과 경험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수단의 자리를 넘어 우리의 구원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이 생기면 가장 먼저 무엇을 찾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기 전에 통장을 확인하고, 말씀을 묵상하기 전에 도와줄 사람부터 떠올리지 않습니까? 하나님보다 나의 경험과 판단을 더 신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지하는 애굽을 때로 흔드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버리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거짓된 구원자를 내려놓고 참된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애굽과 앗수르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던 원수 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내 백성”이라 부르시고, 앗수르를 “내 손으로 지은 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포기한 사람도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교회를 대적하는 사람도, 복음에서 멀리 있는 민족도 하나님께서는 예배자로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너무 일찍 판단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임박한 심판과 궁극적인 은혜는 서로 반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하여 거짓된 의지처를 무너뜨리시고, 마침내 원수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 시키십니다.
오늘 새벽, 우리가 붙들고 있던 애굽을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하나님께서 치실 때에도 그분의 선하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지처를 흔드실 때에도 그분의 손을 놓지 맙시다. 우리 하나님은 치시고 고치시며, 낮추시고 회복시키시고, 심판 가운데서도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보다 더 의지하고 자랑했던 애굽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돈과 사람과 경험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았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오직 주님만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믿게 하옵소서. 우리를 흔드시고 징계하실 때에도 그 손길 속에 담긴 회복의 은혜를 바라보게 하시며, 우리가 포기한 사람과 민족까지도 주님의 백성으로 부르시는 크신 구원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눈에 보이는 힘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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