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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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본문: 22장 1-14절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어디에서 나온 말일까요?
헤르만 헤세의 유명한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말입니다.
요즘 제가 『데미안』을 읽고 있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여러 가지 혼란과 갈등, 삶의 위기를 지나면서 조금씩 성장해 갑니다.
자신이 익숙하게 살아왔던 세계가 흔들리고 깨지면서,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마치 알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자신의 내면세계가 조금씩 넓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비슷할 때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익숙해집니다.
예배도 익숙하고, 기도도 익숙하고, 말씀도 익숙합니다.
그런데 익숙함이 깊어지다 보면 신앙이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우리의 믿음이 다시 깨어나고 깊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삶이 흔들릴 때입니다.
건강이 흔들리고,
경제적인 상황이 흔들리고,
관계가 흔들리고,
내가 계획했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입니다.
물론 위기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위기를 하나님이 직접 주셨다고 쉽게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만나는 위기마저 사용하셔서,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왔는지,
하나님보다 더 붙들고 있던 것은 무엇인지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위기는 단지 피해야 할 사건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삶을 다시 돌아보고 한 단계 더 성장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그 위기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큰 위기를 맞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위기를 믿음의 기회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위기 앞에서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셨을까요?
[본론1]
첫째, 어떤 사람은 위기를 단지 모면하는데만 급급해 합니다.
1-4절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오늘 말씀의 배경을 주전 701년 히스기야왕 시절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공과 연결합니다.
당시 앗수르는 유다의 여러 성읍을 점령하며 예루살렘까지 위협합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은 오랫동안 포위되어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1절에 보면 ‘환상 골짜기’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던 곳이 예루살렘이기에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위기가 찾아오자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하는 ‘깜깜이 골짜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산헤립은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의 군대가 자신과 싸우기 위해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일로 앗수르는 예루살렘 포위를 풀고 군대를 잠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백성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 소리를 지르며 기뻐합니다.
당장 성이 함락되는 위기를 모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달랐습니다.
그들과 함께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통곡하며 슬퍼합니다.
백성들은 눈 앞의 위기가 사라진 것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백성들의 마음이 여전히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은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위기는 잠시 사라졌지만 그들의 불신앙은 그대로였습니다.
하나님보다 군사력과 외교를 의지하던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위기가 찾아왔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이 특이한 것은 그 구조때문이기도 합니다.
13-23장이 여러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기록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도 들어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해서 무조건 심판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다도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나라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면 동일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위기가 찾아오면 하나님께 엎드립니다.
열심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찾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고 위기가 지나가면 쉽게 다시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 버립니다.
병이 나은 것을 기뻐하지만 근본적인 생활습관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감사하지만 여전히 돈을 의지하는 마음은 바뀌지 않습니다.
관계의 갈등은 잠잠해졌지만, 자기의 잘못된 태도는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위기를 겪었지만 우리 삶은 근본적으로 달라진게 없습니다.
삶의 방향과 태도는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모든 위기가 우리의 죄때문에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유를 알수 없는 고난도 있고, 죄악된 세상에서 어쩔수 없이 겪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왔는지를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될수 있음을 분명합니다.
위기가 진정한 기회가 되는 것은 단지 어려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위기를 통해 문제의 본질을 발견해야 합니다.
잘못 의지하던 것들을 내려놓고,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돌이켜야 합니다.
[본론2]
둘째, 어떤 사람은 위기를 자기 힘으로만 통제하려 합니다.
5-11절입니다.
국가적 위기 앞에 예루살렘 사람들이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위기를 대비했습니다.
무기고를 점검했고, 성벽의 무너진 곳을 살폈습니다.
예루살렘 집들을 조사한뒤 일부를 헐어 성벽을 보강했습니다.
포위되더라도 물이 부족하지 않도록 저수지도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예루살렘에 가보면 히스기야 시절 당시 만든 긴 수로가 남아 있습니다(사진).
이러한 준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적군이 다가오는데 성벽을 고치고 물을 확보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할 일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할수 있는 일은 모두 하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무기고는 점검했지만 신앙은 점검하지 않았습니다.
무너진 성벽은 보강했지만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는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저수지에 물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계산했지만, 자신들의 믿음이 얼마나 바닥나고 있는지는 살피지 않았습니다.
11절입니다.
“너희는 일이 이렇게 되도록 하신 분을 의지하지 않고, 이 일을 옛적부터 계획하신 분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그들은 눈 앞의 문제를 해결하는데만 몰두했습니다.
왜 이런 위기가 찾아온 것인지,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인지,
자신들이 돌아봐야 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닥친 위기는 단순한 군사적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다른 나라의 힘과 인간적인 방법을 의지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므로 무기를 더 갖추고, 성벽만 보수한다고 위기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무기나 튼튼한 성벽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잘못된 믿음입니다.
병이 나면 병원을 찾아가야 합니다.
경제적 어려움이 있으면 지출을 점검하고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관계가 무너졌다면 먼저 손을 내밀고 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이 할 일만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믿음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해야할 일을 책임있게 하면서도, 나의 노력과 방법 너머의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만 합니다.
건강의 위기가 찾아올때 의사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면 안됩니다.
기도하면서 내가 삶에서 놓치고 있던게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무너진 삶의 질서가 무엇인지 하나님께 여쭤봐야 합니다.
물론 모든 위기가 개인의 죄때문에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쉽게 알아낼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위기든지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는 기회가 될수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기가 찾아오면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혹시 나는 하나님의 뜻을 찾기보다 문제를 해결하는데만 몰두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해야할 일과 하나님께 맡겨야 할 일을 구분하고 있는가?”
“혹시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하려다가 하나님께 맡겨야 할 영역까지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
[본론3]
셋째, 어떤 사람은 즐거움으로 위기를 피하려 합니다.
12-14절입니다.
하나님은 큰 심판이 다가올 날을 위해 백성들에게 통곡하며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슬퍼하라는게 아니라 돌이키라는 의미입니다.
왜 이런 위기가 찾아왔는지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어차피 곧 망할 것이니 오늘 먹고 마시자며 잔치를 벌입니다.
1-2절에서는 위기가 잠시 지나갔다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12-13절은 ‘어차피 망했으니 오늘을 즐기자’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둘다 위기의 본질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쪽은 위기가 사라졌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을 잊어 버렸습니다.
다른 한쪽은 위기를 피할수 없다고 생각해 하나님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회를 쾌락으로 날려버렸습니다.
자신들의 죄악을 직면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으로 잠시 잊으려 한 것입니다.
쾌락은 잠시 우리의 불안을 잊게 만들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할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놓치게 만들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삶의 위기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불안할수록 그 불안을 잊기 위해 무엇인가에 더 탐닉하지는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문제를 잊어버리려고 소비와 쇼핑에 몰두합니다.
어떤 사람은 힘들다며 술이나 음식에 의지해 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걱정을 잊어버리려고 TV나 핸드폰에 빠져 버립니다.
마음이 무거울수록 더 강한 자극과 쾌락을 찾습니다.
저도 제 개인적으로 제 마음을 진단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갑자기 제가 생각없이 쇼핑을 하며 집 앞으로 박스를 불러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제 영혼에 빨간불이 들어온 것입니다.
뭔가 마음이 공허하니까 그런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혹시 현실을 도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반복해서 찾는 그 즐거움은 단지 내 불안을 잠시 잊어보려는 마취제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돌아보라고 기회를 주시는데 단지 회피하려고 하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불안과 슬픔을 억지로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두려우면 두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상황 속에서 내가 돌아봐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서론에서 『데미안』에 나오는 말을 소개했습니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알을 깨는 과정은 결코 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껍질을 깨지 못하면 새는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삶의 위기가 찾아오면 내가 익숙하게 의지하던 세계가 흔들립니다.
건강이 흔들리고,
돈이 흔들리고,
관계가 흔들리고,
내가 세워 놓았던 계획이 흔들립니다.
그때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예루살렘 백성들처럼 위기가 빨리 지나가기만 바라며 모면할 수도 있습니다.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해결하고 통제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 힘들다고 다른 즐거움에 빠져 현실을 잊으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위기는 지나가도 우리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껍질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위기를 단지 견디고 빠져나오는 데서 끝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 시간을 통해 내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왔는지 보게 하시고,
잘못 붙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게 하시며,
이전보다 더 깊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자신의 가장 큰 위기를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을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솔직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위기를 피해 도망치지도 않으셨고,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고통을 다른 것으로 잊으려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두려움과 고통을 아버지께 맡기고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위기 앞에서 가져야 할 믿음의 태도입니다.
위기가 찾아오면 이렇게 한번 질문해 보십시오.
“이번 일을 통해 내 안에 무엇이 드러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가장 의지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 시간을 통해 내 삶에서 깨뜨리기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위기는 언제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위기가 우리의 오래된 껍질을 깨뜨리는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돈을 의지하던 껍질,
내 능력을 의지하던 껍질,
사람의 인정에 매여 있던 껍질,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해야 안심할 수 있었던 껍질이 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기를 통과한 뒤 단지 “살았다”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이 일을 통해 내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다.”
“내가 붙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게 되었다.”
“이전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하게 되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삶의 위기가 단지 우리를 흔드는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믿음을 깨우고 더 깊고 넓은 신앙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은혜의 기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