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향한 묵상이 믿음의 창시자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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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만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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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brews 12:2 NKSV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Intro

여러분, 살다 보면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눈을 뗄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상처받은 기억, 풀리지 않는 관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려운 형편. 그런 것들 앞에서는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자꾸 그 자리로 시선이 되돌아갑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시선의 문제를 다룹니다. 우리의 눈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그리고 그 눈을 어디로 옮겨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나'를 묵상할 때, 주님을 떠나게 만듭니다.

히브리서 말씀은 1세기의 유대인들에게
쓰여진 말씀입니다.
전통적인 유대인들을 향한 편지가 아니라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 메시아로 인정하고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했던 사람들이었죠.
그런데 문제는 1세기는 로마제국의
통치 하에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
전염병처럼 빠르게 번져나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와
그를 믿는 사람들의 삶이 눈엣가시였습니다.
로마황제 숭배를 강하게 거부하고
로마의 국가종교체계를 거부했습니다.
로마제국의 평화를 위해서는
그들이 만들어낸 신들에게 숭배를 해야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이 거부한거죠.
그래서 로마제국은 결단을 내립니다.
유대교는 그래도 전통이 있고,
유대교와 로마제국 정치인들과
지속적으로 맺어온 관계가 있기에
정식종교로 채택을 해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탄압하기 시작하죠.
체포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재산을 몰수하기도 하고,
어디 취직도 시켜주지 않고
사회적으로 왕따도 시켰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흔들릴 수밖에 없는겁니다.
고난과 압박 속에서 영적,
정신적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뭐가 중요하냐
내 삶이 너무 힘들고 버겁고 압박과
고난 투성이인데 뭐 예수님이 밥멕여주냐…"
저는 이런 생각 때문에
목회를 그만 두려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2018년 아주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입학해둔 채로 휴학을 했습니다.
군대를 가야했기 때문에
이왕 가는거 쫌 쉬고 싶어서 휴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오랜시간 조울증을 앓던 어머니께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조울증이 더 악화되었습니다.
조울증이 그냥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정도로 끝나는 줄 알고 계신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기분이 좋아지되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져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갔던 기분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극도로 밑바닥을 쳐서 엄청난 우울감을 가져옵니다.
여러모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일상생활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정신병동에 입원을 하시는 모습을 보았어요.
그리고 저의 삶을 가만히 돌아봤어요.
지금의 내 상태로 내가 나중에 엄마를
조금이라도 돌볼 수 있을까?
목회하면 돈을 못버는데 이게 가능할까?
그렇게 자꾸 나 자신을 돌아보니
어디 뭐 자랑할 만한 것도 없고
내놓을만한 것도 없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나의 상황을 향하는
그 눈은 나의 상처와 아픔에
더 집중하게 만들었고,
결국에는 목회의 길을 포기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게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목회만 포기하자.
열심히 직장생활하고 돈 잘 벌면서
교회에서 정말 충성된 일꾼으로
헌신하면 되겠지 싶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교회에 나가는 것 자체도 어려워지며
혼자서 말씀읽고 기도하는 시간은 더 사라져갔습니다.
이것은 저만의 이야기도 아니고,
히브리서가 쓰일 때 당시의
유대인들만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살아가다보면 예기치 않게,
내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찾아오는
환난, 고통, 아픔,
그로인한 상처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때마다 그 시선이 나를 향하게 되면
그 끝에는 결국 하나님과의 멀어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던 유대인들도
이렇게 생각했을거에요.
"아니 내가 하나님을 안 믿겠다는게 아니라,
그냥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만하고 다니면 되잖아.
지금 내 삶이 이렇게 버거운데 뭐 그정도 쯤이야."
이들이 했던 타협은 그들의 삶의 시선이 하나님과의 약속,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그 숭고한 가치보다는 그저 지금의 '나', 내가 처한 상황에만 매몰되어 있었던거죠.
사람은 누구나 그렇습니다.
원인은 다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핍박이든 상처든 고난이 극심해지면
우리의 시선은 철저하게
'나의 내면과 현실'에 갇혀버리게 됩니다.

2.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런 우리들을 향해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Hebrews 12:2 NKSV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내 시선이 자꾸 나를 향할 때,
믿음의 창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믿음이 뭘까요?
원래 이 질문이 가장 어려운거 아시죠?
사랑이란 뭘까? 인생이란 뭘까?
저는 이렇게 진지하게 철학적인 질문하는 친구들 보면
꿀밤 한대씩을 꼭 먹여주고 싶어요.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잖아요?
믿음의 창시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나를 향해 있는 그 시선을 옮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의 창시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대체 믿음이 뭐길래,
그 믿음의 창시자를 바라보면
나에게만 매몰되어 있는 삶의 시선을
옮길 수 있는 것일까요?
믿음을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Hebrews 11:1 NKRV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가장 먼저 실상의 의미를 살펴보자면,
헬라어 원문을 보면 ὑπόστασις (hypostasis, substance/confidence, 실상/확신)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이 단어는 당시 법률 문서에서 '재산 문서',
'소유권을 보증하는 증서'를
가리키는 데도 쓰이던 말입니다.
즉 믿음은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아직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미 확정된 것을 붙드는 증서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면
그 순간 이미 등기부에 소유권이 확정됩니다.
아직 건물은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보이는 건 공사장 가림막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서류상으로 이미 끝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안 보이지만, 이미 확정되어 있는 것
그게 바로 히브리서가 말하는 실상, ὑπόστασις입니다.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당장 내 앞길이 보이지 않아요.
내 상처와 아픔이 더 이상 끝날 것 같지 않아요.
내 경제적 형편과 어려움이 끝날 것 같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살게 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반드시 나와 함께 하시고,
예수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나와 함께 걷고 계시고,
내 아픔과 눈물을 끌어안고 계시다는 사실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한 번 다 해보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인생의 길
모두 다 직접 해보신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믿음의 창시자, 완성자라고 했죠?
창시자 아르케논은 만들어낸 사람이 아니라
먼저 그 길을 걸어가서 열어 놓은 사람입니다.
완성자는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딱 여기서만 등장하는 단어인데,
'목표한 지점까지 완전하게 이루어내는 사람'이라는
뜻을 담고 있어요.
즉, 예수님은 한치 앞도 모르는 내 인생,
도저히 나도 잘 모르겠는 내 마음,
나의 삶 그 모든 걸 다 알고 계시고,
내가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그날까지
목표한 지점까지 완전하게 이루어낼 수 있도록
옆에서 지금도 나와 함께 하고 계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냥 막연히 "언젠가 다 잘될 거야",
"언젠간 결국 끝이 나겠지" 하고
버티고 사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건 믿음이 아니라 그냥 낙관주의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바라봐야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당당히 걸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3. 그렇게 되면 우리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렇게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께 시선을 돌린 사람의 마음 속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Hebrews 12:11 NKRV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여기서 "징계"로 번역된 단어가
παιδεία (paideia, discipline/training, 훈련/양육)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로마 세계에서 매를 드는 처벌만이 아니라,
한 아이를 온전한 시민으로 길러내는
전인적인 교육 과정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제가 여러분과 함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고난은 축복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종종 고통 그 자체를 미화하는 말로 오용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어디에도 "징계 자체가 즐겁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직하게 말합니다.
"당시에는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여겨진다."
괴롭다고, 즐겁지 않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건 고통의 미화가 아니라,
그 훈련의 과정을 이끌어가시는 분이 누구시냐는 것입니다.
재활치료를 받아보신 분 계실 겁니다.
수술 후에 굳어버린 관절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과정,
그 과정 자체는 전혀 즐겁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픕니다.
그런데 그 재활치료가 무의미한 고통이 아니라
회복을 향한 훈련이 되는 이유는 단 하나,
그 과정을 설계하고 함께 그 자리에 있는 치료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숙련된 치료사는 이 관절이 얼마나 굽혀져야 회복되는지,
어디까지가 정상적인 통증이고 어디부터가 위험 신호인지 압니다.
환자 혼자였다면 그 고통은 그냥 고통일 뿐입니다.
그러나 능숙한 치료사가 함께 있을 때,
그 고통은 회복을 향한 하나의 과정이 됩니다.
그리고 재활도 결국 혼자보다는,
곁에서 함께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 훨씬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훈련을
저 멀리서 설계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 스스로가 먼저 그 십자가의 고통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예수님도 그 순간에는
그 십자가가 즐거워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실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그 앞에 놓인 기쁨을 바라보며 참으셨고,
결국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 기쁨은, 이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예수님께서 이뤄내실 것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하는
놀라운 사랑의 계획이었습니다.
그 기쁨 하나하나가 지금 여기 모인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이 바라보셨던 그 기쁨은
지금 여기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인정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행복함과 자유함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
예수님의 기쁨은 그거 하나였습니다.
자식을 생각하면 뭐든 할 수 있잖아요?
아무리 힘들어도 내 새끼가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 것만 생각하면 뭐든 해낼 수 있잖아요?
예수님이 지금 우리를 보시며 그 모진 십자가를
참아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 앞에 놓인 기쁨을 보며 달려가신 예수님을 보면,
나의 상처와 아픔, 내 상황, 내 현실이 아닌
의와 평강의 열매로 더 자유롭고 더 행복하고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인생을
누구보다 풍성하고 더 두께감있게 살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Outro

이번 한 주, 마음이 다시 나 자신의 상처와 결핍으로
빨려 들어가려는 순간을 알아차리실 때마다,
딱 한 문장만 되뇌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완성하고 계신 분이 이미 이 길을 걸으셨고, 지금도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
제 어머니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그리고 시간이 지나 어머니는 다 나으셨고,
저는 다시 아무 문제없이 목회를 시작했습니다"라는
깔끔한 결론을 말씀드리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깔끔하게 해피엔딩이 되지 않았거든요.
삶은 그렇게 정리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제가 다시 목회의 길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제 상황이 극적으로 좋아져서가 아니었습니다.
제 시선이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감당하기 버거운 현실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현실 한복판에서,
저보다 먼저 그 길을 걸으셨고
지금도 저를 완성해가고 계신
예수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시선은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여러분의 상처, 여러분의 결핍, 여러분의 실패,
그 자리에 시선이 붙들려 계십니까?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분이 먼저 길을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반드시 끝까지 완성하십니다.
반드시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시선을 아니,
우리의 삶을 예수님께 온전히 내어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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