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부르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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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름을 부르는 자
제목: 이름을 부르는 자
본문: 사도행전 19장 13-20절
본문: 사도행전 19장 13-20절
찬송: 449장 예수 따라가며
찬송: 449장 예수 따라가며
말씀의 문을 열며
말씀의 문을 열며
옛날 시골 5일장에 가보면 참 익숙한 풍경이 있었습니다. 약장수들이 판을 벌여놓고 약을 파는데, 꼭 유명한 한의사나 한양 땅 명의(名醫)의 이름을 들먹이곤 했습니다. "이 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저 저명한 아무개 의원이 직접 만든 영약입니다!"
사람들은 그 이름값만 믿고 혹해서 약을 사 먹었지만, 정작 병이 낫기는커녕 도리어 탈이 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약장수는 명의의 이름만 팔았을 뿐, 그 의원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고 진짜 처방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들먹였지만, 그 이름이 가진 진짜 실체와 능력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9장에도 바로 이와 똑같은 '영적 가짜 약장수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이름만 부르면 능력이 따라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오늘 본문은 아주 생생하고 뼈아프게 보여 줍니다.
1. 이름을 빌려 쓰려 한 사람들
1. 이름을 빌려 쓰려 한 사람들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 하나님은 그를 통해 특별한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바울이 손을 얹으면 병자가 나았고, 심지어 바울이 일하며 사용하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만 가져다 대어도 병이 떠나고 귀신이 쫓겨났습니다(행 19:11-12). 이것은 바울이라는 사람이 특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일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 가운데, 그 능력의 근원은 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흉내 내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본문 13절입니다.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이들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돈을 받고 귀신을 다루던 무당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효과가 좋다고 소문난 새로운 주문였습니다. 는 소문을 듣고, 자기 장사에 써먹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귀신에게 한 말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명하노라"고 번역되었지만, 원래 이 말은 명령이라기보다 '부탁한다', '탄원한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귀신에게 나가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라, 나가 달라고 사정한 것입니다. 애초에 그들에게는 귀신을 제압할 권세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을 뿐,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가끔 이와 비슷한 실수를 저지릅니다. 힘든 일을 만나면 "예수님 이름으로!"라고 외치면서도, 정작 그 이름의 주인이신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 없이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만, 곤란할 때만 그 이름을 꺼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은 도구가 아닙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삶에서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고백'입니다. 관계 없이 이름만 부르는 것은, 마치 낯선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그 사람의 덕을 보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2. 사사로이 부른 이름의 결과
2. 사사로이 부른 이름의 결과
이 유대인 무당들의 시도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14절). 흥미로운 것은, 성경 어디에도 '스게와'라는 이름의 대제사장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학자들은 이 사람이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대제사장이라는 명칭을 스스로 갖다 붙였을 것으로 봅니다. 이름을 도용한 사람이, 또 다른 이름을 도용하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이 예상 밖의 반응을 보입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15)라고 말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바울도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일곱 형제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알아볼 관계 자체가 없었습니다. 이름만 있고 관계는 없는 사람들, 그것이 이 형제들의 실체였습니다.
결국 일곱 명이 한 사람에게 제압당해,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도망쳤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 오히려 망신을 당한 것입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과 그 이름의 주인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임을, 이 사건은 뼈아프게 보여 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자격은 어디서 올까요? 그 이름을 많이 안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 이름을 자주 입에 올린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분을 진짜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삶, 그 관계에서만 그 이름을 부를 자격이 주어집니다.
3. 진짜 관계, 진짜 능력
3. 진짜 관계, 진짜 능력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같은 이름으로 참된 능력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까? 바울이 빌립보에서 귀신 들린 여인을 만났을 때를 떠올려 보면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행 16:18)라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바울은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귀신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그 차이는 단순합니다. 바울에게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 자체가 예수님께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 이름을 부를 때 그것은 빈 소리가 아니라 살아 있는 권세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부릅니까. 기도할 때, 예배할 때, 힘들 때, 우리는 그 이름을 참 많이 부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부르는 만큼, 우리의 삶은 그분께 속해 있냐는 것이죠.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를 때, 우리의 삶이 그 이름에 합당한 증거가 되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한 구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은 대단한 신학적 지식이나 특별한 은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의 결정 속에서, 정직함 속에서, 이웃을 대하는 태도 속에서, 자신이 부른 그 이름의 주인에게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없이 이름만 부른다면, 우리도 스게와의 아들들처럼 이름은 있으나 관계는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4. 세상이 나아오는 이유
4. 세상이 나아오는 이유
이 사건 이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17절 이하입니다.
"17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스게와의 아들들이 망신당한 사건이, 오히려 온 도시가 예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며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미 믿었던 사람들은 그동안 숨겨 온 죄를 자복했고,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생계 수단이었던 마법 책을 스스로 불살랐습니다. 그 값이 은 오만이었다고 본문은 전합니다. 한 사람이 하루 품삯으로 백 년도 넘게 벌어야 할 액수입니다. 그들이 그렇게까지 의지하고 붙잡았던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내려놓은 것입니다.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스게와의 아들들이 겪은 수치가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난 진실, 곧 예수님은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 참으로 살아 계시고 다스리시는 주님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진실 앞에서, 에베소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붙잡고 있던 것—마법과 주문과 부적—을 스스로 내려놓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얼마나 자주 부르는가를 보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의 이름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진짜인가를 보고 움직입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자신들의 우상을 버리고 예수께 나아온 것은, 누군가의 설득 때문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을에도, 우리 이웃 가운데도 여전히 자신이 붙잡고 의지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돈을, 어떤 이는 건강에 대한 미신적인 믿음을, 어떤 이는 사람의 평판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주변의 믿지 않는 이들이 이같은 것들을 내려놓고 참 주인 되신 예수께 나아오는 길은, 우리가 목소리를 높여 그 이름을 외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이름의 주인을 진짜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삶, 바로 그것을 통해 세상은 스스로 자기가 붙잡고 있던 것의 헛됨을 보게 됩니다.
말씀의 문을 닫으며
말씀의 문을 닫으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 부름을 놓고 갑니다. 하나는 스게와의 아들들처럼 이름만 부르는 부름이고, 다른 하나는 바울처럼 관계 속에서 부르는 부름입니다. 전자는 결국 벗은 몸으로 도망치게 만들지만, 후자는 온 도시를 움직이는 능력이 됩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필요할 때만 꺼내 쓰는 이름입니까, 아니면 날마다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그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이름입니까.
우리가 참으로 그분을 구주로 모시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 자체가 팻말이 되고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그 증거를 보는 누군가는, 자신이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참된 주인이신 예수께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은 오만 드라크마가 아니라, 세상 누군가의 은 오만 드라크마가 불살라지는 그 역사를,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의 기도
거둠의 기도
주님, 우리가 그동안 주님의 이름을 얼마나 사사로이 불러 왔는지 돌아봅니다. 필요할 때만 찾고, 정작 삶으로는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못했던 우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삶이 주님의 이름에 합당한 증거가 되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 세상이 자신이 붙잡고 있던 헛된 것들을 내려놓고 참된 주인이신 주님께 나아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