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음이 이끄는 네 가지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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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다시 그 자리로
베드로전서2:18-25 | 청년부 | 32분 내외 · 4대지
본문 말씀 (개역개정)
본문 말씀 (개역개정)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애매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서론
서론
일요일 저녁이 되면 마음이 유독 무거워지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내일이면 또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새 직장에 들어간 지 몇 달 안 됐는데, 유독 나만 미워하는 것 같은 상사 밑에서 일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열심히 준비한 일인데 이유 없이 트집을 잡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웃으며 넘어가는 실수를 나에게만 유독 크게 만드는 그런 자리 말입니다.
꼭 직장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마음을 다해 섬긴 관계인데 오히려 오해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SNS에는 다들 웃고 있는데, 나만 이 자리에서 혼자 힘든 것 같은 밤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듣습니다. "기도해. 하나님이 보고 계셔."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묻고 싶습니다. 그 말이 정말 위로가 됩니까? 아니면 그냥 이 감정을 누르고 조용히 있으라는 또 다른 잔소리처럼 들립니까?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2장 18절부터 25절은 바로 이 질문에 답을 줍니다. 이 본문의 청중은 원래 종들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회사를 마음대로 그만둘 수도, 상사를 바꿀 수도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까다로운 주인 밑에서 매일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그저 "참으라" 한마디로 끝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안에는 참음에 이르는 구체적인 네 걸음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이 네 걸음을 우리의 자리에서 함께 따라가 보려 합니다.
첫째, 정직히 아파합니다 (18-19절)
첫째, 정직히 아파합니다 (18-19절)
"애매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19절)
베드로는 여기서"슬퍼하지 말고 참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슬픔을 참으라"고 합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슬픔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참음이 있습니다. 슬픔을 없애는 게 참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 세대는 유독 진짜 감정과 꾸며낸 얼굴 사이의 간격이 큽니다. SNS에는 웃는 얼굴만 올라오지만, 정작 집에 돌아와 불 끄고 누우면 눈물이 나는 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좋다는 게, 그 눈물조차 감추고 하나님 앞에서도 괜찮은 척하는 거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23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욕을 당하시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실제로 당하셨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 아픔 앞에서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을 뿐입니다. 아픔을 느끼신 것과, 그 아픔에 휘둘리지 않으신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 앞에서 "저 사실 안 괜찮습니다"라고 말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 말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기도입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오늘 이 시간만큼은 주님 앞에서 정직해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공의로우신 재판장께 맡깁니다 (19절, 23절)
둘째, 공의로우신 재판장께 맡깁니다 (19절, 23절)
19절,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여기 이 말은 그냥 막연히 "누군가 보고는 있겠지" 정도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나를 지켜보고 계신 분이 실제로 계시다는 자각입니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3절)
그런데 이 자각이 어디로 향하는지가 23절에서 분명해집니다. 그리스도는 억울한 일 앞에서 스스로를 변호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공의로우신 재판장께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억울한 일의 가장 힘든 부분은 사실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아무도 내 억울함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외로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법정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법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맡긴다는 것이 곧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조건 견디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종들은 그 자리를 벗어날 법적 수단이 전혀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다릅니다. 부당한 대우 앞에서 지혜롭게 방법을 찾고, 필요하다면 도움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내가 억울하지 않다는 걸 어떻게든 증명해내야 한다"는 조바심만은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그 증명은 이미 하나님이 맡고 계십니다.
요셉을 생각해 봅니다. 형들에게 미움받아 팔려 갔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스스로 억울함을 풀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훗날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요셉의 이야기가 특별한 것은, 그가 그 자리에서 아무 판단도 못 하고 그저 끌려다닌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고 지혜롭게 처신했습니다. 다만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사람에게 매달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오늘, 사람에게 이해받고 싶어서 설명하고 또 설명하려는 그 마음을, 잠깐 하나님께 맡겨보시기 바랍니다.
셋째,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걷습니다 (21절)
셋째,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걷습니다 (21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1절)
여기 "본을 끼쳤다"는 표현은, 옛날 서당에서 아이가 처음 글씨를 배울 때 선생님이 붉은 먹으로 흐리게 글자를 미리 써 준 것을 가리킵니다. 아이는 그 위에 검은 먹으로 한 획씩 따라 씁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고난의 길에 흐린 선을 그어 놓으셨고, 우리는 그 위에 우리의 삶을 덧써 나가는 것입니다.
헬스장에서 무거운 바벨을 들어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한계 중량에 도전할 때, 옆에 스파터가 서 있는 것과 아무도 없이 혼자 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스파터가 대신 들어주는 건 아닙니다. 여전히 내 손으로, 내 다리로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옆에 누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무게를 견디는 마음이 달라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본이 바로 이 스파터의 자리입니다. 우리 대신 참아주시는 게 아니라, 이미 그 길을 걸으셨고 지금도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자체가, 흩어져 살던 나그네 같은 성도들에게 "너희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말해주려고 쓰인 편지였습니다.
혹시 지금 안고 있는 그 짐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들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청년부 안에서, 믿을 만한 한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나눠보시기 바랍니다. 혼자 버티는 것과 함께 버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무게입니다.
넷째, 이미 확정된 목적지를 향해 걷습니다 (22-25절)
넷째, 이미 확정된 목적지를 향해 걷습니다 (22-25절)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4절)
여기 "채찍에 맞았다"는 표현은 그냥 맞았다는 뜻이 아니라, 매 한 대가 남긴 상처 자국, 몸에 새겨진 흔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큰 수술을 받은 사람의 몸에 남는 흉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흉터는 볼 때마다 아파 보일 수 있지만, 동시에 그 사람이 그 수술을 통과하고 살아났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상처도 그렇습니다. 고통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이미 나음을 얻었다는 증거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25절)
여기 "돌아왔느니라"는 과거형입니다. 앞으로 이루어질 약속이 아니라 이미 확정된 자리입니다.
취업을 준비해보신 분들은 이 감각을 아실 겁니다.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지만 아직 출근일은 남아 있는 그 며칠.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견디고 있는 이 시간이 꼭 그렇습니다. 아직 모든 게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우리가 도착할 자리는 이미 확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의 버팀은 결과를 모른 채 견디는 막막한 기다림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결과를 향해 걸어가는 걸음입니다.
결론
결론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냥 "참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정직히 아파하고, 공의로우신 재판장께 맡기고,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걷고, 이미 확정된 목자의 품을 향해 걷는 네 걸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내일 아침, 여러분은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똑같은 상사, 똑같은 관계, 똑같은 불확실함 앞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알고 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혼자 그 자리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 자리를 먼저 걸으신 분이 계시고, 지금도 함께 걷고 계시며, 여러분이 결국 도착할 곳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기도
기도
먼저 그 자리를 걸으신 주님, 오늘도 또 그 익숙한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저희를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겉으로는 웃어도 속으로는 힘든 저희 마음을, 오늘만큼은 주님 앞에서 정직하게 꺼내놓게 하옵소서. 억울함을 스스로 증명해내려는 조바심을 내려놓고, 공의로우신 주님께 맡기게 하옵소서. 이 길을 혼자 걷지 않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 또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지체들과 함께 걷게 하옵소서. 채찍에 맞으신 주님의 상처로 저희가 이미 나음을 얻었으니, 그 확정된 소망을 붙들고 내일 다시 그 자리로 걸어 들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