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선택하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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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사무엘상 31:3–5 NKRV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무기를 든 자가 사울이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사랑합니다. 꿈사땅 예배에 나온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너무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그냥 다 포기하고 싶다.”,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다.”, “이 문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 “차라리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힘든 일을 만난다. 친구와의 관계 때문에 힘들 때도 있고, 공부와 성적 때문에 힘들 때도 있다. 부모님과의 갈등 때문에 마음이 무너질 때도 있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것 같은데 나만 뒤처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힘든 순간에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힘든 상황 그 자체만이 아니다. 힘든 상황이 계속되다 보면 우리의 생각까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이것도 언젠가는 지나가겠지”라고 생각하다가도, 너무 힘들어지면 “이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게 된다. 평소에는 분명히 소중했던 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혼자서 그 모든 것을 감당하려고 할 때,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힘든 상태에 있는지도 제대로 깨닫지 못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사무엘상 31장은 바로 그런 한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사울은 전쟁에서 큰 위기에 놓였고, 자신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리고 성경은 그 장면을 우리에게 매우 무겁게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를 왜 읽어야 하는가? 성경은 단순히 한 사람의 비극적인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절망에 빠진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 그리고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생각하게 한다. 오늘 우리는 사울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한다. “절망이 나를 찾아올 때, 나는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가?”
먼저 십계명에서 자살과 관련된 계명이 무엇인가? 그렇다. 6계명 ‘살인하지 말라’이다. 살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자살도 금지한다. 여기서 살인이라는 단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또는 부주의로 다른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가리킨다. 하지만 이 단어가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것에 적용된다면,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살해하는 것에도 적용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네 자신을 살해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는 명령이기도 하다. 모세 언약보다 훨씬 더 오래된 한 본문이 이 도덕적인 원칙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창세기 9:5–6 NKRV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구약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다”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빼앗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고, 그 범죄에 대해 하나님은 여기에서 인간에 대한 모든 형벌 중에서 가장 혹독한 형벌, 즉 살인자의 생명을 빼앗는 형벌을 부과하신다. 자살의 경우에는 살인자가 이미 죽어버렸으므로, 그런 형벌을 부과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이 그 행위를 도덕적으로 심각하게 잘못된 것으로 보신다는 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사실이고 원칙이다. 이 본문이 대홍수 후에 다시 세워진 인간 사회의 토대로 주어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본문이 인류 전체에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십계명의 6계명과 창세기 9장의 말씀에서 핵심은 이러하다.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그렇기에 자살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이며 또한 동일한 이유로 인해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자살은 하나님의 눈에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고, 죄 없는 인간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빼앗는 것(살인)을 금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것만이 잘못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살해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그렇기에 성경은 자살을 결코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성경은 자살이 잘못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지만 자살을 부끄러움과 패배라는 맥락에 놓는다. 성경에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 우리가 본문으로 읽었던 사울, 아히도엘, 시므리 왕, 예수님을 팔았던 제자 가룟 유다, 이렇게 다섯 명의 자살한 성경의 인물이 있다. 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으로 이런 파국에 이르렀다. 먼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은 “여호와의 말씀을 버린” 후에, 선지자 사무엘은 그에게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후에 사울은 다윗에 대해 점점 비이성적이고 적대적인 행동을 보였고, 다윗을 죽이려는 시도를 반복했다. 결국 사울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지 못한 채로 블레셋 군대와 싸워 승리하지 못하고 패배당함으로써 그들의 손에 굴욕적인 죽음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사울은 자신의 칼 위에 엎드려져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빼앗으려 했다. 성경은 사울의 죽음이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말한다.
사무엘하 17:23 NKRV
아히도벨이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의 조상의 묘에 장사되니라
두 번째 인물은 아히도벨이다. 아히도벨은 다윗 왕을 가까이에서 섬기던 매우 뛰어난 신하였다. 그런데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다윗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고 반역을 일으켰을 때, 아히도벨은 다윗을 떠나 압살롬의 편에 섰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다윗을 공격할 수 있는 좋은 전략을 제시했다. 하지만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전략을 따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선택했다. 아히도벨은 자신의 계획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보고 압살롬의 반역이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는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일을 정리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태복음 27:3–5 NKRV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신약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표인물은 ‘가룟 유다’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겼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시게 되자 유다는 자신이 한 일을 후회했다. 마태복음 27장 3절은 유다가 자신이 예수님을 넘겨준 것을 보고 “뉘우쳤다”​고 말한다. 여기서 마태가 사용한 ‘뉘우쳤다’는 말은 조금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성경에서 하나님께 돌아와 죄를 용서받는 의미의 ‘회개’라는 말과는 다른 단어​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이런 일을 하지 말았어야 했구나”라고 생각을 바꾸고 후회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다는 자신이 예수님을 넘겨준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자신이 받은 은 삼십을 다시 돌려주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만든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이 장면을 기록하면서 유다의 ‘뉘우침’과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를 같은 것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유다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이 있다. 마태복음 27장 5절에서 유다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고 기록하는데, 이 표현은 구약성경의 아히도벨 이야기와 연결된다. 사무엘하 17장 23절에서 아히도벨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면을 기록할 때 사용된 표현과 같은 표현이 사용된 것이다. 마태는 이 표현을 통해 가룟 유다의 이야기를 아히도벨의 이야기와 연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아히도벨은 다윗을 배신했고, 가룟 유다는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을 배신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선택한 길의 마지막에서 극심한 후회와 절망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가룟 유다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단순히 유다 개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아히도벨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사기 16:28–30 NKRV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삼손이 집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사사기 16장 28–30절에 등장하는 인물은 삼손이다. 삼손 역시 마지막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았기 때문에 “삼손도 자살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삼손의 죽음을 일반적인 의미의 자살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삼손은 자신의 삶을 끝내기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당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조롱하기 위해 많은 사람을 모아 놓았다. 그때 삼손은 하나님께 다시 힘을 달라고 기도했고, 마지막 힘을 사용하여 블레셋 사람들을 무너뜨렸다. 성경은 삼손이 죽을 때에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많은 블레셋 사람을 죽였다고 기록한다. 그러니까 삼손의 죽음은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라는 이유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을 희생해서 원수와 싸우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것이다. 이것은 전쟁터에서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군인의 모습과 비슷하다. 자신의 생명이 소중하지 않아서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고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다. 삼손의 삶을 보면 부끄러운 모습도 많았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욕심을 따라 행동했던 순간들이 있었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기도 했다. 그런데 삼손의 마지막 순간은 달랐다. 삼손은 다시 하나님을 의지했고,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싸웠다. 그래서 삼손의 마지막 모습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신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어준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이 모습은 훗날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희생을 미리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5:13 NKRV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삼손은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내어주는 희생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사탄의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을 멸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 오직 인간에게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 받는 고귀한 특권이 주어졌음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정점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살인을 통해 자신의 형상을 파괴하는 자에게 가장 강력한 벌을 내리실 것을 요구하신다. 반면에 사탄은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미워한다. 사탄의 목적은 우리 인간을 멸하는 것이다. 요 8:44
요한복음 8:44 NKRV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예수님은 마귀를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고 말씀하신다.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만드신 사람을 무너뜨리려고 한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다. “너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 “너 같은 사람은 없어져도 괜찮아.”,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아.”, “이제는 아무런 방법이 없어.” 이런 생각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우리는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어버리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물론 우리가 힘들 때 이런 생각이 든다고 해서 반드시 사탄이 직접 우리 귀에 어떤 말을 들려주는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우리가 겪고 있는 상처와 실패, 죄책감과 두려움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자신을 계속 비난하는 생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생각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혼자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고린도전서 6:19–20 NKRV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몸이 성령께서 거하시는 곳이며,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존재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몸과 생명을 함부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의 생명은 내가 마음대로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이며,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너무 힘든 상황에 있을 때에도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고린도전서 10:13 NKRV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피할 길”도 내어 주신다​고 말씀한다. 여기서 ‘피할 길’이라는 것은 문제가 언제나 쉽게 해결된다는 뜻이 아니다. 때로는 상황이 정말 어렵고 오래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절망 속에서 혼자 무너지도록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다. 그래서 너무 힘들 때에는 혼자서 결론을 내리지 않아야 한다. “나는 끝났어.”, “방법이 없어.”,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어.” 이런 생각이 들 때일수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모님이나 선생님, 전도사님이나 목사님처럼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우리가 아무리 힘든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우리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며, 우리가 우리의 몸과 생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자살은 다른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그렇기에 자살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혼자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선생님이 있고, 교회 공동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은 그 사람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면, 남겨진 가족과 친구들은 매우 큰 슬픔을 경험하게 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내가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때 내가 무언가를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랫동안 마음 아파할 수도 있다. 특히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무엇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는지 직접 들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에는 많은 질문이 남을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생명과 마음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내가 힘들 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힘들어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것 역시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한 사람의 죽음은 때때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다. 특히 가까운 사람이나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사람이 그런 죽음을 맞이하면,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생명을 포기하는 선택은 한 사람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여러 가지 영향을 남길 수 있다. 결국 한 사람의 생명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한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둘러싼 가족과 친구들의 삶도 함께 소중하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생명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하게 여기고, 누군가 힘들어하고 있다면 외면하지 않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우리의 삶에서 실천하는 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다. “자살한 사람은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는가?” 먼저 대답하자면, 자살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사람이 반드시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잘못된 행동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사람은 자살을 했든 하지 않았든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완전히 죄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구원이 결정되는 기준은 “죽기 전에 어떤 죄를 지었는가?”​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한가?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는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죄인이지만,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얼마나 완벽하게 살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고 살아온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마지막에 저지른 한 가지 죄만을 보고 “이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지 못했다”​라고 판단할 수 없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살이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생명을 스스로 끊는 행동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살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파괴하는 심각한 죄이다. 그러나 그 죄가 너무 커서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살로 생을 마친 사람을 보면서 함부로 “저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 어떤 믿음이 있었는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는 우리가 완전히 알 수 없다. 마지막 순간에 그 사람의 마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함부로 판단하기보다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신뢰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생명의 위기에 놓인 사람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힘들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곁에서 함께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구원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복음을 전하며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꿈사땅 여러분, 오늘 우리는 조금 무겁고 어려운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다. 사울과 아히도벨과 가룟 유다의 이야기를 살펴보았고, 삼손의 마지막 모습도 함께 살펴보았다. 그리고 성경이 우리의 생명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도 살펴보았다. 오늘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존재이다. 성적이 우리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친구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나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실수했다고 해서 나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사실이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가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힘든 상황이 찾아와도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 마지막 답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정말 힘든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 친구 때문에 힘들 수 있다. 가족 때문에 마음이 무너질 수도 있다. 학교생활이 너무 버거울 수도 있다. 내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때 가장 조심해야 할 생각은 “나는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힘든 순간에 “나는 끝났어”,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해”, “방법이 없어”라는 생각이 찾아온다면 혼자서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부모님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선생님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전도사님과 목사님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해야 한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약한 것이 아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믿음의 행동이다. 그리고 우리 주변도 돌아보아야 한다. 혹시 평소와 다르게 힘들어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친구가 힘들다고 이야기한다면 가볍게 넘기지 말고 그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라면 반드시 부모님이나 선생님, 전도사님에게 알려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기억하자. 우리의 소망은 우리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가에 달려 있지 않다. 우리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우리는 죄인이고 때로는 넘어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의 죄보다 예수님의 은혜가 크고, 우리의 절망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크다. 그러므로 지금 혹시 너무 힘든 사람이 있다면 “나는 끝났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아직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 아직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붙들고 계신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생명을 선택하는 믿음」 이다. 생명을 선택하는 믿음은 단순히 힘들어도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혼자 견디지 않고, 서로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생명을 선택하는 믿음이다. 절망이 찾아와도 하나님을 붙드는 것,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하는 것, 힘들어하는 친구의 곁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가 선택해야 할 믿음이다. 사랑하는 꿈사땅 여러분, 혹시 앞으로 여러분의 삶에 너무 힘든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혼자서 인생의 결론을 내리지 말기를 바란다. 하나님을 붙들자.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그리고 서로의 생명을 지켜주자.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어떤 순간에도 생명을 선택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꿈사땅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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