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적 가치를 거스르는 보배의 가치_청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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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12월 7일(주일)
제목 및 본문 : 이성적 가치를 거스르는 보배의 가치(고후4:7-15)
결단 : 다시 복음 앞에, 말씀 앞에서
설교 도입부터 이런 주제를 가지고 운을 떼고 싶지는 않은데, 설교의 흐름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라는 핑계로 ‘군대’ 이야기를 잠깐 해보려 합니다.
저는 흔히 남자들이 말하는 유격이나 혹한기를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남성분들이 경험한 포병 출신도 아니고, 운전병이나 행정병과 같은 서포트 하는 부대도 아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전투부대 소속이 아니라 교육사 소속의 논산훈련소 조교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조교들에게 요구되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품위’ 입니다. 훈련병의 군복은 조금 엉성해도, 조교의 군복은 각이 잡혀 있어야 합니다. 훈련병의 군복은 조금 지저분 할 수 있겠지만, 조교의 군복과 모자는 항상 새거같은 컨디션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조교의 품위는 군대를 처음 마주하는 훈련병들을 압도하는 강렬한 첫 인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하나 요구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강인한 체력’ 일 것입니다. 군대 체력장은 특급부터 1,2,3,4급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조교가 되기 위해선 최소 2급 안에 들어야만 합니다. 조교에게 최소 2급이라는 기준이 주어지는 것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통제’에 그 이유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를 예로 들자면, 조교는 매일 아침 훈련병들과 함께 구보를 해야 합니다. 이때 이들을 인도하고 통제해야 하는데, 만약 조교가 훈련병보다 못 뛴다면 그건 조교에게 엄청난 망신이 될 수 있겠죠.
뿐만 아니라 조교는 훈련병보다 훈련 능력에서도 압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조교들에게 일반 병사보다 높은 기준이 요구되는 것은 훈련병보다 뛰어난 능력으로 이들을 압도해야 통제할 수 있고, 통제가 되어야 이들을 사고 없이 안전하게 지킬 수 있기 때문에 품위부터 능력까지 높은 수준을 두어 그 기준을 지키게 하는데 이유가 있다 라는 겁니다.
훈련병들은 조교의 품위, 즉 첫 인상에 압도됨을 당하지만, 사실 조교가 실제로 훈련병들을 압도하는 힘은 내실, 즉 체력과 능력에 있음을 긴 훈련 기간 중 훈련병들이 점차 깨달아 갑니다.
이처럼 보통의 경우 우리는 품위라는 그릇과 능력이라는 내실을 부합하는 하나의 관계 속에 유지하려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게 곧 지극히 정상적인 판단이고, 또 매우 이성적인 판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품위는 있지만 실속이 없다면 그것은 허수가 되고, 실속은 있지만 품위가 없다면 운이라 여겨지거나 소위 거품이라 조롱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도 이런 관계성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는데,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물건이 있다면 우리는 그 물건을 결코 아무대나 두지 않을 겁니다. 분명 이를 보관할 만한 그릇이나 상자에 보관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소중한 것일수록 소중하게 여기려 하지 결코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질그릇의 가치를 아무리 높게 책정한다 한들 그게 통상적으로 수용이 됩니까? 안돼요. 질그릇은 그저 흙 따위를 비져 만든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를 비싸게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역설적이게도 그런 질그릇 따위에 보배를 담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4장 4절은 보배의 가치를 설명하는데, 이렇게 기록을 합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보배가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그리그 그 복음은요, 광채가 납니다. 이 보배는, 어느 누가 보아도 최소 질그릇 따위에 넣을만한 것이 아니구나 라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런 보배를 질그릇에 담았다 말하니,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그 뿐 입니까? 이 보배라는 말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 라는 이 표현이 우리 마음에 그리 와닿지 않다는 거에요. 그저 심오한 이야기로만 들릴 뿐, ‘도대체 그 보배가 지금 내 고난에 뭐 그리 중요하냐’는 생각만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보배는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내는 것 자체가 복음이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셔서 이 예배의 자리를 나아오게 하신 것 자체가 복음이라는 겁니다.
복음은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해서 얻어내는 결과물이 아니라, 내가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누릴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자녀삼으신 것’ 자체가 복음이라는 겁니다. 때론 설교자의 메세지가 귀에 들리지 않아도, 찬양이 어색해서 입술이 열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를 자녀 삼으시고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하신 것 자체가 복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보배를 값어치 없고 형편 없는 질그릇 따위가 가졌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우리가 오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이 형편 없는 질그릇에 우리를 비유했다 해서 우리의 삶이 형편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란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의 삶을 질그릇에 비유한 것은, 우리의 삶이 형편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못봐줄 만큼의 가치 없는 삶이라서가 아니라, 보배의 가치, 즉 복음 앞에 우리 삶을 비춰보니 우리가 가진 것 어느 하나 자랑할 수 없는 비약한 삶이기에, 우리를 질그릇에 비유한 것이지 결코 우리 삶이 형편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는 겁니다.
또 때로는 우리의 삶이 형편 없어서가 아닌데, 날마다 찾아오는 시련과 고난 때문에, 또 그 안에서 슬퍼하고 낙망하는 것 때문에 우리가 마치 질그릇과 같은 삶이라 착각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보배의 가치를 바로 알면 넘어질 것이 아님을 알지만서도, 우리는 고난이 찾아올 때마다 매번 넘어지고 또 넘어집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런 고난을 마주하는 상황이 참 많았나 봅니다. 그는 8절과 9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사도 바울은 너무나 연약한지라 내게 찾아온 욱여쌈, 답답한 일, 박해 또 거꾸러뜨림에 지금 당장은 속수무책으로 당할지라도 ‘내 안에 담긴 보배가 너무 소중하기에, 나는 낙심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겠다.’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날, 우리에게도 사도 바울과 같이 낙심하지 말자고, 넘어지지 말자고 권면하고 싶은데,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건 사도 바울이기 때문에 가능한거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가능하다고 말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과 9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이 당한 고난과 환난은 너무나 힘에 겨워서, 너무나 심한 고난을 당해서 ‘살 소망’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죽는게 좋겠다 생각할 정도로 극심한 고난이 찾아온 겁니다. 차라리 사형 선고가 속히 이루어져 숨을 끊는 것이 더 좋겠다 생각할 정도로 극심한 고통이 찾아온 겁니다.
그러나 그는 넘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왜요? 바울은 그 이유를 10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가 차마 고난에 넘어질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의 죽음을 내 몸에 지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말합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데요? 사도 바울이 예수님께서 날 위해 죽으신 십자가 사건을 몸에 새기고 보니, 내가 당하는 고난은 고난이 아님을 깨닫고, 앞으로 고난이 올 때마다 예수의 고난을 떠올리며 나 역시 고난을 이겨내자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고난을 마치 자기도 갈 수 있는 것처럼 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10절을 통해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내가 고난을 당할 때마다, 그러한 순간이 찾아 올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게 주어진 놀라운 생명을 바라보겠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내 삶이 질그릇과 같아 고난과 역경에 이가 나가고 금이 간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낙심하지 않고 낙망하지 말 것은 예수님도 고난 받았으니, 나도 그 고난을 견디겠다는 결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내게 생명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청년의 때, 참으로 많은 시련과 고난이 우리를 찾아 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는 것은 비록 내가 깨지고 넘어지더라도, 훗날 금그릇이 될 것을 기대하며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깨지고 넘어질지라도 우리 안에 있는 이 보배가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기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로는 저는 이 자리에 모인 우리 청년들의 삶이 금그릇 때문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이라는 그 보배 때문에 결코 넘어질 수 없는 그러한 삶을 살아내는 귀한 청년 공동체 되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제게 2025년은 참 고난의 해 였습니다. 올해는 이어진교회 개척 4년 중 장례가 가장 많은 해 였습니다. 장례가 많아서 고난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목사로써, 성도와 함께 울어야 할 자리를 지키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았습니다. 다만, 작년 말 제 기도제목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작년 말, 하나님께 올린 기도가 무엇이었냐면, ‘성도들과 함께 아파할 수 있는 그런 목사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제가 생각한 아픔은 죽음의 아픔, 이별의 아픔이 아니었는데 하나님께서 왠지 그렇게 응답해주신 것 같아서 올 한 해 성도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너무 컸습니다.
또 올해 저희 가정에 둘째가 생겼습니다. 기뻤습니다. 시간이 흘러 12주가 되어 안정기에 접어들자 ‘기쁨도 잠시’ 라는 말처럼 곧 저희는 ‘조기양막파수’라는 위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첫째 딸은 두 달이 넘도록 엄마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병원의 아내를 챙겨야 했고, 가정에선 아엘이를 챙겨야 했고, 교회에선 목사로서의 직분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육체적 힘듬이 너무 커 아엘이가 잠든 후 분리수거 하다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론 아무 것도 할 힘이 없어 집안일을 내팽겨 치기도 했습니다.
이제 2026년이 되면 이어진교회는 년차로 5년차에 접어듭니다. 그리고 저 역시 년차에 발맞춰 이어진교회에서만 5번째 부서를 맡게 됩니다. 이젠 떠난 이지만, 최근 김기락 목사님 설교 중 ‘자신의 이력서엔 설명이 필요하다’ 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 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한다 말씀하셨죠. 지금 제 이력서를 보면 서류 광탈입니다.
올해도 이어진교회를 지원하신 분들의 이력서를 보았고, 또 면접 일정을 잡아가다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내 이력서를 보면 면접은 갈 수 있을까? 과연 내 이력서를 보면 행정에 있는 사람들은 날 어떻게 평가할까?’ 서류 한 장으로 그 사람의 능력을 전부 알 수는 없지만,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제 이력서는 ‘전문성이 없다.’ 라는 판단이 내려집니다.
제게 2025년은 장례로 감정적 고난이 있었고, 아내와 잠시 이별해 마치 미혼부의 삶을 사느라 육체적 고난이 있었고, 미래를 생각하니 정서적 고난이 가득한 한 해였습니다.
마치 깨진 질그릇 같고, 또 질그릇으로 살아내는 것이 정말 유익한건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고민거리였고, 마치 매일 매일이 작은 가시로 손톱 밑 살을 찌르는 듯한 불편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와 돌이켜 보니, 고난이라 여겼던 모든 영역에 있어 하나님은 은혜를 보게 하셨습니다. 장례가 참 많았지만, 이는 제 기도가 아닌 함께 울 자로 저를 사용하신 거였습니다. 병원과 가정 그리고 목회의 바쁜 삶에 육체적 고난이 있었지만, 그 순간 하나님은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하셨습니다. 자그마한 생명 하나 조차 어찌할 바 몰라 허둥지둥 대는 것이 인간임을 보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제 이력서를 보면 한숨만 푹푹 나오지만, 하나님은 제게 분명한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비록 그 길이 지금과 같은 고난, 또는 지금보다 더 한 고난 일지라도 견딜 수 있는 ‘생명’을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깨진 질그릇을 어떻게 덧붙일지, 어떻게 이 나간 이 그릇을 바꿀 수 있는지 고민 했는데, 하나님은 그냥 있는 그대로를 쓰시기로 작정 하셨습니다.
중국에선 귀한 손님이 오시면 가장 오래된 그릇에 음식을 준비해 대접한다고 합니다. 그릇에 금이 가고 이가 나갔다 할지라도, 주인에게는 가장 손이 많이 가는 가장 귀한 그릇입니다. 귀한 손님에게 드리는 주인의 마음이고, 자랑이고 보물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세상은 내실에 걸맞는 품위를 마련하라 말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스펙, 더 높은 학위, 더 좋은 인맥 등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질그릇인 우리를 향해 충분하다 말씀하시며, 우리 안에 담긴 보배,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말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며, 어쩌면 여러분들 앞에 서 있는 것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기에, 마지막으로 정말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라면, 이미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언가를 더 노력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안에 담긴 복음이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자랑으로 만들었습니다.
세상은 먼지만 쌓이더라도 이쁜 그릇이 되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최고의 가치라 말하지만, 복음은 깨지고 이가 나갔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이 가는 질그릇을 가장 가치있다 말합니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늘 그 가치 잃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최고의 가치로 살아내는 우리 귀한 청년 공동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결단찬양 : 1. 다시 복음 앞에]
1.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만, 현실을 살아내는 우리는 자녀됨의 기쁨보단 세상이 추구하는 금그릇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우리의 삶을 다시 복음 앞에 내어놓는 이 시간 되길 소망합니다. 주님,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다시 회복 되게 하소서. 그래서 다시 복음 앞에 기쁨으로 서가는 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마음 담아 회복을 갈망하며 주님의 이름 세 번 부르짖으며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자랑입니다. 우리가 특출나서도 아니고, 우리가 높은 직위나 뛰어난 능력을 가져서도 아닙니다. 그저 내 안에 예수가 있기에, 비록 내가 질그릇일지라도 나를 귀하다 여기며 자랑으로 여기시는 겁니다. 이 시간 기도하며 나아가실 때, 주님, 내 평생에 소원이 있다면, 내 삶, 오직 주의 자랑만이 되게 하소서. 주님과 평생 동행하며 질그릇 안에 담긴 보배만 자랑하는 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마음 담아 주님의 이름 세 번 부르짖으며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결단찬양 : 2. 말씀 앞에서]
3. 우리 청년 공동체를 위해 기도합시다. 2년 전 제 기도 제목은 우리 청년들이 영적 성장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이 시점. 저는 감히 우리 청년들 정말 성장했다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제 기도제목이자, 또 공동체가 함께 이렇게 기도했으면 합니다. 더 주님을 알아가게 하소서. 더 주님의 말씀 앞에 서 있게 하소서. 더욱 주님 말씀에 운명을 걸고 주 따라가는 우리 하올 청년 공동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공동체에 영적 성장이 더욱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마음 담아 마지막으로 주님의 이름 세 번 부르짖으며 기도합시다.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부 하나님 아버지의 변함없는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감동 감화 역사 임재 충만하심이
질그릇 안에 담긴 보배의 가치를 알아, 더욱 그 복음을 지켜 세상에 선포하는 자 되겠노라 결단한 우리 귀한 청년들과
더욱이 말씀 앞에 운명을 걸고 서 있겠노라 다짐한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과
이어진교회와 하올청년부와 그리고 가정과 이 나라와 세계 열방 곳곳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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