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종류의 면류관(왕관)

이사야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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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두 종류의 면류관(왕관)
[서론]
혹시 ‘세븐’이라는 영화를 보신 적 있으신가요?(포스터)
거기에는 인간의 일곱가지 대표적인 죄를 응징하는 연쇄 살인범이 등장합니다.
그 죄악중 하나가 바로 ‘교만’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며 궁금했던 것은 과연 ‘교만’을 어떻게 표현할까 였습니다.
영화는 교만을 매우 충격적인 방식으로 묘사합니다.
범인은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던 한 여성의 얼굴을 훼손합니다.
그 뒤 한 손에는 구조요청을 할수 있는 전화기를 들려줍니다.
다른 한 손에는 치명적인 수면제를 쥐어 줍니다.
이 여성은 전화만 걸면 살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망가진 얼굴로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며 살 자신이 없었던 그녀는 결국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이 비극적인 장면은 교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교만은 단순히 ‘내가 제일 잘나가’라고 뽐내는 태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남들보다 더 나은 나’를 증명해줄 무언가를 내 인생의 궁극적 면류관(왕관)으로 삼는 것,
그것에 나의 모든 존재가치를 거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교만의 뿌리입니다.
어떤 사람은 외모를,
어떤 사람은 돈을,
어떤 사람은 성공이나 성취를,
어떤 사람은 사람들의 인정을 인생의 면류관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벗겨지거나 훼손되는 순간, 마치 인생이 끝난 것처럼 절망합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지성으로 불리는 C.S 루이스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교만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만족을 얻는 가장 치명적인 영적인 암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만에 비하면 다른 죄들은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인정과 성취를 머리에 쓰고 이것이 나의 면류관, 나의 영광이라고 도취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떨까요?
사실 교만이 무서운 이유쉽게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교만을 극복할수 있을까요?
[본론1]
예언자 이사야는 북이스라엘, 특히 수도인 사마리아 성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들이 심판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절보시면 이사야는 그들을 ‘술취한 자’라고 부릅니다.
사람이 술에 취하면 감각이 무뎌지고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위험이 다가오는데도 그것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자신이 실제보다 훨씬 강하다고 착각합니다.
이사야가 보기에 당시 사마리아의 영적 상태가 이와 같았습니다.
사마리아 성은 기름진 평야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천연의 요새로서 방어에 유리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언덕 위에 화려한 왕관을 얹어 놓은 듯 웅장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게다가 당시 북이스라엘은 농업과 무역의 발달로 유례없는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풍요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들이 이 화려함과 풍요에 취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튼튼한 성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 착각했습니다.
재산과 번영이 계속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지금 잘되고 있으니 앞으로도 계속 잘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는 실제 사마리아의 모습은 전혀 달랐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화려한 면류관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교만의 면류관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활짝 핀 아름다운 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이미 시들어가는 꽃이었습니다.
3,4절은 그 화려함의 끝을 처절하게 폭로합니다.
발에 짓밟히고, 길가던 사람이 “여름 전에 먼저 익은 무화과”를 발견하자마자 손에 쥐고 꿀꺽 삼켜버리듯,
앗수르라는 거대한 폭풍 앞에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풍요와 안정이 하나님을 대신할때, 그것은 곧바로 우상이 됩니다.
은혜로 주어진 것이 어느새 내 자랑이 됩니다.
그 자랑을 내 머리 위의 면류관으로 삼는 순간, 우리는 영적 마비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못하게 됩니다.
예전에 많은 사랑을 받았던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의 초반부에서 ‘사람의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에 대해 5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죄책감, 상처와 분노, 두려움, 물질에 대한 욕망, 사람들의 인정 욕구입니다.
한번 우리의 삶도 돌아봐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에 취해 있습니까?
돈이 없으면 불안합니까?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견디기 힘듭니까?
성공과 성취를 가지고 내 존재 가치를 확인하지는 않습니까?
물론 돈, 사람들의 인정, 성공과 성취 모두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보다 나의 존재가치와 정체성을 규정하게 될 때,
그것이 바로 교만의 면류관이자 시들어버릴 가짜 영광입니다.
그럼 우리가 써야할 면류관은 어떤 면류관일까요?
[본론2]
5절입니다.
그 날이 오면, 만군의 주님께서 친히 주님의 남은 백성에게 아름다운 면류관이 되시며, 영화로운 왕관이 되실 것이다.
세상의 영광, 스스로 쓴 교만의 면류관은 결국 시들고 발에 짓밟히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엎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성경은 ‘남은 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더 화려한 왕관이나 세상의 부귀영화를 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면류관이 되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과연 하나님이 면류관이 되어주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단순히 추상적인 종교 구호가 아닙니다.
신앙적 고백이 아닙니다.
6절은 뜻밖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주님께서는 재판관이 된 사람들에게 공평의 영을 주시고, 용사들에게는 성읍 문으로 쳐들어온 적을 막는 용기를 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면류관으로 삼는 자에게는 두가지 은혜가 주어집니다.
공평의 영과 용기입니다.
먼저 ‘공평의 영’이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수 있는 분별력을 말합니다.
7절에 보면 당시 지도자들,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은 세상에 취해 분별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내 이익과 사람들의 시선에 갇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면류관으로 삼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수 있는 영적 지혜를 얻게 됩니다.
두번째로는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용기란 남을 짓밟고 공격하는 공격성이 아닙니다.
세상의 거센 풍조와 시험이 삶을 무너뜨리려 할때, 그 자리를 지킬수 있는 거룩한 용기입니다.
두가지는 반드시 함께 가야 합니다.
분별력만 있고, 용기가 없으면 비겁하게 타협하고 맙니다.
반대로 용기만 있고, 분별력이 없으면 맹목적인 열정이나 독선이 빠지기 쉽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내 인생의 참된 면류관으로 삼을때, 우리는 바르게 분별할 지혜를 얻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벼텨낼수 있는 믿음의 용기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줄수 없는 결코 시들지 않는 하나님의 면류관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면류관으로 삼는 사람들의 삶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특징과 열매가 나타나게 될까요?
[본론3]
하나님을 참된 면류관으로 삼는 사람에게는 삶의 가장 분명한 특징 하나가 나타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경청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세상의 화려한 면류관에 취해 교만해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할까요?
9절입니다.
제사장들이 나에게 빈정거린다. "저 자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건가? 저 자의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젖뗀 아이들이나 가르치라고 하여라. 젖을 먹지 않는 어린 아이들이나 가르치라고 하여라.
당시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이사야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사야가 자꾸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니까 듣기 싫은 것입니다.
“너희의 힘을 의지하지 말아라”
“주님께 돌아와라”
“주님을 의지해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그들에게는 이런 말씀이 너무 뻔한 것입니다.
그래서 애들한테나 할법한 설교를 자신들한테 한다며 빈정댄 것입니다.
10절은 이런 그들의 조롱을 표현한 것입니다.
“한 자 한 자, 한 절 한 절, 한 장 한 장”
개역개정 성경은 좀 다르게 번역합니다.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히브리어로 읽게 되면 13절에 나온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제에르 샴, 제에르 샴’입니다.
짧은 음절들의 연속입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가나다라…”를 가르치는 느낌인 것입니다.
그럼 이사야가 주로 한 말씀이 무엇이길래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일까요?
12절입니다.
주님께서 전에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 고달픈 사람들은 편히 쉬어라.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 그러나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사야는 백성들에게 계속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와라,
너희의 힘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신뢰해라,
그러면 진정한 쉼을 얻는다”
그들을 살리기 위한 말씀이었지만 자기 확신과 교만에 취한 그들은 뻔한 잔소리로 들은 것입니다.
그러나 13절에서 무서운 반전이 선포됩니다.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서 다치게 하시고, 덫에 걸려서 잡히게 하려 하신 것이다.”
그들이 시시하다고 조롱하던 그 말씀이 결국 심판의 말씀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가볍게 여긴 대가는 패망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매주 예배 자리에서 듣는 말씀이 너무 익숙해서, 뻔하고 지루하게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의지해라, 말씀에 순종해라,
내 힘과 지혜를 의지하지 마라”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이 시시하게 들리기 시작할때가 바로 내 영혼이 교만이라는 독에 취해 있다는 위험한 신호임을 말입니다.
사람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끊임없이 자기 경험, 자기 지혜를 의지합니다.
자기가 만든 면류관을 신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면 자기 상태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마다 우리를 비춰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말씀은 내가 볼수 없었고, 보고 싶지 않았던 내 안의 교만을 폭로합니다.
내가 옳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생각들을 내려놓게 만듭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짜 겸손은 단순히 ‘내가 부족합니다’라고 말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언제든지 내 생각과 고집을 꺾고 수정할수 있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참된 면류관으로 삼는 사람은 아무리 익숙한 말씀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경청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두가지 종류의 면류관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만든 세상의 면류관은 결국 허무하게 시들고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나의 면류관으로 삼는 사람에게는
‘바른 것을 선택할수 있는 지혜’‘흔들리지 않고 벼텨낼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그런 사람은 날마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면류관 말고 또 하나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쓰신 가시 면류관입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화려한 왕관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머리 위에 쓰여있던 교만과 죄악의 면류관을 벗겨주시기 위해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그 가시 면류관때문에 우리는 거짓 면류관을 벗게 되었습니다.
그 가시 면류관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면류관으로 삼게 된 것입니다.
과연 내가 쓰고 있는 면류관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사람의 인정과 성공, 성취라는 시들어버릴 면류관을 쓰려고 애를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내 생각과 경험, 세상 가치관을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교만한 면류관을 하나님의 면류관으로 바꿀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날마다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을 바라보며 날마다 말씀 앞에 나를 세우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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