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를 넘어 걷는 길_청년부
Notes
Transcript
일시 : 2026년 8월 2일(주일)
제목 및 본문 : 이해를 넘어 걷는 길(호14:9)
결단 : 예수의 길
공교롭게도 작년에 이어 올해도 우리 청년부가 선교 가기 직전의 설교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주일에 비해 조금 더 거룩한 부담감이 제 안에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바라옵기로는 이 시간 제 안에 임한 거룩한 부담감이 선교로 나아가는 귀한 청년부 안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채워지는 그러한 시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여러분들은 보통 두통이 올 때 어떤 약을 드십니까? 물론 개개인의 성향마다 다르겠지만 보통은 ‘타이레놀’을 복용하실 겁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 어쩌면 우리가 타이레놀을 영영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사건이 있음을 알고 계십니까?
1982년 9월 시카고, 어느 한 마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두통과 감기 증상이 있던 사람들이 타이레놀을 구매해 복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을 복용한 사람들이 하나 둘 쓰러지더니 결국 7명이 사망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겁니다.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고 국가는 사망 원인을 밝히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접근해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조사 결과 놀라운 결과가 나오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제조 과정에는 어떠한 문제도 없다.’ 라는 결과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누군가는 쓰러졌고, 누군가는 사망에 이른 것일까요? 그 시간과 그 순간을 다시 되돌려 보니 누군가 마트 진열대에 있던 타이레놀 캡슐에 ‘청산가리’를 넣은 뒤 다시 진열했던 겁니다. 다시 말해, 회사가 만든 제품 자체에 문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 제품을 훼손한 범죄였던 거지요.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범죄자가 아닌 타이레놀 자체를 향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도 타이레놀을 먹고 죽으면 어떻게 하지? 이제 누가 타이레놀을 믿을 수 있을까?”
당시 타이레놀은 미국 진통제 시장의 약 37%를 차지하던 1위 제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판매량은 급격히 떨어졌고, 회사 또한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었지요.
이때 타이레놀을 만든 회사, 존슨앤드존슨은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그것은 바로 ‘시중에 있는 모든 타이레놀 전량을 회수’ 하는 거였어요. 그들은 약 1억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약 1443억의 손실을 각오하고 전량 회수하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뒤 타이레놀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전과는 달리 내부 봉인과 밀봉 캡 그리고 외부 비닐포장과 함께 말이지요. 오늘 날 우리가 약을 구매했을 때 개별 포장 및 여러개의 비닐로 덮여져 있는 것은 사실 과거 타이레놀이 보여준 대처로부터 생긴 최근의 문화인 겁니다.
문제가 생겼을 당시 사람들은 “이 회사는 망했다. 이 회사는 끝났다.” 라고 평가했습니다. 어쩌면 회사 역시 “정말 끝났다.”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들은 ‘소비자 중심’이라는 기업 가치를 다시 되새기며 회사를 회복시키기에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소비자로부터 ‘위기 속에서 소비자를 먼저 생각한 회사’라는 인식을 얻게 됩니다.
사람들이 존슨앤드존슨 회사를 ‘망했다, 끝났다’ 평가한 것처럼, 어쩌면 세상은 우리의 인생을 너무 빨리 평가하려 하는게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가령 취업이 조금만 늦어져도 실패라 말하고, 늦은 나이에 연애가 끝나면 인생을 망쳤다 말하기도 합니다. 또 무언가 제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보며 볼품 없다 평가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함께 볼 호세아의 인생 역시 그러한 인생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호세아는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은 호세아의 외모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고, 나이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호세아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지자’ 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선택받는 다는 것은 선택당한 사람에게 꽤나 높은 기대감을 안겨주는 행동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축구 국가대표에 선택되어 뽑혔다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기대합니까? ‘오늘 너 선발이야!’ 감독으로부터 경기에 뛴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것을 기대하는게 당연한 모습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지자였던 호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겠죠. 예를 들어, ‘가서 내 말을 전해라.’ 라고 하시던가, 아님 조금 준비가 필요했다면 ‘내가 너를 축복하나 준비될 시간이 필요하구나. 우리 조금 더 훈련되어지자.’ 라고 말하실 것을 기대하는게 호세아의 입장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호세아를 향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첫 마디가 무엇입니까? “가서 음녀를 만나라.” 여러분, 상식적으로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첫 명령 아닙니까?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아들을 낳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스르엘’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이라 경고 하셨습니다. 또 딸을 낳았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로루하마’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선포하셨습니다. 아들을 또 낳습니다. 그의 이름은 ‘루암미’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이라며 선을 완벽하게 그으셨습니다.
사실 저는 호세아서를 읽으면서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것은 음녀와의 결혼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것은 호세아 였습니다. 음녀를 만나라는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 호세아는 그렇게 합니다. 또 자녀를 낳고 저주하는 하나님 앞에 원망 하지 않고 그렇게 자녀 이름을 짓습니다. 아내가 다시 음녀의 삶을 살아내는 즉 가정이 깨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에도 호세아는 다시 고멜을 품습니다. 그런데 가장 이해되지 않는 호세아의 모습이 있다면, 그는 계속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이어갔다는 겁니다.
그는 원망하지도 도망가지도 않았습니다. 선지자의 사명을 내려놓지도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을 계속 전했습니다. 저는 그런 호세아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저라면 하나님한테 엄청 따졌을 겁니다. “왜 제 인생입니까? 왜 하필 저 입니까? 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데 제 인생이 더 무너져 내립니까?”
어쩌면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을지 모릅니다. “네 인생은 망했다. 하나님이 네 인생을 망치셨다. 네 인생은 끝났다.”
때론 우리의 삶도 그런 것 같습니다. 취업 하기 위해 수 없이 공부했고 수 많은 자격증을 땄습니다. 하지만 나만 빼고 내 주변 모두가 취업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며 그동안의 수고와 노력이 다 물거품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생각하겠죠.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된거지? 인생이 너무 안풀리는데? 하나님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이거해라 저거해라. 그래서 최선을 다해 섬겼는데 어째서인지 인생이 더 가혹해 집니다. 설상가상 이젠 교회가 나를 ‘도구’로 여기는 것 같아 상처가 더 깊어져 갑니다. 우린 또 생각할 겁니다. “하나님! 하나님 뜻대로 살면 더 잘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제 인생이 더 피폐해지는 겁니까?”
여러분, 예수를 믿는데 인생이 너무 가혹합니다. 간증 집회를 보면 예수 믿고 다들 성공을 하거나 다들 평안 가운데 살아내는데, 그러기엔 우리 인생은 너무나 비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정말 호세아의 인생을 망치신 겁니까? 정말 한 사람의 인생을 희생시켜 한 나라를 회복시키려 하셨던 걸까요?
놀랍게도 성경은 왜 호세아가 음녀를 만나야 했는지, 왜 호세아의 인생이 이토록 비참하게 시작되어야 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계속해서 호세아를 통해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와 회복의 메세지를 전할 뿐이에요.
그러다 호세아서 마지막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
우리는 계속해서 왜 호세아가 음녀를 만났는지, 왜 호세아의 인생이 비참하게 시작되었는지, 왜 하나님은 호세아의 인생을 망치셨는지 이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는데, 정작 호세아서의 마지막은 대답이 아니라 ‘길’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이해 할 이유를 말씀해 주신 것이 아니라 호세아가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신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유를 묻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설명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걸음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해한 뒤 순종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에게 길을 열어 주십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의 길은 이해한 후에 걷는 길이 아니라 신뢰하며 걷는 길 입니다. 호세아가 도망가지 않았던 이유도,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이유도 하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신뢰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 쓰임받았던 사람들의 삶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설명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먼저 걸음을 요구하셨다는 거에요.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땅에서 누구를 만날 것인지, 그 땅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어요. 그냥 딱 하나 말씀하십니다. “가라”
그러자 아브라함이 어떻게 합니까? 칠십오 세 라는 나이에 그 길을 갑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건 아브라함이 목적지를 알고 떠난게 아니라는 겁니다. 목적지도 모르면서 그저 목적지를 알고 인도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떠난 겁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아브라함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밤새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라고 말입니다. 베드로는 전문 어부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지금 던져도 소용없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신뢰하며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믿음의 길을 가정 먼저 걸어가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우리는 종종 십자가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이해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기도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이 기도는 예수님도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계셨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적으로는 그 길을 피하고 싶으셨다 라는거에요. 그런데도 그 길을 걸으셨어요. 왜요? 아버지를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길은 쉽다.” 라고 말씀하시 않으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고백하며 먼저 그 길을 걸어 보여 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십자가를 다 이해하셨기 때문에 그 길을 걸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을 신뢰했기 때문에 그 길을 걸어가신 겁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실패라 말했고, 제자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 죄인을 살리셨고, 죽음을 이기셨고 부활의 길을 여셨습니다. 사람들 눈에는 끝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실패처럼 보였던 십자가를 가장 위대한 구원의 길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그 길을 먼저 걸어 가셨기 때문에 그 길을 신뢰하며 우리도 걸어보는 겁니다.
사실 이 설교는 여러분들을 먼저 생각해서 쓴 설교가 아닙니다. 제 자신을 위한 설교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저는 지금 개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12년이라는 시간 동안 제주 개척에 대한 비전을 품고 살았지만, 저는 요즘 하나님께 참 많이 묻습니다. “하나님, 진짜 가야합니까? 지금이라도 막으신다면 얼마든지 멈추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정말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지금이라도 다 내려놓고 싶습니다. 현실을 보면 너무 두렵고 계산을 하면 할수록 막막하기만 해요. 12년간 침묵했던 하나님이 지금도 침묵하는 것 같아 때론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개척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개척이 쉬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길로 저를 부르셨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12년이 무의미한 시간이라 생각했습니다. 진전도 없고 길은 보이지 않고 그저 제주가 좋아 꿈꾼 제 개인적인 헛된 소망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난 12년을 넘어 그 이상의 것으로 길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사람을 만나게 하셨고, 마을로 들어갈 통로를 열어 주셨다는 겁니다.
준비하다보니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전히 두렵다는 거에요. 아내와 두 자녀를 어떻게 먹여 살리지? 가족이 아플 때 마땅한 병원 하나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하나님이 응답해주시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제 모든 질문에 답해주지 않더라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길을 계속 걸어가는 이유는 하나님이 저를 부르셨다는 확신 하나 입니다.
저는 오늘도 개척을 준비합니다. 이해가 끝났기 때문도,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도, 모든 것이 준비되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를 부르셨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도 그랬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예수님 역시 이해가 되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이제 국내 선교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해가 끝나서 선교를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해가 끝나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먼저 그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길을 걷는 겁니다.
바라옵기로는 이번 국내 선교도 이해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먼저 걸어가신 예수님을 신뢰하며 이해를 넘어 한 걸음 내딛는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Bridge Message]
우리 이 시간 함께 찬양하길 원합니다. 이해되지 않지만 아버지의 뜻을 신뢰하며 걸어가신 그 예수의 길. 오늘 우리는 그 길 앞에 서 있습니다.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고, 여전히 두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모든 답을 가진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먼저 걸어가신 예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드리는 고백입니다. 우리 이 시간 찬양하실 때 우리의 결심을 고백하기보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신뢰를 고백하며 함께 찬양으로 나아갑시다.
[결단찬양 : 1. 예수의 길]
1.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어쩌면 우리 가운데도 이해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 나여야 했는지, 왜 이런 길을 가야 했는지, 왜 응답하지 않으시는지.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이유를 설명하기보다 그저 우리를 그 길로 부르고 계십니다. 이 시간 기도하실 때, 이해를 구하기보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앞에 끝까지 신뢰하는 믿음을 허락하소서. 더 나아가 오늘도 예수님을 신뢰하며 한 걸음 내딛게 하소서.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부 하나님 아버지의 변함없는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감동 감화 역사 임재 충만하심이
비록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앞에 끝까지 신뢰하는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딛겠노라
결단한 우리 귀한 청년들과 또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과
이어진교회와 하올청년부 그리고 국내선교의 모든 여정 가운데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