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도 훈련입니다_중보기도

출애굽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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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6년 4월 8일(수)
제목 및 본문 : 원망도 훈련입니다(출 16:1-4)
결단 : 이제 역전되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에드바르트’는 군의관 아버지와 예술을 사랑한 어머니 사이에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5살이 되던 해를 기점으로, 그는 가정을 무너뜨리는 여러 비극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를 찾아온 첫 번째 비극은 ‘결핵으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된’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비극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두 번째 비극을 마주하게 되는데, 어머니처럼 따르던 ‘누나마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겁니다.
너무나 어렸던 그에게 연달아 일어난 가족의 죽음은 너무나 충격적인 현실이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 역시 아내를 잃고 극한의 우울증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아버지는 ‘잘못된 신앙’을 의지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아버지는 더이상 가정을 돌보지 않게 됩니다. 그저 기도만이 자신을 위로할 수 있다고 여기며 말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신앙에 따른 기도는 결국 아버지를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들어 버렸고, 끝내 자녀들을 학대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아내의 죽음을 자녀 탓으로 돌려버렸습니다.
그의 어릴 적은 씻을 수 없는 상처로 가득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의 이모만큼은 그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환대해 주었다는 겁니다. 이모와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잠시 잠깐이라도 상처를 잊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고 합니다.
1889년, 그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을 때, 또 한 번의 비극이 그를 찾아옵니다. 바로 ‘뇌출혈로 인해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었어요. 평생 자신을 학대했고 괴롭혔던 아버지였지만, 부모님을 모두 잃었다 라는 그 슬픔은 어떤 슬픔보다도 참기 힘든 슬픔이 되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몇 년 후, 그는 희망을 품고 떠났던 유학길을 고통 중에 마무리하며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해질녘에 길을 걷던 중 그가 노을을 보게됩니다. 그에게 붉은 노을은 마치 피비린내가 가득한 핏물 투성이었고, 불어오던 바람 소리는 마치 괴성 소리처럼 들려왔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는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림을 통해 표현하였고, 이 그림이 바로 그 유명한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입니다.
뭉크의 어릴 적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 고난 속에서 바라본 세상은 절망 그 자체였죠. 그러다보니 그의 마음엔 여유가 없었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보니 누군가에겐 아름다웠을 해질녘의 노을도 피비릿내가 가득한 시간이었고, 누군가에겐 상쾌한 바람도 그에겐 괴성 소리에 불과했던 겁니다.
이처럼 상황을 해석함에 있어서 내면의 상태는 어쩌면 굉장히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만약 연애를 하고 있다면, 비가 오는 날엔 우산을 함께 쓸 생각으로 행복해 할 수도 있지만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어려운 상태라면 비 오는 날은 최악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오늘 본문 속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상황은 ‘출애굽한지 45일이 지나자 먹을 것이 다 떨어진 상황’입니다. 그러자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2절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바로 ‘원망’입니다. 어쩌다 이들은 출애굽한지 45일 만에 원망의 소리를 내게 된 걸까요? 그 동안 이들에게는 어떤 내면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요?
먼저 그들은 400년이라는 시간을 애굽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종으로 사는 동안 그들의 소유물은 단 하나도 없었고, 시간의 자유 역시 기대할 수 없었겠죠.
그러던 어느 날, 그들 앞에 모세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어쩌면 애굽에서 태어나 평생 애굽을 떠나 본 적 없는, 노예를 벗어나본 적 없는 그들을 데리고 ‘출애굽 대작전’을 펼칩니다.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죠. 단 한 번도 자신의 소유물을 가져본 적 없었을 그들은 심히 많은 먹을 것을 챙겨 나옵니다. 또 시간의 자유를 단 한 번도 누린 적 없는 그들은, 이젠 누워 있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여유가 생겼습니다.
너무나 기뻤을 겁니다. 비록 광야를 걷고 있을지라도, 뭐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가족과 맛있는 음식을 부담없이 먹을 수 있고 일하지 않아도 재촉할 사람이 없는데 말입니다. 모세 역시 기쁨을 감출 수 없었나 봅니다. 하나님께 감사 고백이 가득한 ‘모세의 노래’가 출애굽기 15장에 빼곡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흘러 먹을 것이 떨어져가자 그들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져가죠. 그리고 45일이 지난 지금, 먹을 것이 다 동나자 이제 이들은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45일간 내면의 완벽한 변화가 이루어진 겁니다.
이들에게 생긴 내면의 변화 첫 번째는 ‘비교’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무엇을 비교합니까? 고기와 떡을 먹던 때와 먹을 것이 다 떨어진 현재를 비교하는 겁니다. 심지어 이 비교는 그리 먼 과거도 아닙니다. 불과 한 달 전과 지금을 비교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들의 비교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 떡과 고기를 배불리 먹었던 걸까요? 물론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을거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의 소리를 들었다 말씀하셨고, 학대 당함을 보셨다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내면의 생긴 두 번째 변화를 알 수 있는데, 바로 ‘왜곡’입니다. 한 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들은 현실의 불편 앞에 지난 날의 일들을 왜곡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단 한 번도 고기와 떡을 배불리 먹었던 적이 없습니다. 또 그들은 애굽에서 죽는 것을 결코 반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실제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는 몇 초 전 일도 왜곡해 기억한다는 결과가 있습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심리학 연구팀에서 20대 초반의 젊은 남여그룹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 본 결과, 분명 거꾸로 쓰여진 알파벳을 순서 중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그렇지 않았다.’라고 대답했다는 겁니다.
이와 같은 실험을 총 3번 반복했지만, 결과는 비슷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참가자들이 가진 알파벳 모양에 대한 지식과 실험에 나온 모양에 대한 지식이 정답일거라는 기대감이 작용한 것’이라며, ‘내적 편견이 기억의 왜곡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라고 정리를 합니다.
인간은 그런 존재입니다. 너무 쉽게 비교합니다. 너무 무분별하게 왜곡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역시 너무 빨리, 또 너무 쉽게 나타났습니다. 지난 날과 비교하니 지금의 굶주림이 너무나 억울한 겁니다. 지난 날 매일 채찍질 당하며 고통스러워했지만 먹을 것이 있었다는 생각과 잘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는 생각에, 지난 날의 고통을 왜곡하며 끝내 현재를 원망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의 삶의 원망을 멈추기 위해선 어떻게해야 하는겁니까? 내면의 문제들을 해결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지금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내면의 변화에 따른 원망이 있다는 사실에 저 역시 충분히 동의하지만, 그렇다해서 원망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당장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과 환경을 직관적으로 바라보십시오. 지금 이들은 먹을 것이 다 떨어진 상태입니다. 언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도착할지도 모르는 불안전한 상황 속에서 이들의 식량이 이제는 없다는 겁니다. 허허벌판과 같은 광야에서 이 수많은 사람들의 먹을 것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감도 안잡히는 막막한 상황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 가운데 원망 섞인 소리가 안나오는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닙니까? 불확실한 미래 앞에 먹을 것이 다 떨어진 지금, 여전히 출애굽한 사실에 신이 나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거 아닙니까? 오히려 원망 하는게 당연한 모습 아니겠냐는 이야깁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원망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내면에 일어난 변화들을 잘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게 아닙니다. 내면의 변화든, 혹은 환경의 변화에 따른 순간적인 감정이든 원망은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타당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이들이 더 처절하게 원망해야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기도 해요. 다만 이들의 원망은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들의 원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누구를 향합니까? 모세와 아론을 향합니다. 다시 말해, 내 이웃을 향한 원망인겁니다. 저는 그런 측면에서, 누구나 원망할 수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원망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그 순간 누굴 향해 원망해야만 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은 모세와 아론을 향했지만, 이를 해결하시는 이는 누구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은, 또 우리의 원망은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 이들이 하나님의 개입을 몰랐을 리는 없습니다. 이미 애굽 땅에서 열 가지 재앙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보았을 겁니다. 설령 열 가지 재앙이 간접적으로 느껴진다고 한들, 출애굽한 이후로 보여주신 구름기둥과 불기둥, 그리고 홍해를 갈라 주셨던 것들은 결코 간접적이라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입니다.
이들은 이미 직간접적으로 ‘우리의 고통을 들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이를 해결하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원망해야 할 때, 정말 부르짖어야 할 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이들을 향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평소엔 창조주 하나님, 구원자 예수님을 묵상하며 은혜로 살아낸다 고백하지만, 막상 고난이 올 땐 하나님이 아닌 우리의 모세와 아론을 향해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그들과 비교하며 내 자신을 더욱 주눅들게 만들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저 역시 비교를 참 많이 했던 목사입니다. 저와 함께 공부한 16명의 그룹이 있는데, 그 중 15명이 대형교회에 있습니다. 여러분, 그 그룹 안에 있으면 그 누구도 저를 깎아내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됩니다.
저라고 주눅이 안들겠습니까. 수련회나 행사를 준비하면서 도움 좀 받으려 하면 ‘인원수’부터 차이가 납니다. 2-30명이 갈 공간을 찾고 있는데, 4-500명이 갈 장소 추천해 달라고 말합니다. 또 15명이 공교롭게도 악기는 하나씩 다 다룹니다. 뿐만 아니라 다 찬양 인도에 탁월한 능력도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저는 악기도 못다룹니다. 찬양 인도에 탁월함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 말도 안하는데, 저 혼자 비교하는 겁니다. 그렇게 무너져 가는 거에요.
그래서 지금도 무너져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긴 시간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몇 년을 하나님과 싸웠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너무나 자유합니다.
여전히 악기 하나 다룰줄 모르지만, 여전히 찬양 인도는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여전히 2-30명이 갈 성경학교 장소를 찾고는 있지만 더이상의 원망은 없습니다. 오히려 기대가 됩니다. 하나님이 저를 어떻게 쓰실지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론 원망이 길어질지도 모릅니다. 또 원망의 정도가 날이 가면 갈수록 강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망의 문제를 내 안에서 찾아 해결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우리의 원망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십시오. 우리의 고통을 듣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이를 해결하실 이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원망 끝에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 끝에 저주를 담았습니다. 3절 하반절을 보니,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노예생활 하는 동안에도 이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출애굽 과정에서 험난한 시간들이 분명 존재했지만, 그런 순간들 속에서도 하나님은 이들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또 한 번의 고난이 오자 단정 지어버립니다. ‘죽게되었다’고 말입니다.
이들이 착잡한 심정 가운데 있음을 백 번이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원망해야만 한다는 것도 천 번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 절망과 저주가 나오는 것도 만 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원망 끝에 ‘하나님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할 때가 도래했음을 아신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로 향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심정은 마태복음 26장 38절에 기록된 것처럼, ‘너무나 괴로워 죽을 지경’에 계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이런 고백으로 나아갑니다. 39절 입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 역시 죽음 앞에 괴로워 하셨고 두려워 하셨습니다. 가능하다면 죽음의 잔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르짖음 끝에는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어진 인생이 너무나 고단하여 원망 섞인 소리가 나올지라도, 또는 꼭 원망이 아니라 부르짖을 것이 있어 마음의 막막함이 찾아올지라도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십시오.
주어진 환경 가운데 홀로 남겨진 것같아, 계속 비교가 되고 과거가 왜곡 되는 것만 같다면 그마저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십시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말합니다. “예수님을 좇는 이들도 말라리아에 걸리고, 세상 떠난 어린자녀를 땅에 묻어야 하며, 온갖 중독 증세와 싸워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을 여느 사람들과 구별 짓는 특징은 ‘폭풍우가 완전히 사라진 순적한 삶’이 아닙니다. 둘 사이의 차이점은 광풍을 겪으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를 발견한다는 데 있습니다.”
고난과 원망 가운데,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주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결단찬양 및 기도]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들은 말씀을 근거로 중보기도팀을 위해서]
-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어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그런 주님 앞에 부르짖는 우리 되게 하소서
- 나의 고난과 원망 끝에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소망을 두게 하소서
[교회를 위해서]
- 설립 4주년을 맞이하는 이어진교회가 작년보다 올해, 올해보다 내년.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더 쓰임받는 교회 되게 하소서
- 아픈 상처 있는 성도들을 위해 함께 울어주며,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주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다락방과 가정을 위해서]
- 세상의 기준을 두기보다 하나님 말씀에 기준을 두고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다락방 되게 하소서
- 비록 지금은 광야일지라도 40년 뒤 가나안 땅 입성이라는 열매를 맺은 것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열매맺음을 바라보는 가정 되게 하소서
2. 이제 역전되리라
[환우들을 위해서]
- 고난과 고통 중에 부르짖는 이들. 그들의 원망을 하나님께서 들으사 이제는 역전의 은혜가 임하게 하소서
- 옆에서 함께 섬기며 돕는 이들의 손길이 때론 고통일지라도 주님께서 이들을 불쌍히 여기서 오늘도 만나와 메추라기의 은혜로 살아내게 하소서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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