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거친 파도가 몰아칠 때_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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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6년 6월 24일(수)
제목 및 본문 : 인생에 거친 파도가 몰아칠 때(마 14:22-33)
결단 : 주 품에, 나의 하나님, 물 위를 걷는 자
저는 복싱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그래도 세계 챔피언이었던 한국의 박종팔 선수가 대단했다는 것과 핵주먹으로 복싱계를 휩쓸었던 미국의 마이크 타이슨이 전설적인 선수라는 것은 잘 압니다.
최근 복싱관련 영상 몇 개를 보게 되었습니다. 보면서 느낀 것이 있는데, 박종팔 선수의 현역때 움직임도 정말 대단한데 지금 나이들어서도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마이크 타이슨의 현역때 움직임을 보면서 정말 예술 그 자체라 느낄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보니 마이크 타이슨의 기록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18살이라는 나이에 프로 데뷔했고, 5년간 총 37연승을 거두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20살이 되었을 때에는 전설적인 복서 무하마드 알리를 쓰러트린 트레버 버빅과의 경기에서 2라운드 KO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겁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재능과 실력 그리고 경기 운영 능력이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탁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타이슨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첫 패배를 경험하게 되는데, 1990년 2월 11일 무명의 복서 제임스 더글라스와의 경기에서 첫 KO 패배를 당한겁니다. 이 경기는 모든 전문가들이 타이슨의 승리를 예상할 정도로 변수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경기였기에 타이슨의 패배는 여러모로 굉장히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렇게 경기에서 패배한 직후 타이슨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내가 무적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타이슨을 무너트린 것은 상대 선수가 아니라 자신은 절대 질 수 없다고 생각한 ‘자기 확신’의 결과물이었다는 겁니다. 어린 나이의 거둔 성공과 그로인해 찾아 온 자기 확신과 교만은 끝내 본인 스스로를 무너트리는 수단이 된 셈입니다.
물론 인생을 살아내면서 자기 확신은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이 됩니다. 확신을 가지고 일을 할 때 책임감이 따르기도 하고, 일의 추진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나친 자기 확신은 오히려 본인 스스로를 무너트릴 수 있는 요소가 될 수도 있음을 타이슨은 간과한 것이지요.
지나친 자기 확신의 좋지 못한 결말은 우리 일상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건강하기 때문에 조금 느슨하게 살아도 괜찮아!” 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했지만, 결국 운동부족과 제때 끼니를 해결하지 않아 몸에 이상 신호가 생길 수도 있는 겁니다. 또 “나는 운전을 잘해서 사고나지 않아!” 라고 확신을 가지고 운전대를 잡을 수 있겠지만, 운전 중 휴대폰을 본다거나 혹은 방심하고 과속하게 된다면 끝내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게 될 겁니다.
오늘 본문 속 제자들 역시 교만과 지나친 자기 확신에 의해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상황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시작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즉시’ 배에 태워 보내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평소 사역에서 서두르시는 모습을 발견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에 여러가지 예시를 들어볼 수 있겠지만 그 중 몇 가지를 이야기해보자면, 먼저 마가복음 1장에서 나병환자를 고치셨을 때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하지만 나병환자는 곧장 마을에 들어가 자신이 치유받았음을 온 마을에 소문 내었고, 그 결과 예수님은 끝내 그 마을에 진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마저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아쉬워하시거나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마저도 보는 이들은 애가 타지만 예수님은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이틀이라는 시간을 더 지연시키셨지요.
이 외에도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듯 예수님은 사역에 있어서 서두르기보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속 예수님은 평소 모습과 다릅니다. 즉시 제자들을 배에 태워 보내고 계신 겁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평소답지 않게 제자들을 즉시 배에 태워 보내셔야만 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제자들의 ‘교만’ 때문 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직전의 상황은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남자만 오 천명, 실제로는 그 이상의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자 요한복음 6장에 사람들이 이렇게 외치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분이 세상에 오실 예언자 이시다! 이 분을 우리의 왕으로 모셔 갑시다!”
우리는 잘 알다시피 예수님은 특정 민족의 왕이 아니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피해 자리를 일어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마치 오병이어 사건의 핵심인물이 된 것 마냥 자신이 본 것과 경험한 것을 자랑하고 싶었을 겁니다. 심지어 수많은 군중들이 환호하니 그 심보는 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내면의 교만을 보시고 즉시 배에 태워 보내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벳새다(막6:45)’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떠나보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벳새다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뱃머리를 돌립니다. 바로 ‘가버나움(요6:17)’ 이었습니다. 왜 제자들은 벳새다가 아닌 가버나움으로 향했던 걸까요? 이는 가버나움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할 때 이유를 발견해볼 수 있을겁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최초의 이적은 물이 포도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행한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가버나움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자랑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들의 바램과는 다르게 가버나움에서 머무는 시간은 매우 짧았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도 “가버나움에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라고 기록했을 정도로 말입니다.
여하튼 가버나움은 믿었던 믿지 않았던 이미 예수님의 이적을 한 번쯤 들어보았던 사람들이 머무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 입장에서는 자신이 보았고 경험했고 참여했던 이번 사건을 다시 한 번 더 가버나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을 겁니다.
누군가는 가버나움을 향한 것이 우연의 일치였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벳새다와 가버나움은 학자들마다 의견은 상이하긴 하지만 평균 13-15km 정도 꽤 떨어져 있으며, 무엇보다 평생을 배 위에서 보냈던 제자들에게 가버나움을 향한 것이 우연이고 실수라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던 중 이들은 큰 바람과 파도를 만나게 됩니다. 아마도 이들은 처음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미 배 위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던 베테랑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정도 풍랑쯤이야’ 콧방귀를 뀌며 벗어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 그들 안에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들은 끝내 풍랑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밤 사경’ 즉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가 되어서도 그들은 배 위에 있었습니다. 끝내 교만과 자기 확신에 떠났던 여정은 두려움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은 풍랑 앞에 서있을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게 교만의 결말이든, 지나친 자기 확신의 결말이든. 어떠하든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풍랑을 피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지요.
정보의 시대라 불리는만큼 아는 것도 많아졌고 정보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오늘이지만,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질병이라던가 취업의 문제 혹은 양육의 문제 등 다양하게 찾아오는 풍랑 앞에 우리는 손 쓸 도리 없이 무차별하게 당하곤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자라 고백할지라도 풍랑은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에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그 순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느껴지는 그 두려움 앞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내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배 위에 놓여진건 예수님의 재촉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이 스스로 배 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즉시 제자들을 재촉할 정도로 급히 움직이셨던 예수님께서 막상 풍랑이 이들을 뒤덮을 때에는 서두르지도 않으셨다는거지요.
결국 이들이 놓인 상황과 이들이 마주한 풍랑은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겁니다. 왜요? 이들이 예수님을 바로 알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풍랑 마저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분으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새벽이 되어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중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물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요? 풍랑마저 다스릴 수 있는 분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보자 ‘유령’이라 소리친 겁니다.
여러분, 이들이 느낀 두려움은 ‘예수님이 자리에 안계셔서’ 생기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눈 앞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해서’ 찾아온 두려움 인겁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이 안계신다고 생각하진 않죠. 하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예수님을 너무나 잘 알지만 삶을 다스리시는 주권자로 생각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 제자들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주고 싶으셨습니다. “나는 그저 너희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선생 정도가 아니란다. 나는 너희의 창조주 하나님이란다. 너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폭풍도 내가 주관한단다.” 이 사실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겁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폭풍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보고도 알지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역시 그런 상황 가운데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폭풍보다 폭풍 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거친 파도가 몰아쳐 두려움이 찾아올 때 우리는 예수님을 앎과 동시에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제자들은 여전히 폭풍 가운데 놓여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등장하시거든 이들이 원했던 것은 어쩌면 폭풍이 멈추는 것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시는지 폭풍을 멈추시기보단 “안심하라” 라고 말씀하고 계시지요.
지금 당장 우리가 폭풍 한 가운데 놓여져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누군가 다가와 “안심하라” 라고 말을 건낸다면 과연 정말 안심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우리가 안심할 수 있도록 말을 덧붙여 건내주십니다. “나니” 라고 말입니다.
“나니”라는 말에 안심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임재가 평안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다윗 역시 그랬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을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라고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 비록 내 상황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을지라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두렵지 않을 수 있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니” 라 말씀하시며 두려워하지 않도록 인도해 내셨습니다. 상황이 바뀐게 아닙니다. 여전히 상황은 폭풍 가운데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거친 파도가 몰아쳐 올 때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너무 두려워서인지 혹은 정말 앞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여전히 의심을 가지고 묻습니다.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여전히 베드로는 의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물었지만,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향해 “오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어떻게 합니까? 물 위를 걸었습니다. 너무나 대단하죠.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믿음을 칭찬할 것이 아니라, 물 위로 걷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의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이 베드로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곧 다시 물에 빠집니다. 왜 베드로는 물에 빠진겁니까?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베드로가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바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을 계산했어요. 베드로가 물에 빠진건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베드로의 믿음이 형편 없어서가 아니라, 그 순간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 환경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죠. 예수님을 믿는다 수도 없이 고백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시선은 상황을 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열심히 기도했으니 원하는 결과가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이만큼 헌신했으니 주께서 우리 가정에 부유함을 허락하셔 주시옵소서.” 예수를 수단 삼아 내게 주어진 환경만이 바뀌길 기대하는 것이 우리 아닙니까?
그렇게 수단삼아 예수님을 의지하는 척하는 자들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분노하고, 여전히 부유하지 않은 현실에 원망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왜 그런 반응이 나옵니까? 예수님보다 상황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래요.
여전히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한다해도 우리의 환경이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너무나 큽니다. 예수님께서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신다 해도 여전히 상황은 폭풍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한 발자국 내딛고도 또 물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는 베드로의 다음 행동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이것이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믿음은 흔들릴 때 누구를 찾느냐의 문제입니다. 베드로는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즉시(마14:31)’ 손을 내밀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베드로를 붙드신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믿음의 크기가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친 파도가 몰아칠 때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두려워할 수도 있고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을 의지하는 자를 예수님은 절대 버리지 않으십니다.
7월 18일부터 19일까지 초등부는 ‘믿음의 항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름성경학교를 진행합니다. 이번 성경학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세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아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겁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 성경학교를 통해서 끝내 제자들이 고백했듯 우리 아이들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항해를 펼칠 수 있도록 우리 성도님들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님들의 삶에서 거친 풍랑을 마주할지라도 상황을 해석하기보다 모든 상황 위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함으로 믿음의 항해를 펼쳐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결단찬양 및 기도]
1. 주 품에 + 나의 하나님(후렴)
- 우리의 삶에 풍랑이 없길 원하지만 현실은 풍랑만이 가득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가정에서의 문제, 회사에서의 문제, 관계에서의 문제, 양육에서의 문제 등 왜이리 거친 풍랑들이 자주 찾아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 그런 순간들이 우리 앞을 마주할 때 더 이상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기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비록 넘어질지라도, 비록 두려움이 내 마음을 흔들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우리 되게 하소서. 주님으로 충분한, 주님으로 충만한 우리 되게 하소서.
- 이 시간 기도하실 때, 이 땅의 복음과 회복을 위해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오늘 다음세대 전 부서가 함께 학교 앞 전도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너무나 삭막했습니다. 접촉하면 안되고 그저 전도지를 나눠주며 인사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 시간 기도하실 때, 삭막하고 우리의 연약함이 늘 드러나는 매일이겠지만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라는 믿음의 고백이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소망이 되게 하시고, 이 땅에 복음이 심겨지게 하시며, 이 땅이 회복되어짐으로 말미암아 온 백성이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이 땅 되게 하소서.
2. 물 위를 걷는 자
- 초등부 여름성경학교를 위해서 기도해주셨으면 합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 아이들에게 거친 풍랑이 일 때마다 부모의 신앙이 보호막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간 기도하실 때, 주님은 부모님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시고, 주님이 내게 오라하시니 바라옵기로는 우리 아이들이 나의 믿음을 가지고 거친 풍랑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의지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 되게 하소서. 그렇게 주님과 함께 반석 위를 걸어가는 우리 초등부 친구들 되게 하소서.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