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늪에서 언약적 사랑을 만나다_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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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6년 5월 20일(수)
제목 및 본문 : 상실의 늪에서 언약적 사랑을 만나다(삼하 9:1-13)
결단 : 베드로의 고백
혹시 성도님들은 ‘상실 정체성’이란 표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상실 정체성이란 심리학적 용어인대요, ‘상실이 반복되면 사람은 상실 자체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여기게 된다.’ 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날 우리는 잃을 것이 참 많은, 즉 상실할만한 것들이 참 많은 시대를 살아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어느 한 청년복지사업에 종사하는 복지사는, ‘하루도 빠짐없이 청년들의 어려움을 마주하고 있는데, 그 어려움의 대부분의 이유가 ‘상실’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라고 이야기 하더라구요.
그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들이 마주하는 상실은요, 특별한 것들이 아닙니다. 실패하면 안되는 사회로써의 압박, 경쟁사회로부터 찾아오는 심리적 두려움, 길어져 가는 취업 준비 시간을 통해 생기는 자존감의 하락 등 어쩌면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상실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상실들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상실 정체성’의 정의처럼 자신이 마주한 현 시점을 마치 자신의 본 모습인 것처럼 수용한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들이 너무나 많다는 겁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상실로부터 어려움을 겪던 청년들이 이전에는 고립은둔의 형태를 취해서, 고립으로부터 꺼내주면 그만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노숙을 하고 있거나 노숙 위기에 놓인 형태를 취하고 있어서 단순히 꺼내주는 것을 넘어 우선 살려야 하는 상황 가운데 놓였다는 겁니다.
이처럼 상실은 단순히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정도가 아니라, 상실은 한 사람의 인생을 무자비하게 무너뜨릴 수 있을만큼 충분히 위협적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 속 므비보셋 역시 상실을 경험합니다. 어떤 상실을 경험합니까? 부모를 잃었고, 삶의 터전을 잃었고,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적으로도 분노와 원망이 가득한 상태가 됩니다. 다시 말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모든 영역에 있어 상실을 경험합니다.
그의 과거는 상실과 거리가 멉니다. 우선 그의 출생부터 보면, 그의 할아버지는 사울 왕이고 아버지는 그의 아들 요나단 입니다. 다시 말해, 므비보셋의 출신은 왕족이라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환경과 나이 입니다. 그는 다섯살까지 왕궁에서 지냈습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었고 또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만 받으며 자라갔을 나이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전쟁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잃습니다. 그 소식이 왕궁에 들리자 므비보셋은 유모와 함께 행복의 터전을 뒤로한 채 도망칩니다.
설상가상이라고 도망치던 중 유모가 므비보셋을 떨어트리게 됩니다. 이 사건을 통해 므비보셋은 다리를 절게 됩니다.
여러분, 이 모든 것을 경험한 므비보셋의 나이는 고작 다섯살 입니다. 가장 많이 사랑 받아야 할 때였고, 또래 아이들과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며 히죽히죽 웃는 것이 가장 행복했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나이에 할아버지를 잃었고, 아버지를 잃었으며, 다리마저 절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신분은 왕족이 아닙니다. 도망자 입니다. 이제 그의 두 발은 자유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절름발이 일 뿐입니다. 다섯살, 인생의 상실을 경험한 그는 마치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듯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 로드발에 거주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므비보셋이 마주한 이 모든 것들이 차마 다섯살 아이로부터 ‘잘 감당해봐’ 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무거운 상황들입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이 마주한 상실들을 쭉 보면 결코 ‘므비보셋 이라서 일어난 일들’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가족의 죽음, 건강의 악화, 두려움에 쫓기는 상황 등 사실 우리 역시 언제든 경험할 수 있는 상실의 요소들 아닙니까?
저는 학창시절 체육교육과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다 고3이 되었을 때 몸에 열이 오르면 좁쌀처럼 두드러기가 온 몸에 올라오는, 불치병 중 하나인 ‘콜린성 두드러기’라는 피부병에 걸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능 이후 운동하다 팔에 금이가 끝내 실기를 볼 수 없었습니다. 3년을 준비했던 저에게 그 시간은 너무나 큰 상실의 시간이었습니다.
이처럼 상실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시간들 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 자리 가운데 계신 성도님들 중에는 이미 상실의 늪을 건너고 계신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이 상실의 늪을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한참의 시간이 흘러 므비보셋이 성인이 되었을 때, 낯선 사람 하나가 그를 찾아옵니다. 그리곤 이야기 합니다. ‘다윗 왕이 당신을 찾습니다.’
아마도 므비보셋은 그 말을 듣자 그 자리에서 온 몸이 굳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족이 죽임을 당함도, 또 자기가 절름발이가 된 것도 다 다윗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분명 매우 컸을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을겁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제 왕입니다. 모든 권력을 지닌 자였기 때문에 므비보셋 입장에선 가급적 마주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특히 다윗 입장에서 므비보셋은 이전 왕족의 남겨진 계보였기에, 므비보셋 입장에선 ‘언제든 날 찾아 죽이겠구나.’ 생각하며 살아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주한 현실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여력이 없습니다. 이미 눈 앞에 자기를 데려갈 신하가 와 있었기에 그저 그 신하 손에 이끌려 다윗 왕 앞에 이끌려 갈 뿐입니다.
점점 왕궁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므비보셋의 공포감과 두려움은 더 커져만 갔을 겁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왕궁은 행복의 공간이 아니라 어린 날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상실의 공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라가면서 품어왔던 상실에 따른 분노와 원망이 공포감과 두려움이 커져감에 있어 한 몫 했을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그렇게 므비보셋은 다윗 왕 앞에 섰습니다. 마치 서두에 소개한 생사를 포기한 청년들처럼, 므비보셋 역시 자신의 삶을 포기한 것처럼 다윗 왕에겐 보여졌나봅니다. 그러자 다윗 왕이 므비보셋을 향해 말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므비보셋 입장에선 너무나 의외의 말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므비보셋이 이 말을 듣는다 해서 자신의 두려움이 극적으로 사라졌을까요? 결코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흔히 느와르 영화를 보면 나쁜 사람들이 인질을 잡아두고 종종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너무 무서워하지 마~ 우리 그렇게 나쁜 사람들 아니야~” 여러분, 지금 나쁜 사람들에게 붙잡혀 왔고, 내 눈 앞에 흉기를 든 이들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데, 어느 누가 그 말을 들으며 ‘아~ 저 사람들은 무서운 사람들이 아니구나~ 내가 무서워 할 이유가 없구나?’ 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므비보셋 입장에선 다윗 왕의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이 그렇게 와닿지 않았을 겁니다. 여전히 무서웠을 거구요, 여전히 두려웠을 겁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이 어떤 말을 합니까? ‘죽은 개 같은 나를 왜 돌아보십니까?’ 라고 묻습니다.
므비보셋은 자신의 형편없음을 어필합니다. 그저 길 가에 죽은 개처럼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그런 존재가 바로 자신이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다윗 왕에게 살려달라 말하는거에요.
그러자 다윗 왕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7절에 기록된 것처럼 그에게 땅을 돌려줍니다. 또 왕의 식탁에 둘러 앉아 함께 식사할 수 있도록 합니다. 즉 한순간에 그의 상황이 회복되어져 버린 것이죠.
도대체 다윗은 왜 그런 행동을 한 걸까요? 왜 굳이 상실의 늪에 빠진 므비보셋의 인생을 회복시켜준 걸까요? 그것은 바로 ‘은총’이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이들은 언약을 맺었습니다. 사무엘상 20장 42절 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어떤 언약입니까? 서로의 자손을 지켜줄 것을 하나님 앞에 맹새한겁니다. 다시 말해, 므비보셋은 몰랐지만, 지난 날 아버지 요나단이 다윗 왕과 함께 맺었던 언약이 비로소 지금 이 순간 이루어진 겁니다. 그때의 언약이 지금의 자신을 살린거란 말입니다.
여러분 언약은 그런 겁니다. 그때와 지금, 다윗의 입장도 상황도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변함없이 그때의 약속을 지켜내는 겁니다. 다윗은 요나단과 계약을 한게 아니에요. 언약을 맺은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상실의 늪에 빠져 살아내고 있던 므비보셋을 향해 은총을, 헤세드의 사랑을, 언약적 사랑을 베풀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여러분, 그 언약적 사랑을 받았다 해서 므비보셋의 삶이 극적으로 바뀐 것이 아닙니다. 13절은 여전히 그가 두 발을 절고 있다 말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요? 언약적 사랑으로 말미암아 상실의 늪에 있던 므비보셋은 건져냄을 받았으니까요.
여러분, 언약적 사랑의 대표적인 사건이 무엇입니까? 우린 너무나 잘 알죠.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어떻게 하셨어요? 자신의 단 하나뿐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시잖아요. 왜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더 이상 그 상실에 빠져 괴로워하지 말라고, 그 상실의 늪에 빠져있을 때 이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그게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알려주시기 위함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여전히 절망 가운데 놓여있고 상실 가운데 좌절 할지라도 이를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너는 왜 그 정도 고난도 못이겨 내냐고. 너는 왜 겨우 그 정도 가지고 상실하냐고.’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세요.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더 깊은 사랑의 현장으로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수제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베드로’라 대답할 정도로 베드로는 예수님 곁을 지켰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 앞에 그가 어떻게 행동합니까? ‘나는 저 사람을 모릅니다.’ 라며 완벽한 배신을 보이죠.
예수님 역시 배신감과 상실감이 꽤 크셨겠지만, 베드로 역시 3년을 함께 한 예수님을 자신의 손짓과 입술로 배신했다는 사실에 굉장히 큰 상실감에 빠졌을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다시 베드로를 찾아가십니다. 그리곤 묻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에 베드로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네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노진준 목사님은 이 대목을 단순히 ‘너 나 얼마나 사랑하니?’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니?’를 묻는거라 말합니다. 베드로는 ‘다 떠나도 저는 주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라며 호언장담했지만 끝내 ‘나는 저 사람을 모릅니다.’ 라며 배신합니다.
그런 베드로를 다시 찾아가 묻는 예수님의 질문은 단순히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라, ‘비록 너가 나의 마음을 아프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널 사랑한단다.’ 그렇게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사랑의 현장으로 초대하고 계신 겁니다.
맥스 루케이도 역시 이 장면을 바라보며 “당신은 넘어졌을지는 몰라도 아웃당한 것은 아니다. 혼자라고 느끼겠지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계속해서 찾으시며 그에게 임무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은 상황과 환경에 따라 변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단순히 내 필요를 채우거나 내 질병을 고치는 혹은 내가 배신했을 때 같이 저버리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품어 주시는 그런 사랑’이라는 거에요.
그리고 그 사랑에는 힘이 있어요. 다윗이 므비보셋을 품을 수 있었던 것, 하나님이 날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 아닙니까? 비록 배신과 절망 가운데 살아내고 있지만 다시 주님을 사랑한다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므비보셋 처럼 상실의 늪에 빠져 원망과 분노로 가득 찬 삶을 살아내고 계십니까? 혹은 지금 당장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져 혼자 그 길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외로움을 느끼고 계십니까? 또는 하나님이 날 이토록 사랑하시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나는 이렇게 힘들어야 합니까 라는 생각에 마음 아파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순간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십시오.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의 언약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한 언약을 깨트리신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를 향한 언약, 반드시 이루십니다.
[결단찬양 및 기도]
1. 베드로의 고백 V-Cx2
- 신앙 생활의 시간이 쌓여져 갈수록 아는 것은 많아지고 이에 머리도 점점 커져만 가지만, 때론 본질을 잃어 버릴 때가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분명 하나님이 날 도우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있는 우리지만, 막상 그런 순간이 찾아올 때 ‘도대체 왜 나를 이렇게까지 힘들게 하십니까?’ 원망하고 분노하는게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이 시간 기도하실 때, 주님, 부디 그런 순간 중에도 날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도 변치 않는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붙들고 한 번 더 그 순간을 이겨내는 우리 되게 하소서. 주님의 변치 않는 사랑으로 내게 주어진 상실의 늪을 벗어나게 하소서.
- 이 시간 기도하실 때, 므비보셋처럼 상실에 상실이 더해져 절망 가운데 있는 이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길 소망합니다. 세상은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상실한 자들을 향해 ‘고작 그것도 견뎌내지 못하냐며’ 책망합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세상이 말하는 해결책이 아닌,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의 변치않는 사랑’입니다. 이 시간 기도하실 때, 주님, 우리 주변에 상실의 늪에 빠져 절망 가운데 있는 므비보셋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마주하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상실의 늪에서 빠져나올 힘을 얻게 하시고, 견디게 하시고, 새 삶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2. 베드로의 고백 C-B123-Cx2
- 최근 통계에 따르면 75%가 교회를 신뢰하지 않고, 목사를 신뢰하지 않고, 성도를 신뢰하지 않는다 말합니다. 어쩌면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만, 이를 형식적으로만 실천해온 결과는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간 기도하실 때,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말씀에 ‘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담대히 고백할 수 있는 이어진교회 되게 하소서. 그렇게 교회 안에 언약적 사랑이 차고 넘쳐 부흥하기 시작할 때, 그 사랑이 세상으로 흘러가 복음이 능히 선포 되게 하소서.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