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한마디, 존재가 시작되다_수요

창세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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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6년 7월 29일(수)
제목 및 본문 : 말씀 한마디, 존재가 시작되다(창 1:1, 시 139:14)
결단 : 주 여호와는 광대하시도다, 예수 이름 높이세
보통 열이 나거나 혹은 근육통이 온다면, 흔히 우리는 ‘아스피린’ 성분의 약품을 복용할 겁니다. 그런데 이 아스피린 이라는 성분이 과거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혹시 아십니까?
아스피린이 최초로 발견된건 기원전 4-5세기때 일 입니다. 옛 사람들은 버드나무 껍질을 먹을 때 열과 통증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를 삶아 먹었는지 혹은 껍질째 씹어 먹었는지 복용 방법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어쨌든 해열과 진통에 버드나무 껍질이 사용되었다는 고대 문헌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세기 말, 독일의 제약회사 ‘바이엘’을 통해 오늘 날 우리가 아는 아스피린 형태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버드나무 껍질에는 ‘아스피린’이 들어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버드나무 껍질에는 효과는 동일했지만 대신 속이 쓰린 ‘살리신’이라는 성분이 들어있었고, 바이엘사는 이를 발전시켜 오늘 날의 아스피린을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아스피린을 개발한 바이엘사 연구진들이 참 대단하게만 느껴지기도 하고, 뿐만 아니라 기원전 4-5세기 옛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저 수많은 나무 중 버드나무에 그런 효능이 있음을 알게 되었는지, 또 효능을 알기 위해선 고열이 있거나 통증이 있어야 했는데 어쩌다 그런 사람이 버드나무 껍질을 먹게 되었는지 참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 버드나무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또 버드나무 안에 ‘살리신’이라는 성분이 없없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는 버드나무를 만들었어야 했고, 그 안에는 살리신 이라는 성분을 넣어두어야 했다는 겁니다.
그런 시각에서 창세기 1장 1절을 보니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은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다거나 또는 증명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계셨음을 선포하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위대함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거나 발전시키는데 있지만, 하나님의 위대함은 존재하지 않던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데 있다는 겁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10주간 “하나님의 이름은” 책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만나게 될 하나님의 이름은 바로 말씀 한마디로 존재를 시작하게 하셨던 하나님, ‘엘로힘’ 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반복되는 표현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리고 “그대로 되니라” 입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 빛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라고 단호하고 명확하게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곤 하나님이 선포하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즉 말씀 한마디로 빛이란 존재를 만들어 내신 겁니다.
빛 뿐만이 아닙니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 날에도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비밀을 관찰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데, 심지어는 아직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어쩌면 영원히 볼 수 없는 우주의 구석 구석까지도 하나님은 말 한마디로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상호 조화를 이루며 흘러갑니다. 이것이 바로 엘로힘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엘로힘에겐 단순히 뛰어난 능력이 있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하나님께서 일곱째날 안식하셨다는 이야기를 능력의 한계치에 부딪혀 쉼을 누리신거라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엘로힘은 단순히 능력이 좋아서 뭐든지 창조할 수 있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넘어 혼돈 속에서 질서를 세우셨고, 허무 속에서 생명을 불러 일으키셨습니다. 안식 역시 하나님의 설계 중 한 조각에 불과할 뿐이지 그저 능력의 한계치라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표현은 인간의 짧은 지혜로써 그것 외에 더 이상 표현할 방법이 없어 그리할 뿐이지, 하나님의 능력이 제한이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닌겁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은 단순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능력을 나타내시는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말씀 하나로도 세상을 창조하셨고 다스리시며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엔 영원성이 있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라는 선언은 오늘 날 우리에게도 현재형으로 작동하는 능력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곱씹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더욱 형용할 수 없는 능력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과는 반대로 너무나도 작은 변화에 쉽게 흔들리곤 합니다. 관계의 어려움이 찾아오면 인생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불안함을 느끼게 되고, 경제의 어려움이 찾아오면 마치 하나님이 나를 잊어버리신 것만 같은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며, 우리의 기도가 오랜 시간 응답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풀무불 가운데로 던져넣으시곤 버리신 것만 같은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왜 그런겁니까?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점점 작아졌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시야가 좁아졌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찾아오면 엘로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문제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가 점점 커져가고 반대로 하나님을 점점 작게만 느끼게 된다는 거지요.
여러분, 고난이 올 때 작아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의 시선이 고난에 붙잡혀 있어서 그런겁니다.
성경에 수많은 이들을 떠올려 봅시다. 다윗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했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얼마든지 순종하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난 앞에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통곡하며 외쳤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850명의 우상숭배자들을 이겼습니다. 그러나 이세벨이 곧장 죽이려 하자 도망을 갔고,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 이제 그만 죽여주십시오.” 절망의 소리를 내었습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직접 주었던 요한 마저도 옥에 갇히자 예수님을 의심했습니다.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여러분 고난이 찾아오면 그 아무리 대단한 믿음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입니다. 다윗도 그랬고,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주었던 요한 마저 믿음의 시선이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그런 고난 속에 두려움이 없었던 사람이 아니라 그런 두려움 중에도 다시 하나님께 시선을 돌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냐’며 통곡했지만, 여전히 그의 시선은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나를 죽여달라’ 절망했지만, 여전히 새미한 음성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두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환경이 자신을 억압하자 예수님을 의심했지만, 여전히 그는 하나님께 시선을 두어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고난 앞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믿음의 시선을 엘로힘 하나님께 둘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 한마디로 온 세상을 통지하시는 주님께 시선을 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자복하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해도,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질병 가운데 신음할 수도 있고, 여전히 관계의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으며, 오랫동안 기다려온 기도 응답이 여전히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때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길을 열어주시기도하지만 반드시 우리의 기대대로 현실을 바꾸어 주시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창조주 하나님, 엘로힘을 바라본다는 것은 반드시 내 환경이 바뀌어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변하지 않는 현실일지라도 ‘내가 누구인지’를 다시 발견하게 되는 시간이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발견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두 가지를 하나님으로부터 허락 받게 되는데, 창세기 1장 28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먼저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여기서 복은 단순히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생명을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살아가게 하시며 열매 맺게 하신다’는 약속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에 고난이 사라지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셨고, 나를 아시며,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복인겁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시편 139편 14절은 다윗의 인생이 언제나 평탄했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인생에는 도망과 배신, 전쟁과 눈물이 너무도 깊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이 자신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과 언제 어디서도 자신을 떠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에 감사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 현실이 변하지 않아도 우리가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또 기도가 응답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알고 계시다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비록 어둠 가운데 놓여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그 어둠은 더이상 두렵지만은 않게 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엘로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라는 사실을, 또 엘로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복인 줄 믿으셔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복을 허락하신 후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어떤 사명입니까?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땅을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이번 건만 잘 해결되면 그 뒤에 제가 하나님을 위해 섬기겠습니다. 하나님, 이 문제가 해결되면 그때 누군가를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명은 고난이 비로소 끝난 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명은 지금 바로 이 순간, 우리의 완전하지 않은 형편 속에서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우리 육신에 가시가 있다해서, 우리 인생에 실패의 그림자가 휘몰아쳤다 해서 우리의 사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엘로힘 하나님께서 혼돈 가운데 질서를 세우셨듯, 우리도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관계 속에서 허락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전했단 이유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갇혔다 해서 복음 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옥 중에도 복음을 선포했고,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라고 증언했습니다.
또 요셉 역시 총리가 되어서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 것이 아닙니다. 형들에게 버림을 받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그는 주변을 살폈습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분노로 해소하지 않고 근심스러운 얼굴을 한 두 관원을 향해 “어찌하여 당신들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한복판에서도 요셉을 사용하신 겁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내 삶에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해서 하나님의 사명이 멈추거나 취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론 내게 주어진 사명이 고난 가운데 다른 형태를 취할 수도 있는 것이고, 때론 고난의 장소로 옮겨져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명이 사용될 수도 있는 겁니다.
작년 둘째를 임신했던 그 시간은 제게 참 고난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제발 해결해 달라고” 더욱 엎드려 기도했지만 상황은 더 나빠져만 갔습니다. 기도했지만 상황은 해결되지 않았고, 울부짖었지만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순간 저희 부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시간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래서 저희는 그 시간을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 맺는 시간으로 사용했습니다. 더 기도했고 더 묵상했습니다.
현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고 제가 알 수 없는 것들은 여전히 많았습니다. 하지만 더이상 그 상황을 이전의 시선으로만 바라보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을 통해 모든 문제보다도 크신 하나님께 시선을 옮기게 하셨고, 한 영혼의 소중함을 더더욱 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이어진교회 모든 교역자들과 성도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어떤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셨고 지금도 나를 붙들고 계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그 붙드심을 믿으며 고난이 끝나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오늘 내게 맡겨진 삶을 살아가라는 부르심이 됩니다.
그러니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복을 얻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복을 받은 존재이기에 오늘도 사명을 살아낼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게 오늘도 우리를 창조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나아가시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이들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결단찬양 및 기도]
1. 주 여호와는 광대하시도다
- 우리의 삶에 비록 고난과 염려로 비록 우리의 시야가 좁아졌을지라도, 그래서 바뀌지 않는 현실에 낙담이 될지라도 더이상 문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엘로힘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게 하소서. 이 세상 어떤 문제보다도 광대하시고 우리의 실패보다 크시며 우리의 처음과 마지막을 붙드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기대하는 우리 되게 하소서.
-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붙들고 기도합시다. 이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울지라도 혼돈 가운데 질서를 세우게 하시고, 절망한 이들에게 소망을 전하는 우리 되게 하소서. 무엇보다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하게 하시어 이미 하나님께 받은 복을 흘려보낼 수 있는 복음의 통로로 사용되게 하소서.
2. 예수 이름 높이세
- 이번주 토요일과 주일, 유년부 여름성경학교가 있습니다. 혼돈과 혼란의 시대 속에서 여호수아의 믿음을 바로 알아가게 하소서. 그리고 그 믿음으로 부모의 고백이 아닌 나의 고백, 주 예수 이름을 높이는 귀한 유년부 아이들 그리고 여름성경학교 되게 하소서.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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