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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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태복음 14:22–33 “22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서,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23 무리를 헤쳐 보내신 뒤에,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이미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홀로 거기에 계셨다. 24 제자들이 탄 배는, 그 사이에 이미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풍랑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25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가셨다. 26 제자들이,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서 소리를 질렀다. 27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28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9 예수께서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30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31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32 그리고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다. 33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미국의 고전학자이자 작가인 다니엘 멘델슨은 오디세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대의 어떤 작품보다도,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말 걸기를 멈춘 적이 없다." 3천 년 전에 쓰인 이야기가, 왜 지금도 우리 마음에 말을 걸까요. 최근 개봉해 화제가 된 크리스토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가 국내에서도 개봉 2주차에 예매량이 오히려 늘며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저는 이 오래된 항해가 사실은 오늘 우리 각자의 항해와 정확히 겹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설교는 마태복음에서 폭풍우를 건너는 제자들의 이야기와 또다른 폭풍우를 지나는 오디세이의 이야기를 잘 연결해서 가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4장 갈릴리 호수 위의 배 안에 있던 제자들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또한 오딧세이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이 두 항해를 나란히 놓고, 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씩 짚어 보겠습니다.
1. 승리 후, 신의 환대를 저버리다 vs 성공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선택하신 예수님 (14:22-23)
1. 승리 후, 신의 환대를 저버리다 vs 성공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선택하신 예수님 (14:22-23)
오디세이는 승리로 시작합니다. 그 승리는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신의 규칙을 깨뜨리는 방법이었습니다. 첫 장면부터 계속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있는데 제우스의 법, 크세니아 입니다. 환대의 규율입니다. 손님을 만나면 변장한 신으로 여겨라는 것입니다. 신의 규율인 환대를 이용해서 승리를 합니다. 트로이목마가 바로 그 환대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이용해 철저히 짓밟아버립니다.
트로이 목마의 계략으로 십 년 전쟁을 끝낸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 성을 함락시킵니다. 그런데 호메로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완전한 승리의 순간에 그리스 병사들은 신들의 영역을 짓밟습니다. 신전에서까지 자행된 폭력은 신들의 진노를 삽니다. 오디세우스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눈을 멀게 하고 무사히 빠져나온 뒤, 그는 안전할 수 있었음에도 굳이 배 위에서 자신의 진짜 이름을 외쳐 밝힙니다. "나는 오디세우스다!" 이 자기 과시 한 마디 때문에 폴리페모스는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저주를 구하고, 그 저주가 오디세우스의 10년 표류를 결정짓습니다. 승리가 오만이 되는 순간, 그 승리는 이미 파멸의 씨앗을 품게 됩니다.
이제 본문으로 가 봅시다.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서…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무리를 헤쳐 보내신 뒤에,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14:22-23). 이 구절 바로 앞,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 승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중 가장 큰 대중적 성공이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 15절은 이 사건 직후 무리가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왕으로 삼으려 했다고 전합니다. 오디세우스가 승리 후 자신의 이름을 외쳐 자신을 과시했다면, 예수님은 승리 후 정반대로 하셨습니다.
여기서 헬라어 본문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재촉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아낭카조"(ἀναγκάζω)로, 단순히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 "강권하다, 강제하다"는 뜻을 지닌 강한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거의 밀어붙이듯 배에 태워 보내셨습니다. 왕으로 추대하려는 무리의 열기가 정치적 승리로 굳어지기 전에, 예수님은 스스로 그 흐름을 끊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권좌가 아니라 기도의 자리였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승리의 자리에서 신의 환대를 이용하고 자신을 과시함으로써 신의 노여움을 자초했습니다. 예수님은 승리의 자리에서 무리의 환호를 버리고 아버지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여기서 오늘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 나옵니다. 나는 무언가에 성공했을 때, 그 성공을 누구에게 의지합니까. 나 자신의 이름을 외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홀로 아버지 앞에 나아가고 있습니까.
2. 계속되는 폭풍우 - 폭풍우속에 계시는 예수님 (14:24-27)
2. 계속되는 폭풍우 - 폭풍우속에 계시는 예수님 (14:24-27)
트로이를 함락시킨 그리스 최고의 전략가, 완전한 승리를 거둔 오디세우스에게 남은 것은 안전한 귀향이 아니라 10년에 걸친 표류였습니다. 폭풍, 외눈박이 거인,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족 과의 전투에서 배 여러 척을 잃습니다. 반복된 실패 앞에서 부하들조차 오디세우스의 지도력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완전한 승리가 안전한 귀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오디세이가 말하는 인생의 첫 번째 정직함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탄 배는, 그 사이에 이미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풍랑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14:24). 예수님이 산에서 기도하시는 그 시간, 제자들은 밤새 역풍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의 병행 본문은 이 밤이 사경(새벽 세 시에서 여섯 시) 내내 계속되었다고 전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한 바로 그 사람들이, 몇 시간 뒤 캄캄한 물 위에서 죽음의 공포와 씨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배를 타고 출발때 쯤에는 대단히 흥분해 하며 기적이야기로 정신없이 배를 몰고 갔을 것입니다. 그러다 감당할 수 없는 폭풍을 만납니다.
그런데 25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가셨다." 예수님은 폭풍을 먼저 잠재우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폭풍이 그친 뒤가 아니라, 폭풍의 한복판을 걸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은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27절)였습니다. 헬라어로 "나다"는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출애굽기 3:14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 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밝히신 그 이름과 맞닿은 표현입니다. 이것은 안부 인사가 아니라 신적 자기 계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욥의 이야기로 가봅니다. 욥기 9장 8절은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어느 누구에게 도움을 받지도 않고 하늘을 펼치시며, 바다 괴물의 등을 짓밟으신다."
시편 77편 19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의 길은 바다에도 있고, 주님의 길은 큰 바다에도 있지만, 아무도 주님의 발자취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43장 2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구약 전체에서 바다를 밟고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만의 영역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은, 단순한 기적 과시가 아니라 이 구약의 신현 언어가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배 안의 제자들이 훗날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고백하게 되는 신학적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열왕기상 19장에서도 같은 구조를 봅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완승을 거둔 엘리야는, 바로 다음 이세벨의 위협 앞에서 도망칩니다. 호렙산 동굴에 이른 그에게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9절) 그리고 이렇게 기록됩니다. "크고 강한 바람이 주님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 지진이 일었지만, 그 지진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가고 난 뒤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11-12절). 완전한 승리 뒤에도 광야는 찾아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광야가 사라진 자리가 아니라, 광야 한복판에서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로 찾아오십니다.
창세기 37장은 이 패턴에 한 겹을 더합니다. "형들은 아버지가 그를 자기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서 요셉을 미워하며, 그에게 말 한 마디도 다정스럽게 하는 법이 없었다"(4절). 하나님께 특별한 꿈을 받은 사람에게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축복이 아니라 형들의 냉대였습니다. 요셉의 광야, 엘리야의 동굴, 제자들의 폭풍, 오디세우스의 10년 표류 — 이 모두가 말하는 것은 같습니다. 트로이 목마의 승리 후에도 폭풍우는 계속됩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다만 성경이 다르게 말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오디세우스의 항해에는 그를 인도하는 신들의 변덕과 침묵이 있었지만, 제자들의 항해에는 폭풍 한복판을 직접 걸어오시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폭풍이 사라진 뒤가 아니라, 폭풍 속에 서 계십니다.
1세기 마태 공동체에게 이 본문은 실제적인 위로였습니다. 로마의 박해 아래서 재산을 빼앗기고 회당에서 쫓겨나던 성도들에게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는 말씀은 생명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폭풍은 다릅니다.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부터 밀어내는 바람은 박해가 아니라 오히려 풍요이고 맘몬이고 성공이고 명예이고 쾌락입니다. 형태는 완전히 바뀌었지만,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걷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결코 쉽지 않습니다.
3. 나를 흔드는 바람, 스스로 걷어차 버리는 안전 (14:28-31, 롬 10:5-17)
3. 나를 흔드는 바람, 스스로 걷어차 버리는 안전 (14:28-31, 롬 10:5-17)
오디세우스의 항해에는 두 개의 결정적인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는 로터스를 먹는 자들의 섬입니다. 그 열매를 먹은 부하들은 고향을 완전히 잊어버립니다.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달콤합니다. 로터스 꽃의 무서움은, 그것이 우리를 협박하지 않고 다만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를 잊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세이렌의 바다입니다. 원전에서 세이렌은 오디세우스에게 "모든 것을 알게 해주겠다"는 지식과 확신의 약속으로 유혹합니다. 오디세우스는 스스로 돛대에 몸을 묶고,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게 하여 그 바다를 통과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원전에 없는 장면 하나를 더합니다. 선원 하나가 스스로 귀의 밀랍을 뽑아버리고 바다로 뛰어드는 장면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께서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28-29절). 여기까지 베드로는 안전장치 없이 걸었습니다. 그런데 30절,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헬라어 본문에서 "보고"는 "블레폰"(βλέπων), 곧 시선을 돌려 주목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빠진 것은 바람이 갑자기 세져서가 아니라, 그가 예수님에게서 시선을 돌려 바람을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유일한 안전장치, 곧 예수님을 향한 시선을 걷어차 버렸습니다. 세이렌의 노래 앞에서 스스로 밀랍을 뽑아버린 그 선원처럼 말입니다.
로마서 10장이 이 원리를 정확하게 정리해 줍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10:17).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10:13). 세이렌은 지식과 확신을 약속했습니다. "너만 알면 된다, 너만 확실하면 된다"는 것이 그 노래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말하는 믿음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들음입니다. 나의 눈으로 확인하고 붙잡는 것이 아니라, 부르시는 음성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지는 그 순간에도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마디, "주님, 살려 주십시오"였습니다. 그리고 그 즉시 예수님의 손이 그를 붙잡았습니다(31절).
오늘 우리를 물속으로 끌어내리는 바람은 무엇입니까. 풍요, 맘몬, 성공, 명예, 쾌락 — 이것들은 우리를 협박하지 않습니다. 로터스 꽃처럼 달콤하게, 아주 천천히 우리가 어디를 향해 걷고 있었는지를 잊게 만들 뿐입니다. 그리고 세이렌의 노래처럼, "너만 성공하면 된다, 너만 확실하면 된다"는 약속의 목소리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 말씀에서, 기도에서, 공동체의 돌봄에서 귀를 막았던 밀랍을 뽑아버립니다. 아무도 우리를 강제로 물에 던지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안전핀을 걷어차 버릴 뿐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정직하게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믿음을 지키는 데 있어서, 나를 흔들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언제, 어떤 순간에 예수님에게서 시선을 돌려 바람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까. 나는 지금 말씀에서, 공동체의 돌봄에서, 어떤 밀랍을 뽑아버리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무엇을 쫓고 있는가.
결론:귀향, 그리고 정체성의 고백 (14:32-34)
결론:귀향, 그리고 정체성의 고백 (14:32-34)
오디세우스의 항해는 결국 이타카로 향합니다. 20년 만에 돌아온 그는 처음엔 거지의 모습으로 변장한 채 자신의 집에서조차 알아보는 이 없이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해 냅니다. 귀향은 단지 장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시 확인받는 사건이었습니다.
본문의 결론도 정확히 이 지점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32-33절). 그리고 34절, "그들은 바다를 건너가서, 게네사렛 땅에 이르렀다." 폭풍을 통과한 배는 마침내 뭍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의 진짜 귀향은 지리적 도착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마침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본 것, 그것이 진짜 귀향입니다.
오디세우스는 20년의 항해 끝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폭풍 한복판에서 이미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셨습니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우리의 귀향은 우리 자신을 증명하는 여정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를 향해 걸어오신 그분을 알아보는 여정입니다.
여러분의 배는 지금 어느 바다 위에 있습니까. 그 배를 흔드는 것이 로터스의 유혹이든, 세이렌의 노래이든 — 예수님은 이미 그 물 위를 걸어 여러분에게 오고 계십니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번 주, 나를 흔드는 바람이 무엇인지, 내가 스스로 뽑아버린 밀랍이 무엇인지 하나만 적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이름을 놓고 기도해 보십시오.
기도
기도
주님, 승리의 자리에서 자신을 과시하는 대신 홀로 아버지께 나아가셨던 주님을 봅니다. 저희는 자주 성공 앞에서 저희 자신의 이름을 외쳤고, 풍요와 쾌락이라는 로터스 꽃 앞에서 저희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를 잊었습니다. 저희 스스로 뽑아버린 밀랍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보게 하시고, 폭풍이 그친 뒤가 아니라 폭풍 한복판에서 걸어오시는 주님을 다시 보게 하소서. 그 손을 붙잡고,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하며 집으로 가는 이 길을 계속 걷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