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과 평안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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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편안과 평안의 차이
본문: 이사야 32:1–20
주제: 세상이 주는 편안은 조건에서 오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그리스도의 통치와 성령께서 이루시는 공의에서 온다.
[서론]
우리는 불안할수록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붙잡으려고 합니다.
전쟁의 소문이 들리고 경제가 흔들리면 사람들은 가장 안전하다고 여기는 자산으로 몰려듭니다.
금을 찾고, 달러를 찾고, 통장의 잔고를 채웁니다.
그것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으로 삶의 불안을 덮으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이나 사람으로 불안을 덮으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찰나의 쾌락으로 두려움을 잊으려고 합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위기가 찾아오면 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려고 하고, 더 힘센 나라와 동맹을 맺어 안전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위기는 한편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위기가 찾아오면 내가 진짜로 의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막상 삶이 흔들리면 무엇을 가장 먼저 붙잡는지를 보면 내 마음의 진짜 우상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원하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정말 평안해질 수 있을까요?
돈이 충분하면 평안할까요?
건강하면 평안할까요?
가정에 문제가 없으면 평안할까요?
미래가 완벽하게 보장되면 평안할까요?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세상이 주는 편안과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무엇이 다를까요?
[본론 1]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유다 역시 똑같습니다.
앗수르라는 거대한 제국이 파도처럼 밀려오자 유다는 하나님을 기다리기보다 이집트로 달려갔습니다.
눈에 보이는 말과 병거와 군대가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현실적인 선택처럼 보입니다.
작은 나라 유다가 당시 최강대국인 앗수르를 상대하려면 자신들보다 더 강한 나라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집트라는 든든한 동맹을 확보하면 조금은 안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안전하다고 느끼고 있을 때 이사야는 전혀 다른 진단을 내립니다.
9절부터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안일한 여인들아.”
“염려 없는 딸들아.”
그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밖으로는 이집트라는 보험이 있습니다.
안으로는 포도와 농산물이 풍성합니다.
성전에서 항상 예배드리니까 하나님이 지켜주신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말합니다.
그건 참된 평안이 아니라 영적 안일함이라는 것입니다.
왜 일까요?
3–8절입니다.
이 부분은 장차 의로운 왕이 통치할 때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지를 보여줍니다.
그 말은 역으로 당시의 현실이 얼마나 뒤틀려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특히 백성을 이끌어야 할 지도자들까지 사람들의 아픔을 보지 않았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의 신음 소리에 귀를 닫았습니다.
분별력이 흐려졌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사회의 가치 기준이 뒤집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말하지 아니하겠고 간교한 자를 다시 존귀한 자라 말하지 아니하리니.”
이 말은 당시에는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악한 사람인데 성공했다는 이유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탐욕스러운 사람인데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유로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합니다.
거짓과 술수로 자기 이익을 챙기고, 힘없는 사람을 짓밟는데도 처세에 밝은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며 자기 욕망을 좇는 사람이 존경받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는 사람이 오히려 존귀한 사람으로 대접받습니다.
사회의 도덕적 나침반이 고장 난 것입니다.
그런데도 눈앞에 먹을 것이 있고, 기댈 강대국이 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스스로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쓰나미가 밀려오고 있는데도, 바닷가에서 한가롭게 조개를 줍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외칩니다.
“가슴을 치라.”
머지않아 포도 수확이 그칠 것입니다.
밭에는 가시와 찔레가 자랄 것입니다.
즐거움이 가득했던 성읍도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올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을 망하게 하시려는게 아닙니다.
그들이 가진 거짓 평안을 깨뜨려야 비로소 자신의 영적 실상을 볼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삶의 고난도 그런 역할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학과 기술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AI와 로봇 기술은 우리의 삶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하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의학은 발달해 더 많은 수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이 편리해진 만큼 우리의 영혼도 평안해 졌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람이 불안과 우울, 외로움의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20,30대 자살, 40대 암-자살
왜 그럴까요?
우리가 편안함과 평안함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집이 있으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장 잔고가 넉넉하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건강하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마시는 순간에는 갈증이 조금 가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실수록 더 목이 마릅니다.
세상이 주는 좋은 것들은 우리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우리의 영혼을 평안하게 만들어줄 수 없습니다.
혹시 우리도 세상이 만든 거짓 평안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본론 2]
그렇다면 도대체 진짜 평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1절에 답이 있습니다.
"장차 한 왕이 나와서 공의로 통치하고, 통치자들이 공평으로 다스릴 것이다."
새로운 왕이 등장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을 안전하게 만들어 줄 더 강한 군대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답은 달랐습니다.
새로운 왕이 답입니다.
새로운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참된 평안은 단순히 외부 환경이 좋아지는 것으로 얻을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질서가 우리의 삶 가운데 세워질 때 얻을수 있습니다.
새로운 왕이 세우는 하나님의 질서가 바로 공의와 공평입니다.
먼저 ‘공의’는 히브리어로 체다카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관계가 올바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바로 서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바로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힘과 재물을 자기 욕망만을 채우는 데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힘 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을 짓밟지 않고, 한 사람의 존엄한 인간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미쉬파트, 공평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바르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부자라고 눈감아 주지 않습니다.
가난하다고 무시하지 않습니다.
힘센 사람의 말이라고 잘 들어주고, 힘없는 사람의 말이라고 외면하지 않습니다.
약한 사람의 정당한 권리가 보호받게 됩니다.
세상은 이렇게 말합니다.
“힘이 있어야 편안하다.”
“더 많이 가져야 편안하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평안할수는 없습니다.
오직 공의와 공평 안에서만 우리는 참된 평안을 얻을수 있습니다.
2절은 이러한 왕의 다스림이 어떤 것인지 네 가지 이미지로 보여줍니다.
첫째, 광풍과 폭우을 피하는 피난처입니다.
팔레스타인의 광야에서 거센 바람이나 폭우를 만나면 몸을 숨길 곳이 필요합니다.
그 왕이 피난처가 되어줍니다.
우리 삶에도 광풍과 폭우가 찾아옵니다.
그것이 질병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가정의 위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사업의 실패일 수도 있고, 관계의 아픔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때 그 분은 우리가 광풍과 폭우를 맞지 않도록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둘째, 마른 땅에 흐르는 시냇물입니다.
물이 귀한 광야에서 물은 생명입니다.
물이 흐르면 메마른 땅에서 다시 생명이 살아납니다.
그 분은 메마른 삶에 새 생명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셋째, 곤비한 땅의 큰 바위 그늘입니다.
뜨거운 사막을 걷다가 큰 바위를 만나면 그 아래에서 잠시 쉴 수 있습니다.
그 분이 주시는 쉼은 다시 걸을수 있는 힘이 됩니다.
[본론 3]
그렇다면 이런 의로운 왕은 과연 누구일까요?
이사야가 바라보았던 의로운 왕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힘으로 사람들을 압제하는 왕이 아니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어 우리를 살리신 왕이셨습니다.
사람들이 외면하던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지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의 피난처와 그늘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세상의 왕은 백성을 희생시켜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백성을 살리신 왕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통치 방식입니다.
그 왕의 통치를 받는 우리도 세상 속에서 그분의 방식대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피난처가 되어주고, 시냇물이 되어주고 바위 그늘이 되어줄수 있을까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된 욕망이 있습니다.
나부터 편안하게 살고 싶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피난처가 되기보다 누군가가 나의 피난처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예수님의 통치 방식을 살아내기 어렵습니다.
바로 그때 15절이 중요한 답을 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 높은 곳에서부터 다시 우리에게 영을 보내 주시면”
회복은 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내 의지로 되는게 아닙니다.
위에서 부어지는 하나님의 영으로 시작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광야가 아름다운 밭으로 변합니다.
황폐했던 땅에 다시 생명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공의와 공평이 세상에 자리 잡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17절입니다.
“의의 열매는 평화요, 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
우리는 편안해야 평안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모읍니다.
힘을 키웁니다.
사람을 붙잡습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성령이 임합니다.
공의가 세워집니다.
공의의 열매로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평안입니다.
세상은 힘이 있어야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와 공평이 있어야 평안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말하는 편안은 참된 평안이 아닙니다.
참된 평안은 오직 새 왕이신 예수님 밖에 줄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그래서 참된 평안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 평안을 맛본 우리가 누군가에게 피난처가 되게 하십니다.
누군가에게 생수가 되게 하십니다.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게 하십니다.
참된 평안을 누리는 사람이 결국 평안을 만드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의로운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멧돼지는 먹이를 찾을 때 땅에 코를 박고 흙을 계속 파헤칩니다.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찾기 위해 온통 아래만 바라봅니다.
우리의 삶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하루 종일 땅만 바라봅니다.
돈이 조금만 더 있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건강만 회복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좋은 집이 생기고, 좋은 직장을 얻고, 자녀가 잘되고, 관계가 풀리면 비로소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계속 땅을 파헤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의 시선을 위로 향하게 합니다.
15절입니다.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참된 평안은 땅에서 끌어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편안은 환경이 좋아질 때 찾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왕 되신 예수님을 신뢰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평안을 누리는 사람은 더 이상 자기만 평안을 누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누군가의 피난처가 되어 줍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건네 줍니다.
지친 사람에게 그늘이 되어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편안은 환경이 나를 힘들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평안은 환경이 흔들려도 왕 되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평안을 얻은 사람은 성령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난처와 생수와 그늘이 되어줍니다.
오늘도 세상이 주는 편안만을 좇으며 땅에 코를 박고 살아가겠습니까?
아니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겠습니까?
우리의 가정에, 교회에, 학교에, 직장에,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삶에
하나님의 평안을 심으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