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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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고] 끝없는 목마름의 끝
[설교 원고] 끝없는 목마름의 끝
본문: 요한복음 4:3-24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설교자: 남동욱 전도사
선포 시간: 약 40분 분량
서론: 인간, 끝없이 목마른 존재
19세기 세상을 뒤흔들었던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인간의 본질을 향해 매우 서늘하고도 뼈아픈 진단을 남겼습니다. 그는 그의 주저서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생은 욕망과 공허 사이를 마치 추처럼 왕복하는 시계추와 같다."
그의 말처럼 인간은 늘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며 그것을 채우기 위해 평생을 갈구합니다. 하지만 비극이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던 것을 얻는 순간 찾아오는 기쁨과 만족감은 아주 잠깐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그 만족이 지나가면 인간에게는 곧바로 더 큰 권태와 또 다른 목마름, 견딜 수 없는 공허가 찾아옵니다.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가지고 싶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더 높은 곳을 갈망하지만, 막상 그 정상에 서면 찾아오는 것은 깊은 허무함뿐입니다.
구약 성경 전도서 1장 2절에서 전도서의 저자 역시 인간 존재의 본질을 향해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여기서 반복되는 '헛되다, 허무하다'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가 바로 '헤벨(הֶבֶל)'입니다.
'헤벨'은 본래 '입김', '연기', '한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안개'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추운 겨울날 입안에서 피어오르다 이내 사라져 버리는 입김처럼, 손으로 움켜쥐려 해도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 버리는 연기처럼, 아무리 끌어모아도 마침내 비어버리는 인생의 허망함과 불확실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결국 인간은 죽을 때까지 손에 잡히지 않는 연기, 곧 '헤벨'과 같은 욕망의 굴레 속에서 휘둘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극적 존재라는 것이 세상과 인간 지혜의 결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바로 이러한 인생의 본질적인 결핍과 '헤벨'의 목마름을 온몸으로 껴안고,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내며 살아가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오늘 본문 6절과 7절을 보면, 이 여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무도 물을 기르러 오지 않는 뜨거운 정오, 유대 시간으로 제6시에 홀로 물동이를 메고 우물가를 찾았습니다. 중동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정오는 모든 사람이 활동을 멈추고 쉬는 시간입니다. 살을 찌르는 듯한 더위 때문에 동네 개조차 돌아다니지 않는 시간입니다. 당시 시대의 여인들은 통상 서늘한 아침이나 저녁에 무리를 지어 나와 물을 긷고 담소를 나누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여인은 아무도 나오지 않는 그 한낮의 뜨거운 볕을 뚫고 홀로 왔을까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수군거리는 소리, 따가운 눈총, 동정이나 비난의 눈빛을 피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깊은 환멸과 상처를 느꼈기에 가장 뜨겁고 외로운 시간을 선택해 우물가로 걸어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요?
1 페이지: 성경 속에 나타난 문제
하지만 이 외로운 우물가에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오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타들어 가는 햇볕 아래서 지친 몸으로 앉아 계셨지만, 사실은 한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주시기 위해 그 자리를 지키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앉아 계실 때 여인이 다가옵니다. 처음 여인이 예수님을 바라보던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시 역사적 배경을 보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혼혈 민족'이라 부르며 개처럼 취급했고 혐오했습니다.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당시 문화에서 낯선 남자가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인은 속으로 '또 나를 무시하겠지, 유대인이 나를 보면 침을 뱉겠지' 생각하며 고개를 휙 돌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차가운 침묵을 먼저 깨뜨리십니다. 본문 7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여인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불쾌하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퉁명스럽고 날이 선 말투로 대꾸합니다. 9절입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이 대답 속에는 여인이 평생 동안 세상으로부터 받아온 상처와 거절감이 고스란히 묻어있습니다. 세상은 늘 그녀를 거절했고, 선을 그었으며, 비난했습니다. 그녀의 경계심은 높디높은 성벽과 같았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날카로운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날 선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자격 없는 여인의 경계를 허무시며 대화의 차원을 완전히 바꾸어 버리십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그리고 이어서 13절과 14절에서 욕망과 공허의 굴레를 깨뜨리는 위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말씀을 들은 여인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15절을 보면 여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인은 아직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수'가 무엇인지 영적으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눈앞의 물질적이고 1차원적인 한계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저 매일 이 뜨거운 햇볕 아래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물 길으러 오는 이 지긋지긋한 노동과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애원한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갑자기 대화의 흐름을 완전히 깨뜨리는 충격적인 요구를 하십니다. 16절입니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숨기고 싶었던 가장 깊은 치부, 인생의 잔인한 상처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여인은 당황하여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숨기려 하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정확히 짚어내십니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우리는 흔히 이 구절을 읽으며 사마리아 여인을 '음란하고 부도덕하며 방탕한 여자'로 오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당시 1세기 유대와 사마리아의 역사적·법적 맥락을 보면, 이 여인은 방탕한 여자가 아니라 사회적 시스템과 가부장제 제도의 철저한 피해자였습니다. 당시 문화에서 여자는 먼저 이혼을 요구할 권리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혼 증서를 쓰고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권리는 오직 남성에게만 독점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다섯 번이나 남편이 바뀌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남편이 죽어서 과부가 되었거나, 혹은 남편들에게 무참히 버림받고 쫓겨나는 비극을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겪었다는 뜻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남편이 없는 여인은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없어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여섯 번째 남자 역시 정식 남편이 아니라는 것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집에 얹혀살며 비참한 삶을 연명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여인에게 있어서 '물'은 곧 '사람'이었고 '남편'이었습니다. 내 인생의 공허함과 갈급함,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첫 번째 남편으로 안 채워지면 두 번째, 세 번째, 다섯 번째 남편을 찾아다니며 필사적으로 사람을 의지하고 찾아다녔습니다. "이 사람이라면 나를 지켜주겠지, 이 남자라면 내 상처를 보듬어주겠지" 믿었습니다. 그러나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땐 고통이었고, 남편을 얻었을 땐 이내 공허해졌습니다.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차가운 거절과 배신, 그리고 버림받음의 수치심뿐이었습니다. 그녀가 갈망하며 마셨던 세상의 물들은 그녀의 영혼을 채우기는커녕, 더 깊은 소외와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던 것입니다.
2 페이지: 우리 삶 속의 문제
오늘 이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이 단지 2000년 전 이름 없는 한 여인의 비극으로만 보이십니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이 사마리아 여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결핍과 갈급함을 안고 살아갑니다. 매일 물을 마셔도 다음 날이면 다시 목이 마른 것처럼, 눈앞의 문제가 잠시 해결되고 결핍이 채워져도 우리는 금세 또 다른 만족을 찾아 세상의 우물가를 기웃거립니다.
어떤 이에게 물은 '돈과 재물'입니다. "조금만 더 벌면, 이 평수의 아파트로 이사하면, 이 위치까지 올라가면 안심하겠지" 하며 밤낮없이 욕망의 물을 길어 올립니다. 하지만 통장 잔고가 늘어나도 미래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고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돈이 늘어날수록 지켜야 할 것은 많아지고, 영혼은 더욱 피폐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사람의 인정과 명예'가 물입니다. 타인의 평가에 목을 매고, 수많은 SNS의 '좋아요'와 인맥 속에서도 문을 닫고 혼자 남은 밤에는 극심한 외로움과 공허함이 찾아옵니다. 버림받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남들의 시선이라는 감옥에 갇혀 스스로를 갉아먹습니다.
또 어떤 이에게는 '세상의 정보나 쾌락, 혹은 중독'이, 심지어는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종교 행위'가 인생의 목마름을 채우려는 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 창조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의 '물'들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순간 있다 사라지는 연기와 같은 '헤벨'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13절에 선언하신 말씀은 오늘 우리를 향한 명확한 진단입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철학은 인간의 목마름을 진단하고 인생의 '헤벨(허무)'을 말할 수는 있지만, 그 목마름을 해결할 생수를 주지는 못합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고 세상의 문명이 아무리 화려해져도, 그것은 잠시 우리의 갈증을 달래주는 듯할 뿐 결코 우리 영혼의 근본적인 목마름을 해결해주는 생수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이 남편들에게 거절당했던 것처럼, 우리가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세상의 물들로부터 잔인한 거절감을 맛보게 됩니다. 평생을 바쳐 충성했던 회사에서 한순간에 권고사직을 당하기도 합니다. 내 인생을 책임져 줄 것 같았던 사업이 부도를 맞이하기도 하고, 공들여 쌓아 올린 명예가 말 한마디에 추락하기도 합니다. 영원히 내 곁을 지켜줄 것 같았던 사랑하는 이가 배신을 하거나, 혹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 우리를 남겨두고 떠나가 버리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죽음의 문제 앞에 직면해 있습니다. 권력자이든 부자이든, 가난하거나 소외된 자이든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합니다. 지혜로운 자도, 무식한 자도 죽음이라는 거대한 현실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평생을 바쳐 모아둔 재물도, 높이 쌓아 올린 명예와 지위도, 나를 증명하려 했던 그 모든 수고도 죽음이라는 거대한 실재 앞에서는 한 모금의 목마름조차 해결해 줄 수 없는 허무한 연기, 곧 '헤벨'로 사라지고 맙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세상의 부와 명예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의 그 어떤 우물도 죽음의 공포와 그 넘어의 공허를 채워주지 못합니다.
세상의 우물은 결국 우리에게 상처와 거절감, 그리고 죽음 앞에서의 허무함만을 남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끝없는 목마름의 굴레 속에서, 평생 동안 시계추처럼 또 다른 우물, 또 다른 남편을 찾아 헤매야만 하는 비극적인 존재입니까? 우리의 인생은 그저 결핍을 채우려다 거절당하고 죽음 앞에 무너지는 '헤벨'의 반복일 뿐입니까?
3 페이지: 성경 속의 은혜
오늘 예수님께서는 낙심한 우리에게 놀라운 해답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아픈 과거와 남편 이야기를 꺼내신 후, 그녀의 죄를 정죄하거나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라 치료하기 위해 다가가셨습니다. 그녀의 아픈 상처를 온전히 들어내어 고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대화의 방향을 거대한 주제로 전환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배'입니다.
여인이 자신의 남편 문제가 드러나자 당황하여 본질적인 영적 갈증을 종교적인 질문으로 회피하려 합니다. 19절과 20절입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의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진짜라고 주장했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야 진짜라고 맞서며 수백 년간 종교 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그리심산입니까, 예루살렘입니까? 어디서 드리는 예배가 진짜 맞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질문을 놓치지 않으시고, 여인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꿰뚫어 보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진짜 문제는 인간적인 환경의 결핍이나 남편이 없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진짜 문제는 바로 '예배의 문제'였습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예배는 단지 '장소'와 '형식'의 문제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녀의 예배는 완전히 무너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감격은 사라진 채, 그저 의무감으로 해치워야 하는 영혼 없는 종교 행위, 껍데기만 남은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삶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예배가 무너지면,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할 내 영혼의 중심(Center)에 거대한 공허함의 블랙홀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져야만 만족하는 영적인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고 나무가 뿌리를 흙에 내리지 않고 살 수 없듯,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할 때만 진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배가 무너지니 영혼이 굶주리게 되고, 그 텅 빈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 즉 '사람'과 '환경'이라는 영양가 없는 물을 찾아 평생을 방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장소와 형식에 갇혀 무너져 있던 그녀의 예배관을 송두리째 뒤흔드십니다. 21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은 이제 장소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하십니다. 건물의 시대도 끝났습니다. 이제는 '영과 진리로(in Spirit and in Truth)' 예배할 때가 왔습니다. 성령 안에서, 그리고 변치 않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인격적으로 대면하는 참된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이 놀라운 말씀을 들은 여인이 고백합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이때 예수님께서 인류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복음의 선언을 하십니다. 26절입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I am he)."
"네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 네 인생의 모든 갈증과 '헤벨'의 허무를 단번에 해결하고 참된 예배를 회복시킬 그 생수의 근원이 바로 네 앞에 있는 나다!"
성도 여러분, 이 선언이 임할 때 여인의 삶에 경이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영혼의 지독한 목마름과 남편의 상처가 결국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예배의 부재',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온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영혼의 중심에서 솟아나는 영원한 생수를 마셨습니다.
무너졌던 예배가 회복되자,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만족과 평안이 그녀의 심령을 채웠습니다. 그러자 어떤 행동의 변화가 일어납니까? 28절을 보니,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녀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들고 다녔던 그 물동이—자신의 수치심을 가리고, 집착하며, 세상의 물을 길어 담으려 했던 물동이를 던져버렸습니다. 세상의 조건과 남편이라는 우상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 정오에 숨어 들어왔던 여인이, 이제는 마을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 외칩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사람을 피해 다니던 비참한 피해자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당당히 전하는 최초의 사마리아 선교사이자 당당한 복음의 증인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무엇이 그녀를 바꾸었습니까? 환경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그녀는 가난했고 남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났고, 참된 예배가 회복되자 그녀의 온 삶이 새로워졌습니다!
4 페이지: 우리 삶 속의 은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2,000년 전, 타들어 가는 가슴을 안고 우물가에 섰던 그 외로운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솟아나는 생수를 부어주셨던 그 주님께서, 지금 이 시간 동일한 목마름을 가지고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그 생수를 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친히 "내가 목마르다" 외치셨습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시며 생수의 근원이셨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타들어 가는 목마름을 겪으셨습니다. 우리가 마셔야 할 심판과 '헤벨'의 허무의 잔, 그리고 죽음의 잔을 다 비우시고,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강을 열어주셨습니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인생의 공허함 앞에서, 인간관계의 배신과 거절감 앞에서, 물질의 결핍과 미래의 불안감, 그리고 언젠가 다가올 죽음의 상흔 앞에서 주저앉아 눈물 흘리는 우리를 향해 주님은 오늘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 딸아, 세상의 우물에서 물을 기르려는 헛된 수고를 멈추고, 네 삶의 예배를 다시 세우라."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하나님께 두기를 소망합니다. 예배는 단순히 주일 아침에 거룩한 옷을 입고 특정한 '장소'인 교회 본당에 앉아 머릿수를 채우고 가는 종교적 행위가 아닙니다. 습관적인 종교 생활이 아닙니다. 장소와 형식이라는 껍데기를 과감히 벗겨내고, 나의 깨어진 마음 그대로, 나의 헛된 물동이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온 영과 진리를 다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시고 참된 예배를 회복할 때, 주님께서는 세상이 결코 줄 수 없고, 세상이 빼앗을 수도 없는 진정한 영혼의 만족과 하늘의 평안으로 우리의 텅 빈 마음을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1956년, 남미 에콰도르의 식인종 부족이었던 아우카(Auca)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29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했던 명문 휘튼 대학교 출신의 청년, 짐 엘리엇(Jim Elliot) 선교사를 기억하십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 젊고 유능한 청년의 죽음을 보며 "낭비이자 허무한 비극"이라 말했습니다. "그 대단한 인재가 겨우 저런 곳에서 죽다니 얼마나 안타까운가"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대학 시절 일기장에 적었던 선명하고도 결단력 있는 이 고백을 보십시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사람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that which he cannot lose.)
그렇습니다! 짐 엘리엇은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썩어질 명예와 안전이라는 물동이를 버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생수를 취했던 참된 지혜자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이 영원하지 않은 썩어질 물동이를 던져버리고 영원한 생수이신 그리스도를 얻었던 것처럼, 짐 엘리엇이 한순간 나타났다 사라질 이 세상의 부귀영화와 목숨을 내려놓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택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세상의 헛된 물동이를 던져버리는 영적 결단이 있기를 원합니다!
언제까지 다시 목마를 세상의 우물가에서 서성이시겠습니까? 언제까지 움켜쥐어도 빠져나가는 연기와 같은 '헤벨'을 잡으려고 인생을 낭비하시겠습니까?
이제는 세상에 내린 욕망과 집착의 닻을 과감히 끊어내십시오. 눈앞의 얕은 물가에서 벗어나, 진정한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깊고 넓은 은혜의 바다로 한 걸음 담대히 나아갑시다. 무너진 여러분의 기도의 제단을 회복하시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를 회복하십시오.
그 신실하신 주님께 여러분의 존재와 미래를 완전히 맡기십시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회복된 우리의 예배를 통해, 그리고 우리의 무너진 일상을 통해 날마다 강물처럼 흘러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