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5편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 viewsNotes
Transcript
구원의 기이함을 경험하자
구원의 기이함을 경험하자
시편 145편은 먼저 읽어야 한다. 앞서 살폈던 다윗 시의 마지막이다. 21절에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지로다'라고 끝을 맺는다. 끝이 아닌 146편부터 시작되는 송축과 연결된다.
왜 먼저 읽어야 하는가? 묵상을 하면서 가장 먼저 느낌 개인적인 감정은 ‘위대함’이다. 마치 압도하는 건축물, 유적지 또는 한눈에 들어오는 자연의 압도적인 ‘경외감’처럼 그렇다.
여기에는 순서가 있다. 한눈에 들어오는 외형 안으로 들어가서 주변을 하나씩 살피면서 중심부에 도착해서 ‘이것이다’하는 압도된 분위기를 경험했다면 시편 145편은 그러하다.
시편은 이런 경우 ‘가나다’ 순서로 쓴다. 전체에서 몇 편 되지 않는다.(8-9편) 그만큼 중요하다. 계속 읽혀야 하는 목적을 두고, 암기되도록 순서대로 기록된 형태다. 145편은 다윗이 개인의 고백에서 전체로 확장되고 중심에 핵심을 두는 구조를 갖는다.
그런 구조의 핵심 즉 ‘이것이다’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함’이고 그 나라에 ‘왕이신 하나님’이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읽고 경외감에 압도되는 경험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가 시편 묵상을 통해 오래 훈련한 바이다. 대표적으로 ‘나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도자’였다. 기도는 겉으로 보기에 내가 위로 올리는 행위이지만 시편적 기도자는 아래에서 기다리는 행위로 바뀌며 올리는 행위는 그중에 일부였음을 깨닫는 것이다.
기도자는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시편 전체의 주제이다. 기도는 왕이신 나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다. 그렇기에 기도는 ‘말하라’는 왕의 명령을 기다리는 태도이다. 신약은 ‘말하라’는 명령이 ‘찾아오신 예수님’으로 대치된다. 왕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구약의 기도자는 신약의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는 진짜 긍휼을 입은 자들이다.
왕이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기도자는 앞서 자신이 ‘종’에 위치에 있음을 알았다. 그러하신 앞에서 기도자는 ‘크게 찬양, 그의 위대하심은 측량하지 못함, 능한 일을 선포, 영광스러운 위엄과 기이한 일들을… 읊조’린다.(3-5) 짧은 구절은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다. 이런 일을 고백할 때 기도자는 ‘두려운 일’(6) 즉 경외감을 갖는다. 말 그대로 생각해 보니 무시무시한, 무서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하신 하나님의 행하신 일 즉 기이한 일은 출애굽을 통한 하나님 백성 삼으심이다. 이런 표현이 그저 읽히지만 ‘기이하다(니플라오트)’ 하지 않는다면 각자의 ‘구원’에 대한 진짜를 돌아봄이 있어야 한다. 웅장한 건축물을 보면서 그 장대함에 경외감을 느끼면서 내가 여기에 있구나를 연결시키는 일도 삶에서 일어난다면, 구원하셔서 백성에서 자녀 삼으심으로, 찾아감에서 찾아오심으로, 곁에 계심에서 내주 하심으로 일어난 구원의 드라마를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립보서 2:12) 시편적 인간이 되라는 정확한 신약적 표현이다. 그러하신 하나님을 이어서 5절 ‘읊조리고’, 6절 ‘말할’ 것이고, 7절 ‘말하며, 노래’한다. 놀라운 것은 이런 행위가 ‘거품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경외심에서 두려움으로, 두려움에서 고백으로 연결된다.
이제 이런 고백은 공동체 모두의 고백이 된다. ‘주의 성도들이’(10) 함께 고백한다. 그 주제가 11-13절이다.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나라의 위엄 있는 영광,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른다’는 고백이다. 학자들의 재미있는 주장 중 하나가 각절의 시작 단어를 합치면 ‘왕’에 해당되는 단어 ‘멜레크’가 거꾸로 완성된다. 또한 이 단어는 ‘말쿠트’라는 단어로 ‘나라’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어 나오는 14-20절은 ‘왕이신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가를 고백한다. 앞서 3-9절이 하나님의 ‘속성’을 다루었다면, 14-20절은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행하시는 일’들을 묘사한다. ‘붙드시며’, ‘일으키시고’, ‘먹을 것을 주시며’, ‘손을 펴사’,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고’, ‘가까이’ 계시며, ‘소원을 이루시며’, ‘보호’ 하신다는 표현이다.
하나님을 묘사할 때 긍휼과 성실(신실)이라는 표현을 쓴다. 헤세드와 에메트이다. 이때 3-9절이 긍휼 안에서(위대, 선대, 긍휼, 의, 인자. 행하시는 일) 요소라고 말한다면 성실하심 안에서 어떤 일이 있는가를 보여준다.
기도자는 이제 시편 145:21 “21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지로다”라고 마무리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다짐이자 고백이다. 왕이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백성의 고백이자 선언이다. 개인으로 시작해 공동체가 함께 위대하신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하며 그분의 어떠하심을 열거하며 자신은 계속해서 말하며 영원토록 송축할 기대로 마무리하는 이 시편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불안한 시대에 진짜 위로를 준다.
이 땅에서 우리의 거주는 불안하다. 자녀에게 안전하게 밟고 설 한 평의 땅조차 허락되지 않는 구조적 결함을 갖고 있다. 그럴 때 ‘모든 세대와 모든 육체를 다스리는 왕’에 대한 고백은 과연 유효한가? 묻는다. 우리도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가 묻는다.
다시 한번 145편을 읽고 기도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경외심으로 채워지고, 두렵고 떨림으로 고백하며 그러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 하시는 놀랍고 기이한 구원에 감사하자.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