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짖는 자에게 샘을 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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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기도의 문을 열 때6 (20220724 주일오전)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그가 말을 마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I. 본문해설
사사기는 사사들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원래 사사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쇼페트( )'라고 하고 복수로 '쇼페팀( )'이라는 단어로 썼습니다. 원래 이 단어는 ‘재판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분사로 사용되어서 '재판하는 사람', '심판관', 이런 뜻입니다. 사사들의 역사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 사무엘이 사울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기까지 약 350년 동안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누구에게나 밝은 역사가 있고 어두운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고 생각하면 너무 수치스럽고 괴로운 어두운 역사의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일제시대 때 36년 동안 지배를 받았던 역사는 암울한 역사였고 누구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흑역사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바로 이 사사 시대는 그렇게 밝히고 싶지 않은 어두운 역사입니다. 제가 유대인이라면 아마 성경에서 사사기를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치욕스러운 역사가 가득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바로 사사기입니다.
사사로 활동했던 350년 동안의 인물은 열두 명입니다. 그중에서 어떤 학자들은 사울이 왕이 되기까지 있었던 엘리와 사무엘까지 사사로 포함해서 계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사의 수는 열네 명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사사는 큰 사사와 작은 사사로 나됩니다. 큰 사사는 덩치가 크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기록이 많이 나온 사람을 큰 사사라고 부릅니다. 이름만 간략하게 나오고 살짝 넘어가는 사사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을 작은 사사라고 부릅니다. 작은 사사들은 별로 한 일이 없어서 간략하게 넘어간 것이고 큰 사사들은 사건이 많았고 많은 역할들을 했기 때문에 큰 사사로 기록이 된 것입니다. 최초의 사사는 옷니엘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사사는 아주 홀륨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군가 하니 가니안 정복의 두 영웅이었던 여호수아와 갈렙 중 갈렙의 동생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왼손잡이 사사 에훗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왼손잡이가 큰 잘못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당시로 보면 평범한 계층의 사람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 사사 드보라가 등장하게 됩니다. 여자는 당시 사회적인 신분이 낮은 위치에 있었는데도 사사로 등장을 해서 비교적 큰 과오 없이 홈룡하게 사사의 직분을 수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바락 기드온, 아비멜렉, 입다. 삼손 같은 사람들이 바로 큰 사사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사실은 옷니엘 같은 사람을 빼고는 한결같이 신분도 미천하거니와 사실 신앙도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기드온은 우리들이 흔히 어렸을 때 주일학교 시간에 배운 것처럼 삼백 '용사와 함께 '용감하게 이스라엘을 지킨 사람으로 기억이 됩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 유명한 양털에 이슬을 내리는 기도를 두 번이나 반복해서 하나님을 시험했던 인물입니다. 거기까지는 괜찮은데 이후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지고 기드온은 동족상잔의 주인공이 됩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에게 마지막으로 토지를 분배해야 할 사명을 가진 지도자가 내란을 일으키고 동족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으니, 이 사람도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입다라는 인물은 태생이 아주 천하고 동네의 비류들을 모아서 다니던 일종의 폭력배였습니다. 그러다가 사사가 되었고 얼마나 경솔한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면 처음으로 자기를 마중 나오는 그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고 공언을 하게 됩니다. 불행히도 처음 마중 나온 사람은 무남독녀 외동딸이었으니, 이 사람도 정상이 아닙니다.
더 가관인 사람이 오늘 다루려고 하는 삼손이라는 인물입니다. 다른 사사들은 그래도 조직이라는 걸 알았고 사람들을 거느리면서 나라를 이끌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항상 혼자 다녔습니다. 무기도 없고 이 사람은 정신세계가 4차원의 사람입니다. 태어날 때는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태어났는데 소라 땅 단 지파 마노아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나실인의 서약을 했으니 그는 술을 먹으면 안 됐습니다. 그런데 술을 몹시 즐겼고 당연히 시체를 만져서는 안 되는데 그는 시체를 만겼습니다. 또 여자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는데 수시로 바람을 피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삼손과 들릴라의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블레셋 기생의 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신앙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더욱이 일평생 그의 힘이 머리카락에서 나오기 때문에 나실인의 서원을 따라서 머리를 잘라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들릴라의 꼬임에 빠져 유혹에 헤어나지 못하면서 그 비밀을 가르쳐주게 되고 머리를 깎이고 눈이 뽑힌 채 짐승도 아니면서 연자 맷돌을 돌려야 하는 불쌍한 처지가 되었던 사람이바로 삼손입니다.
이 사람들은 결국 이스라엘의 가장 어두운 역사를 더 어둡게 만들었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결국 사사기가 전부 21장으로 되어 있는데, 21장의 결론이 아주 우울하게 끝이 납니다. 뭐라고 끝이 나느냐 하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 요즘 말로 알아듣기 쉽게 얘기하면 나라가 개판이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개판이 무슨 뜻인지 압니까? 혼히 쓰는 말이 개판 5분 전이라고 합니다. 그게 원래 개반( ) 5분 전입니다. 개반( )이라는 게 뭐냐 하면 도그(dog)와 관계가 있는 게 아니라 밥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옛날 6. 25 때 군인들이 밥을 합니다. 밥을 해서 밥이 다 되면 뚜껑을 열고 차례대로 밥을 먹어야 되는데 전쟁 통에 너무 배가 고프니까 밥이 되기 5분 전에는 질서가 흐트러지면서 너도 나도 그릇을 가지고 밥솥 근처로 모여드는 데서 개반 5분 전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게 오늘날 개판 5분 전이라는 말로 변전이 된 것입니다. 이거는 어학적인 근거가 분명한 것입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사사의 역사가 개판 5분 전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걸 다룬 시대가 주전 1390년에서 105년 사이니까 약 350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사기는 21장으로 되어 있는데 세 토막으로 나뉘집니다. 첫째 토막이 1장부터 3장 6절까지입니다.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어두운 역사 속에 들어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을 서론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3장 7절부터 16장 마지막 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의 사이클을 그립니다. 타락주기를 그립니다. 그타락 주기가 뭐냐 하면 여섯 개의 사이클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구원하면 타락하고, 타락하면 고통받고, 고통받으면 울부짓고, 울부짓어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고 용서하신 후에는 다시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고 나면 다시 타락하고, 다시 고통받고 부르짓는 그 사이클이 아주 조금의 착오도 없이 주기적으로 계속 되풀이되는 역사를 3장 6절부터 16장까지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7장부터 21장까지는 나라가 얼마나 개판이 되었는지를 제사장의 제도 레위인의 성결이 모두 다 무너지고 어떻게 이스라엘이 우상송배하면서 망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그리면서 마지막이 개판이었더라는 말로 끝나는 것입니다.
사사기 1장에서부터 3장 6절까지의 서론에 보면 결국 사사기 전체가 왜 이렇게 캄캄한 역사가 되었는지에 대한 두 가지 이유가 제시가 되었습니다. 그 첫째가 정치적인 이유고, 두 번째가 종교적인 이유입니다. 정치적인 이유는 뭐냐 하면 가나안 족속을 모두 몰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진짜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정치 지도자들이 결단을 하면 군대를 동원하고 쓸어버려서 정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안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을 완수했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여호수아가 죽을 때도 가나안 정복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정복이 끝나지 않았다는 건 뭘 뜻합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에 열두 지파의 백성들이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래서 각기 자기 땅을 할당을 받은 것입니다. 정복을 못했다는 이야기는 땅을 못 받은 지파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지파가 단 지파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이 아낙 자손같이 어마어마한 자손들이 살고 있는 곳도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싹 쓸어버리고 가나안 땅을 주셨으니까 한 번 더 힘을 내어 합해서 싸우러 갔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가나안 족속들을 모두 남기지 말고 진멸하고 이 땅을 거룩한 땅으로 만들라고 하셨으니 끝까지 정복해서 이스라엘의 깃발을 딱 꽂은 후에 아무도 땅은 못 받는 지파가 없도록 다 분배합으로써 가나안 정부의 명령은 끝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안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쳐들어오니까 가나안 원주민들은 고지대로 도망을 기는 것입니다. 수비를 잘할 수 있는 곳으로 도망가는 건 상식이 아니겠습니까? 좋은 땅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하고 거친 산지로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수도 여러 번 만나다 보면 얼굴이 친숙해지듯이 맨 처음에는 죽일 놈이라고 공격을 했는데 끝까지 밀고 가지 않고 내버려 둔 것입니다. 그런 휴전의 상태가 오래 지속되니까 이 사람들이 내려와서 물건을 파는 것 입니다. 필요하니까 사고 또 자신의 물건을 그들에게 팔기도 하면서 상호 공존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매우 슬퍼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신 것은 그들을 쓸어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을 모두 쓸어버리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어떤 부도덕한 것이나 불결한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거룩한 하나님만 사랑하고 섬기고 그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하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이 가나안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서 거래가 이루어지게 되고 급기야 신앙이 없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가나안 원주민 딸들의 미모에 반해서 개네들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의 아들을 그쪽에 장가를 보내어서 멸망시켜야 할 원수들 간에 사돈지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고 보니까 가나안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공중에 떠버리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서 자기 사위를 죽이고 며느리를 죽여야 되는 상황이 되니까 이젠 도저히 그런 싸움이 성립을 안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적인 위기가 서론에 실려 있습니다. 이 정치적인 위기는 문제를 가져왔습니다. 그게 뭐냐면 심각한 도덕의 타락을 가지고 왔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을 주신 것이지 이스라엘이 의로워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가나안 땅을 얻은 이스라엘이 그들과 똑같은 도덕적인 상태로 동화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죄와 싸우지 않을 때 어떻게 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적용하자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는데 죄와 싸우기가 싫은 것입니다. 더 이상 성화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 전쟁이 없으면 평화가 오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가난한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지?" 나도 안 쫓아내겠다." 그 대신 그들이 계속 살아서 너희의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될 것이다." "너희들은 계속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거를 말씀하심으로써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성화의 노력을 그칠 때 싸움을 안 하는 편안함이 있는 게 아니라 그 남아 있는 죄가 우리의 옆구리를 계속 찔러서 결국은 죄와의 싸움이 없는 성화를 거절하는 모든 성도들이 이 땅에서 계속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종교적인 문제였습니다. 종교적인 문제는 바로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을 열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신 이유는 바로 그 허망한 우상, 그것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천지를 창조하시고 홀로 거룩하시며 모든 인간에게 행복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공경하게 하기 위해서 가나안 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능력의 하나님,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바위를 깨뜨려 샘물 나게 하시고 메추라기를 먹여 배부르게 하시고 만나를 주시고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셔서 마라의 쓴물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을 보호하신 그 하나님을 버리는 대신 이방의 우상을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그랬을까 하는 의구심을 한번 가져보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더 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소위 지역신 사상이었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가르쳐준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지역신 사상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지역마다 자기 구역을 관장하는 신이 있는데. 구역에서는 그 신이 제일 세다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과 광야에서 최고의 신이었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오고 보니까 새로운 세계를 목격한 것입니다. 너무나 풍요로운 사회였습니다. 발달한 문명을 이룩하고 있었습니다. 좀 과장을 해서 이야기하면 저 산골에 있는 사람을 맨해튼 거리에 갖다 놓은 것 같이 충격적인 문명의 격차를 느꼈습니다. 발달된 문명의 뒤에 뭐가 있나 봤더니 농사가 있었습니다. 농업이 있었고 그 농업을 통해 그렇게 발전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생각을 했더니 그 뒤에는 농경신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바로 바알이나 아세라와 같은 풍요의 신들이었습니다. 고대의 유물들을 보면 여신상들이 출토가 되는데 가슴이 일곱 개, 여덟 개씩 배까지 아래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땅을 기름지게 하고 풍요롭게 하여 어마어마한 문명을 눈부시게 일구고 한 궁극적인 원인이 그 신들에게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다리를 걸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을 애굽에서 구원하고 여태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굳이 이 땅에서 강력한 다산의 힘을 행사하는 신들을 밉보이면서까지 우리가 살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유일신론 신앙을 버리고 다신론 신앙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가장 경고하시던 바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종말론적으로 오늘날 하나님과 세상을 아울러 섬기며 살려고 하는 현대인과 교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세상의 물신( )에게도 나쁘게 보이지 않아서 세상적으로 살 때는 세속적인 방식으로 번영을 꿈꾸고, 교회에 와서는 신앙은 가진 사람처럼 예배를 하자는 이원주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보기에는 당신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을 향한 말할 수 없는 모욕이기 때문에 이런 예배당의 문은 닫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인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사사기는 어쨌든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어두운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치욕의 시간들이었는데 이게 성경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사사들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사는 대부분 옷니엘 같은 사람을 빼놓고는 가문도 미천합니다. 왼손잡이, 아니면 당시에 멸시받던 여성, 그렇지 않으면 창기의 아들, 이런 사람들로 태어나고 나실인의 서원 같은 것들은 하찮게 여기고 짓밟아버리는 미치광이 같은 사람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등장하는데, 사사는커녕 성도로서의 가치도 없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니 이스라엘이 개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게 뭐냐 하면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위대한 장에 이 쓰레기 같은 사사들의 이름이 막 올라오는 것입니다. 한번 보겠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히브리서에서 히브리서를 거의 끝내가면서 히브리서 기자의 어조가 막 절정을 향하던 때였습니다. 뭐라 그랬냐면 "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믿음으로 살면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 그 애기를 하면서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히 11: 32)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름이 먼저 쏟아져 나옵니다. ..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히 11:32)
사무엘과 다윗의 이야기는 충분히 수궁이 됩니다 그런데 그다음 것은 뭐냐 하면 이 모든 사람을 싸잡아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사를 포함해서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히 11:33)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히 11:34) 우리는 어렸을 때 듣기로 이 사사들을 영웅처럼 떠받들고 본받자고 합니다.솔직히 말해서 사사들 중에서는 여러분이 본받아야 될 사람이 없습니다. 옷니엘를 비롯해서 그저 한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별로 본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삼손처럼 산다면 전 OO교회를 퇴직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느끼는 궁금한 점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삼손이라는 이상한 4차원의 인간이, 신앙이 거의 없이 산 이 사람이 여기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사기 전체를 볼 수 있는, 사사기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빛줄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사사기에 나오는 이 사람들의 모든 비행은 전적으로 사실입니다. 백퍼센트 팩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사사가 된 때부터 죽을 때까지 모두 어두운 역사판을 쓰고 죽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가끔, 아주 가끔 불쑥하고 불같은 믿음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그들을 당신의 손에 붙잡아 사용하셔서 실제로 나라와 민족을 이기시고 이스라엘을 고통 가운데서 구해내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사들이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은혜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림으로 묘사를 하자면 사사들의 어두운 역사로 새까만 배경을 칠해 놓으시고 거기에 하나님의은혜를 별처럼 찍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절망적인 사사들의 역사를 읽으면서 '아 이제 이스라엘도 희망이 없구나'라고 좌절하게 하는 대신 그런 사사들의 잠깐 동안에 믿음을 사용하셔서 아무도 꿈꿀 수 없는 위대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심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그 흑역사의 어두운 밤하늘 때문에 하나님 구원의 은혜가 별빛처럼 빛나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런 관점을 가지고 사사기를 읽으면 이 사사기는 너무너무 감격스러운 책입니다. 이 정도 설명하면 사사기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게 이번 설교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어디를 읽든지 이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읽던 성경을 딱 멈추고 오늘 저녁부터 사사기를 드십시오. 그리고 사사기를 세 토막으로 나누면서 제 설명을 그림처럼 떠올리며 천천히 읽으면서 예전에는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그 어둠 속에서 별을 찾아보십시오 그러면 갑자기 그 별이 찬란하게 빛나면서 이스라엘의 흑역사를 읽으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래도 버리지 않은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 자신에게도 소망을 주실 줄을 믿습니다.
사실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아니라 여기에 나오는 삼손이라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길게 사사기를 설명했던 이유는 제가 사사기 읽으면서 너무 은혜를 받아서 예전에 나처럼 사사기를 읽지 말고 지금 저처럼 사사기를 읽고, 이 속에서 다 읽고 나면 눈물이 나옵니다. 무릎을 끓으면서 깜깜한 어두운 이스라엘 사사의 역사가 내 인생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결국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내가 구원받게 되었구나!' '그리고 내가 그 많은 시련들을 극복하고 살 수 있었구나.' 그걸 깨닫게 되면서 어떤 사실에 도달하게 되느냐 하면 '나는 하나님의 손에 불잡혔을 때만 빛나는 성도다.' 주님이 놓으시면 나는 어두운 이스라엘 역사의 한 조각일 뿐이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건 또 소망을 줍니다. 어떤 소망이냐 하면 아무리 칠흑같이 어두운 절망 속에서도 그것은 하나님 은혜의 별빛에게는 찬란한 빛이 드러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 믿음을 가지시라고 이렇게 길게 서론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삼손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4차원처럼 온갖 사고를 다치고 다녀서 블레셋 사람도 싫어하고 이스라엘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이 된 게 사사입니다. 사사인데 아무도 그를 존경하면서 따르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독불장군으로 돌아다니면서 사고를 치는데 힘이 장사라서 무기가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고 다니는 것입니다. 결국은 블레셋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삼손 때문에 도저히 어떻게 이스라엘을 지배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삼손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협박을 해서 '삼손을 결박해서 우리에게 끌고 오지 않으면 너희 국물도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삼손을 묶었습니다. 그것도 삼손이 동의하지 않았으면 묶였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묶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갔습니다.
II. 부르짖는 자에게 샘을 주심
II. 부르짖는 자에게 샘을 주심
그런데 여기에서 보여주는 건 뭐냐 하면 부르짖는 자에게 하나님이 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포로로 끌려갔는데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십니다. 이 쓰레기 같은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게 가당이나 합니까? 그런데 성령이 임하십니다. 이때만큼은 삼손의 마음이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삼줄이 불에 탄 것처럼 후드득 끊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게일 질긴 줄이 나일론 줄이 아니고, 쇠줄이 아니고 삼줄입니다. 삼줄은 제가 직접 봤습니다. 가느다란 그거를 양쪽에서 잡아당겨도 안 끊어집니다. 특히 마닐라 삼이 아주 강합니다. 그래서 기계 같은 데 넣고 새지 않게 감는 데 마닐라 삼을 씁니다. 그걸로 밧줄을 만들어서 묶었으니까 누구도 못 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불에 탄 것처럼 확 끊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전쟁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물밀듯이 인해 전술로 블레셋 군대들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무기도 없습니다. 주먹으로 싸우다가 보니까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나귀의 턱뼈가 있는 것입니다. 썩지 않고 튼튼하다는 뜻입니다. 턱뼈를 가지고 춤추듯이 휘두르면서 일천 명을 죽입니다.
그건 사실은 성경에서 볼 수 없는 희한한 전투입니다. 따르는 군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혼자서 일 대 천으로 춤추듯이 해서 사람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더기 무더기 쌓아서 결국은 모두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큰일을 하고 난 후 삼손은 완전히 탈진한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그 뼈를 던져버리고 그곳 이름을 '라맛 레히'라고 불렀습니다. 턱뼈의 언덕이다', 이런 뜻입니다.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하냐 하면 .”...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삿 15:18 ) 이게 순간적으로 신앙이 들어온 것입니다. 뭐냐 하면 자신이 죽는 건 괜찮은데 죽어서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져서 자기가 치욕을 당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봐 염려하는 마음이 생겨난 거를 보면 삼손이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하고 비슷한 것입니다. 평소에 살 때는 믿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없느냐, 아니 있습니다. 있나, 그러면 사실 없습니다. 그게 그냥 어느 순간에 가끔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되고 믿음이 항상 마음 안에서 역사를 해서 언제든지 그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성도가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보입니다. 그런데 불쑥하고 나타납니다. 그런데 또 잠시 후에 그 믿음을 기대하면 안 나타납니다. 언제 그런 게 있었냐는 듯한 게 삼손의 일이고 이게 오늘날 여러분의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신기하게 믿음으로 살았던 한 순간을 탁 포착하면서 그걸 우리가 본받아야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사람에게서 배우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구십구 개가 훌륭하고 하나가 결함이 있습니다. 하나의 결함을 거론하면서 구십 구개의 좋은 점을 싹쓸어버려서 쓰레기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기는 백 개가 다 쓰레기인데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거는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일종의 열등감과 시기심의 발로입니다. 나쁜 거는 배우지 말고 좋은 거를 배우는 것입니다.
전쟁의 역사를 보면 가장 많이 배우는 것이 적국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게 전쟁의 역사입니다. 적국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우방을 통해서 배우는 게 아니라 적국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도서관에 가면 6.25 때 전쟁사가 두꺼운 책으로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때 무슨 전투였고 지휘관은 북한군 별 두 짜리가 누구였고 남한은 별 하나짜리가 누구였고, 몇 명의 군대들과 어떻게 어떻게, 며칟날 몇 시에 어떻게 전쟁해서, 결국은 왜 졌다. 왜 이겼다, 전사가 다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적국이 그걸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걸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로 살아야 됩니다. 성경이 바로 우리에게 그걸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람피우고 오입질하고,술 처마시고, 4차원 행동을 하고, 그렇게 미친 듯이 들아다니던 삼손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다 좋았다는 듯이 아니라, 그걸 다 인정해준다는 뜻이 아니라, 이렇게 결정적인 때 그가 솟구치는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 그거 포착시키면서 우리에게 이걸 본반으라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삼손은 가끔 그렇게 살았지만 너희는 항상 그렇게 살아라! 이게 바로 민음으로 사는 인생이다' 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멘 결국 신앙이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그리고 울부짖게 된 것입니다.
A. 샘물을 터뜨림
A. 샘물을 터뜨림
그랬더니 하나님이 샘물을 터트리셨습니다. 원래 있던 샘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삼손을 위해서 기적적으로 터트려주신 샘물입니다. 삼손이 온 몸이 지치고 피곤하고 갈증 때문에 거의 죽어갈 위치 상황에 도달했는데 펑하고 샘물이 터지면서 맑은 물이 확 쏟아져 나왔습니다. 우리 중에는 그 감격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목말라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삼손이 그 물을 퍼마시면서 얼마나 감격했을지 한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이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지금 이성의 눈을 가지고 보면 천 명을 때려 죽였지만 그거는 거의 정신없는 상태에서 한 일이고 삼손은 완전히 탈진이 되어서 낙타의 턱뼈조차 들 힘이 없어서 던져버리고 퍼져버렸습니다. 만약에 한 열댓 명만 언덕에서 다시 블레셋의 군사가 무장하고 처들어오면 자기는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것이 아니라 목이 말랐던 것입니다. 이 물은 금덩어리와 바꿀 수도 없고, 아름다운 여인과도 바꿀 수가 없고, 맛있는 음식과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샘물이 상징하는 바는 대체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샘물은 시편 42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합니다"라고 한 것처럼 이 샘물은 영혼의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걸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비유로 사용하실 때에도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샘물을 우리들이 필요로 한다는 사실, 그것 없이는 아무리 힘이 장사라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삼손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곤고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흔히 사람들은 곤고한 궁극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생각 안 합니다. 돈이 없어서 곤고하고, 몸이 아파서 곤고하고, 애들이 속을 썩여서 곤고하고, 남편의 사업이 잘 안 돼서 곤고하고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않아서 곤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런 문제가 다 해결되고 나면 곤고한 게 사라집니까? 아닙니다.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궁극적으로 곤고한 것은 영혼이 곤고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이라든지 인간관계라든지 육신의 고통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우리의 곤고함을 보여주는 수단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샘물이 터지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갈급한 영혼을 어디에서도 해소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샘물이 터진 사건을 통해서 구속사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샘물은 삼손이 먹었어도 다시 목마르는 샘물이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고 다시 사심으로써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에 생명의 샘물을 터트리셔서 그 물을 먹고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유지하며 살게끔 하셨으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영혼의 샘물이시라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이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헛된 것들을 찾아서 행복을 얻어보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은 마지막 종말이 삼손과 같이 "내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져 죽게 되었나이다"라는 고백을 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무엇입니까? 결국 여러분 영혼의 샘물을 점검하는 일입니다. 그 샘물이 솟아나 터져서 여러분의 갈한 영혼을 적시고 여러분의 힘없는 생활에 힘을 주고 활력을 주는, 삶의 용기와 희망을 주는, 그 무엇이 여러분에게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샘물이 터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소생하게 하심
B. 소생하게 하심
두 번째는 하나님이 삼손을 소생하게 하셨습니다. 히브리 말로 "살게 한다" 이런 뜻입니다. 이거는 시편에서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내 영혼을 소생케 하옵소서" "소생케 하옵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소생케 하시면" 소생케 하시나이다." "소생케 하옵소서" "소생케 하셨사오니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겠습니다." 이것이 소생입니다. '소생( )이라는 건 무엇입니까? 생명을 얻는다는 것, 혹은 생명이 확 살아나는 것율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물면 온 나무들이 다 이파리가 마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파리들이 말라서 비틀어지기 시작하고 낙엽이 아닌 낙엽이 되어서 매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비가 쏟아집니다. 쏴아 하고 쏟아집니다. 저는 어제도 비가 펑펑 쏟아지는데 우산을 쓰고 산책을 했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물소리가 막 나면서 산천초목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막 살아나는 것입니다. 산천초목이 살아납니다. 똑같이 우리의 영혼도 '소생한다'는 말이 그 말입니다.
소생의 반대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죽는다는 것은 육신이 죽는다는 것과 다릅니다. 육신은 숨이 끊어지는 걸 죽는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영혼은 숨이 끊어질 수 없는 불별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죽는 건 없습니다. 육신의 죽음은 숨이 끊어지고 생명이 멈추는 것이지만, 영혼의 죽음은 육체처럼 그렇게 죽지 않습니다.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웃기는 게 뛰냐 하면 영혼이 죽으면 미친 짓을 합니다. 평소에 안 하던 미친 짓을 합니다.(삼손처럼) 나실인이 왜 기생한테 갑니까? 그리고 기생이 돈 받아가지고 그 힘의 비밀을 찾아내려고 한다는 걸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왜 그 무르팍에 누워서 헛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까?
한국교회의 길선주 목사님을 아실 것입니다. 옛날에는 유명한 목사님들이 양반 출신이 많았습니다. 거의 다 양반 출신이었다고 봐야 됩니다. 그분들은 개인적으로 자기를 돌보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종이라고 하면 뭐하지만 자기를 돌보는 비서 같은 사람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대부분 젊은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스토리가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어떤 젊은 여자가 회심을 해서 그 목사님을 너무 존경하면 그렇게 수종을 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길선주 목사님이 워낙 설교를 잘하니까 평양 기생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술집의 매상이 뚝 떨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난봉꾼들이 다 회심하고 기생집 출입을 끊은 것입니다. 이거는 야사가 아니라 실화입니다. 그 시대에 살았던 분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기생협회에서 모인 것입니다 '길선주라는 인간이 누군지 알아봐라. ' 유능한 설교로 예수를 믿게 만든다는데 그 사람들 중에 우리 고객이 상당수가 있어서 우리 사업이 위기에 직면하게 됐으니 묘책을 짜라.' 그래서 나온 게 기가 막히게 예쁜 기생을 회중으로 가장해서 침투시켜서 막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연기를 하고 목사님의 말씀에 은혜받은 것처럼 연극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께 가서 주님의 은혜로 제가 살리심을 얻었는데 평생 목사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러니까 마침목사님도 거들어주는 사람이 없던 차에 그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서 마각이 드러났습니다. 목사님이 집회를 인도하고 집 마루에서 베옷 차림으로 쉬고 계시는데 이 그림같이 예쁜 여자가 다가와서 품에 살포시 안기는 것입니다. 그때 길선주 목사님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소녀를 받아주소서" 했더니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확 집어던졌는데 그 여자가 대청마루에서 댓돌을 거쳐서 마당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보지는 못했지만 하여튼 스토리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오히려 그 품을 파고들었습니다. 톰 존스가 부른 '딜라일라'라는 그 유명한 노래가 성경에 들릴라라는 이름에서 나온 것입니다. 원래 '딜라일라'는 영어로 '요부'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졌어야 되는데 이 사람은 안 가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혼이 죽어 있어서 나오는 미친 짓입니다. 여러분 남편이 어느 날 말도 안 되게 성질부리고 뭘 집어던지고 막 폭력을 행사하면, 저게 미쳤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영혼이 죽은 것입니다. 육체가 죽으면 잠잠합니다. 그래서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영혼이 죽은 지는 말이 많습니다. 온갖 거짓말, 사기, 시기, 분쟁, 그다음에 당 만들기부터 시작해서 살인, 간음, 모욕과 별 우상숭배와 별 더러운 일을 다 하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이런 죽어 있는 우리의 영혼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성경 읽어라, 말씀 읽어라, 그래도 기도해라, 그래도 매달려라, 끊임없이 목이 터져라 하고 간청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안 하면 삼손의 영혼처럼 죽은 영혼이 될 거고, 죽은 영혼이 되면 여러분이 미친 짓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미친 짓을 하고 나면 하나님 앞에는 벌 받고 여러분과 관련된 모든 사람이 함께 불행해집니다.
그런데 이거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언약의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언약은 "너로 말미임아 모든 사람이 복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여러분이 복의 근원이 되어야지 그렇게 불행의 근원이 되면 되겠습니까? 여러분 같은 엄마를 만나서 자식들이 찢어진 가정 속에서 불행해진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은 딸을 두었기 때문에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면, 여러분을 하나님 자녀 삼으신 그 목적과는 정반대에 자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은 이웃을 만났기 때문에 너무 괴로워서 이사 가고 싶은 사람들이 생긴다면 여러분은 정반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정반대의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혼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어서 미친 짓을 하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뭐 좋은 게 있습니까?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런 결말은 어땠습니까? 그냥 무너져서 함께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삼손 일대기의 끝입니다. 삼손의 전부를 본받으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빛나던 잠깐 잠깐의 순간, 그거를 본받으라고 지금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민음을 가지고 거기서 배워서 전체적인 삶은 삼손처럼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쓰레기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보여주는 삼손의 양면성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소생입니다. 이 소생은 생명이고, 이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생명이 충만하게 부어지면 미웠던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원수도 사랑하게 되고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헨델의 음악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계 바로 크세르크세스 에 나오는 '라르고'입니다. 얘기하면 길지만 간단하게 애기하면 헨델은 음악의 어머니이고,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헨델은 사람의 품을 감싸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헨델의 '라르고'를 들으면서 댓글을 썼습니다. ‘4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헨델의 라르고를 듣습니다' '눈물이 납니다. '모든 사람을 용서 하기로 했습니다! 음악에 감동을 받아도 원수를 용서할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정말 은혜를 받으면, 그 사람들을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아내를 보고 남편을 보고 아이들을 보고 부모님을 보고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보는 것입니다. 어쨌든 내가 살아있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게끔 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의 자녀로 부르신 인생입니다. 그렇게 못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생하지 못한 영혼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내 영혼을 소생시켜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C. 부르짖게 하심
C. 부르짖게 하심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때에 이렇게 샘물울 터뜨리시는 기적을 주시고, 삼손의 죽었던 육체와 함께 영혼까지 살아나게 하시는 기적을 베푸셨습니까? 그 답이 바로 성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삿15:19). 샘물이 터지는 것을 보고 삼손이 얼마나 감동했는지 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사건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자리에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그건 옛날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주 혼하게 하던 습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뭐라고 불렀냐면 '엔학고레( )'라고 불렀습니다. '엔( )'은 히브리말로 '샘'이란 뜻입니다. '하( )'는 정관사 the(그)'입니다. '코레( )'는 '부르짖다'라는 동사의 남성 분사형입니다. 그러니까 직역을 하면 "그 부르짖는 자의 샘" 그런 뜻입니다.
여기서 삼손이 일생에 잊히지 않는 강력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불가능한 일도 행하신다'라는 도움을 받게 됩니다. 짜증는 건 그 다음 성경 구절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크고 위대한 일이 일어났고 감격을 경험하고 삼손은 기생집을 또 찾아갑니다. 이걸 보면서 우리 짜증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모습이 하나님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셨던 이스라엘 백성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싶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사실은 우리가 잘나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삼손은 마지막에 눈이 뽑히고 짐승 대신 연자 맷돌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는 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괴로웠겠습니까? 이 사람은 말하자면 미친 기운을 가진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자기를 인도해달라고 해서 결국 연회장이 이루어지는 장소의 기둥으로 가서 그거를 밀어버렸습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무너져 가지고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 죽은 숫자가 자기가 살인을 패 죽인 숫자보다 휠씬 더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살되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힘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 같은 것들을 이런 사건을 통해서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손에 대해서 두 가지 양면성을 그대로 공정하게 받아들이면서 못된 것은 백우면서 우리들이 따르지 말아야 하고, 좋은 것은 보면서 우리들이 깊이 감동을 받으며 본받는 것이 이 사사기를 올바르게 읽는 방법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누구에게 주셨냐 하면 그 부르짖는 자에게 샘을 터뜨려 주신 것입니다. 시인들이 그렇게 밤이나 낮이나 하나님 앞에 은혜를 빌며 간절히 울부짖었던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부르짖는 자에게 샘물을 터트리셔서 영혼을 살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사람들이 끊임없이 예배당에서 자신이 정한 처소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기독교는 이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러주신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III.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하나님 앞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절히 부르짖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샘은 터트리시고 죽은 여러분의 영혼을 다시 살려내실 줄을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