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우심을 기억하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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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5:1-12

오늘은 '세우심을 기억하는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겠습니다. 여러분 삼일간 평안하셨습니까? 반갑습니다. 저 많이 까매졌나요? 여러분들의 기도 덕분에, 무사히 잘 다녀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옆에 있는 지체와 이렇게 한번 인사해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십니다" 오늘 이 고백이 우리 삶의 진짜 고백이 되는 시간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자전거 처음 배우셨던 기억 있으십니까? 저는 처음 자전거를 탔을 때, 아직도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물론 두발 자전거 말입니다. 처음에는 두발 자전거를 당연히 혼자 못 타지요. 누군가가 뒤를 잡아줘야 합니다. 친구가 자전거 뒤를 잡아줬던 기억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잡아줘도요 넘어지지요, 그런데 잘 잡아주면 제법 앞으로 잘 갑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에는요 이제 자신감이 붙게 되지요.
그런데 제가 두 발 자전거를 탔던 순간이 언제인지를 떠올려보니깐요, 아파트 내리막길이었던게 기억이 납니다. 친구가 처음에는 잡아주다가요. 어느 순간 손을 딱 놓아버립니다. 그리고 페달을 막 굴려요, 근데 몰입하는 순간, 친구가 잡아줬던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는거지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과연 처음 도움을 줬던 친구가 없었다면, 그 자전거를 잡아주던 친구가 없었다면 제가 탈 수 있었을까요? 아니지요. 친구가 도움을 줬기 때문에, 제가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거잖아요.
여러분, 우리 인생도 이와 비슷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 내가 넘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이 길. 우리는 언제부턴가 그게 다 내 실력이고, 내가 잘해서 온 거라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니잖아요.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고, 누군가가 붙잡아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고, 누군가가 기다려주고, 참아주고, 다시 일으켜 주고, 도와줬던 손길들이 있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다윗이 마침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지는 장면입니다. 형제들에게 부름을 받고, 오랫동안 아무도 정복하지 못했던 시온의 터 위에 나라를 세우고, 마침내 화려한 궁궐에까지 이르게 된 다윗. 여러분, 이 정도 되면 사람 마음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내가 해냈구나" 그런 마음이 들 법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자리에서 전혀 다른 고백을 합니다. 오늘 그 고백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고백이 오늘 우리의 삶에는 어떤 질문으로 다가오는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1절을 다시 한번 보시면요,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다윗에게 나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그럽니다.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이 지파들의 말에는, 다윗이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왕이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지 분명히 드러나는 고백입니다. 골육이라는 표현은 무슨 의미입니까? 뼈와 살이라는 표현이지요, 창세기에서 아담이 하와보고 뭐라고 고백합니까. 당신은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즉 하와를 향하여 골육이라는 표현을 똑같이 사용합니다.
즉 골육이라는 표현은요, 가장 가까운 사이, 친밀한 관계를 표현할 때 쓰는 말인 것이죠. 지금 이스라엘의 지파 장로들이요 다윗을 향하여 그말을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우리의 형제, 가장 가까운 사이임을 고백하는 말이지요. 1절에 보면요,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다윗에게 나아왔다라고 표현하는데요, 3절에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왕에게 나아갔다라고 표현합니다. 1절에는 다윗에게 나아갔다고 하고요, 3절에는요 왕에게 나아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굳이 이런 다른 표현을 쓸 필요가 있을까요?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냐면요, 다윗의 왕권이 시작하는 그 첫 순간은요 왕이라는 직함이 아니라요 이름으로, 그들의 형제로, 가까운 관계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2절을 보십시오. 지파의 대표들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셨던 말씀이라면서 인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요,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목자라는 표현이 나오구요, 이스라엘은 누구의 백성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표현이 뭐에요 바로 주권자입니다. 주권자라는 히브리 단어는요, ‘나기드’라는 단어에요, 이 단어의 원 뜻은요, 본래 듣는자, 순종하는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권자는요, 모든 것을 군림하고 다스리는자가 아니라요, 앞서서 순종하는 자, 앞서서 본을 보이는 자라는 뜻이라는 거에요.
이게 당시 고대 근동 세계관의 왕의 개념과, 이스라엘의 왕의 개념이 천지 차이임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왕이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입니까? 왕이 백성들의 형제입니까? 왕이 백성의 주인이 아닙니까? 왕이 순종하는 자입니까? 하나도 맞지 않는 개념들입니다. 당시의 왕들은요,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 백성이 자신의 소유물이 되며, 그들을 다스리는 절대 권력자입니다. 필요하다면 뭐든지 착취하고 뺏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정말로 신과 같은 절대 권력을 가진 자들이 고대 근동의 왕들이었습니다. 목자요? 아니지요.
그런데 다윗은 어떤 왕으로 세워진거에요? 백성들의 형제로 시작한 존재입니다. 다윗은 왕이라는 자리를 받았지만, 이것은 특별한 자리를 하나님께 받은 것 뿐입니다. 왜요? 그 형제들을 잘 돌아보라고요, 그 형제들이 그 땅에서 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요, 정말로 목자같은거죠. 목자는 양들을 돌보는 존재이잖아요, 이스라엘의 왕은 그래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그 백성은 자신의 백성조차 아니었습니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지요. 그랬기에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그분의 말씀에 맞추어 나라를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게 다윗이 지금 등극하게 되는 자리인 것이죠.
다윗이 이 자리를 잊어버리게 될 때 어떻게 됩니까? 그의 삶은 추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역시 추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중에 밧세바라는 여인을 왕이 가진 권력으로 취하잖아요. 그럴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심판 받습니다. 책망을 들어요. 왕이 신하 여자 하나 취하는게 그리 어려운 일입니까? 당시에는 이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에요. 그런데요? 자신의 권력을 가지고 자신의 형제의 아내를 빼앗은 다윗을 향하여, 나단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책망하시잖아요. 바로 그거에요.
우리는 이 사실을 늘 잊어선 안됩니다. 우리가 어떤 자리를 가지고 있던, 어떤 직함이 우리에게 있던 우리는 무엇이에요? ‘주 안에서 한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한번 따라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한 형제이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버려선 안되는거에요.
이게 복음에 담긴 귀한 가치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섬기고요,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한 형제가 되는 것, 이게 복음이 가진 놀라운 가치입니다. 세상은 늘 무엇으로 이야기 해요? 아무리 평등을 이야기 하고, 공정을 이야기하지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계급을 나누고요, 등급을 나누고요, 편을 나눕니다.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똑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기준을 가지고 급을 나눕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을 이야기 합니까? 갈라디아서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유대인, 헬라인, 종, 자유인, 남자, 여자, 이 모든게 뭐에요? 당시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요, 어떻게 종과 주인이 한 형제가 되요, 남자가 여자가 어떻게 하나가 되요, 그런데 그게 가능한 곳이 바로 어디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래요. 정말로 이 예수 안에서 한 형제됨의 가치가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거에요.
저희가 이번 베트남 비전트립을 다녀왔잖아요. 팀원들이 하나 같이 이야기 하는 은혜가 뭔지 아세요? 주 안에서 한 형제됨을 경험했다는거에요. 인종이 다르고 나라가 다르고, 심지어 사용하는 말도 다릅니다. 정말로 그들이 말하면 뭐 하나 알아먹지를 못해요. 근데 무엇을 경험해요? 주 안에서 한 형제 됨을 경험해요. 전혀 다른 말로 찬양하고 예배하는데, 그들도 예수를 믿고 있고, 우리도 예수를 믿고 있고, 한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됨을 경험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에서 정말로 이 복음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짜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은요, 사람을 사람으로 대할줄 압니다. 세상의 기준가지고 급나누는거 말고요, 내 기준 가지고 저 사람을 상종해도 되는 인간, 상종하지 말아야 되는 인간, 이거 말고요, ‘나기드’ 형제들 앞서서 순종하는자, 앞서서 형제들을 섬기는 자, 그러한 자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번째 살펴볼 부분은요,
여러분, 다윗이 이렇게 형제로, 목자로 왕이 된 다음에 제일 먼저 한 일이 뭔지 아세요? 수도를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윗이 어디 지역을 수도로 정했을까요?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다윗이 왜 하필 예루살렘을 택했는지 아세요? 예루살렘이 어디에 있는 성이냐면요,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에 있던 땅이에요. 어느 지파의 땅도 아니었던거에요. 다윗이 자기 고향인 유다 땅 아무데나 수도를 정할 수도 있었어요. 근데 그렇게 안 했습니다. 특정 지파 편을 들지 않는 자리, 온 이스라엘이 다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자리를 택한거에요. 여러분 이게 우연이겠어요? 1대지에서 우리가 뭘 봤습니까. 다윗은 "골육", 즉 형제로 세워진 왕이었잖아요. 그 정체성을 다윗은 수도를 정하는 이 작은 결정에서도 그대로 지켜냅니다. 왕좌를 어디에 놓을지조차, 자기 편의가 아니라 형제 됨을 기준으로 정한거에요.
그런데 여러분, 이 예루살렘이 비어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정복해야 하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복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6절을 보겠습니다.
"왕과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의 주민 여부스 족속을 치려 하매 그들이 다윗에게 이르러 말하여 이르되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여러분, 이 여부스 사람들 말하는 거 좀 보세요. 얼마나 자신만만합니까. 맹인도 너 정도는 막는다, 다리 저는 사람도 너 정도는 막아낸다, 이렇게 대놓고 다윗을 무시하는거에요. 근데 이 사람들이 이렇게 큰소리칠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예루살렘이라는 성이 삼면이 깊은 계곡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거든요. 저도 예루살렘을 가본적이 있거든요, 정말로 언덕 위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지역입니다. 이 말은 뭐에요? 가장 뚫어내기 어려운 성읍이었던거에요. 그곳에는 여부스 족속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근데 여러분, 이 여부스 족속이 얼마나 끈질기게 그 자리를 지켜왔는지 아세요? 가나안 땅에 있던 여러 민족들 중에서요, 아모리 족속이나 다른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에게 정복당했어요. 히위 족속 같은 경우는 평화 조약을 맺어서 함께 거할 권리라도 얻었고요. 그런데 이 여부스 족속만큼은요, 정복당하지도 않고, 조약을 맺지도 않은 채로, 다윗 때까지 이스라엘 땅 한복판에 그냥 남아있었던 유일한 가나안 족속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 오랜 정복 전쟁을 치르면서도 못 건드렸고, 사사 시대 그 긴 세월 동안에도 아무도 못 건드렸어요. 여러분, 이게 얼마나 긴 세월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속에 이 성은 그냥 "우리 땅 한가운데 있는, 절대 우리 것이 될 수 없는 곳"으로 굳어져 있었던거에요.
그런데 7절 보세요.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여러분, 이 한 줄이 얼마나 놀라운 줄 아세요? 여호수아도 못하고, 사사들도 못하고, 수백 년 동안 이스라엘 땅 한가운데 가시처럼 박혀있던 그 성을, 다윗이 뚫어버려요. 그리고 그 이름을 뭐라고 지어요? "다윗 성"이라고 짓습니다.
근데 여러분, 여기서 더 중요한 게 있어요. 그곳을 시온 산성이라고 지칭합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말도 있는데요, 이 "시온"이라는 이름이요, 성경 전체에서 처음 등장하는 자리가 바로 여기입니다. 창세기부터 사무엘상까지, 그 수많은 페이지 어디에도 이 이름 한 번을 안 나와요. 그런데 다윗이 이 성을 정복하는 바로 이 순간, 시온이라는 이름이 성경에 처음 새겨지는거에요. 이 시온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냥 문자적 의미는요, 보호하다, 방어하다, 견고한 성읍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요, 이 단어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그냥 지명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구원,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언어가 됩니다. 시편 기자들이 그렇게 노래하지요, 시온 산, 선지자들이 그렇게 사모하던 시온, 그 모든 게 다 오늘 이 장면에서 시작되는거에요.
여러분, 다윗이 시온을 정복한 게 단순히 군사적인 승리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다윗은 그곳에 무엇을 세웁니까. 예루살렘 성을 세우고, 그다음에 성전을 세우죠.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는 나라, 하나님이 그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나라를 그 시온 산 위에 세운거에요. 여러분, 이게 뭘 보여줍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세우신 이유가 결국 어디로 향해요? 시온이에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그 자리를 향해 가는거에요.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삶은 어떤 삶이겠습니까. 저는 이게 바로 시온을 소망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이 바라봤던 그 시온,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리, 그 약속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자리를 소망하며 사는 삶이요. 여러분, 그 시온이 처음에 어땠습니까. 크고, 견고하고, 도무지 점령할 수 없어 보이는 곳이었잖아요. 여부스 사람들도 "너는 절대 못 들어온다"고 큰소리쳤던 자리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그곳을 정복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그런 시온이 있지 않으세요? 지금은 없는 것처럼 보이고, 도무지 가지 못할 곳처럼 보이는 그 자리. 회복될 것 같지 않은 관계,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은 문, 언제쯤 이 어려움이 끝날까 싶은 그 시간들. 여러분, 하나님이 다윗에게 그날에 허락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참 안식처가 반드시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 견고해 보이던 자리가 열립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조금 손해 보고, 조금 어렵고, 조금 힘들지라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는요, 그 모든 수고를 잊게 할 만큼 참 평안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번 베트남 선교를 다녀오면서 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일지 다시금 깊이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언어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고, 살아온 삶도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같은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더라고요. 요한계시록 7장 9절 말씀처럼, 모든 열방과 족속과 백성과 방언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며 예배하는 그 모습, 저는 그게 바로 우리가 소망해야 할 그 나라의 모습이라고 느꼈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정복한 시온이 결국 향해간 곳이 거기에요. 하나님의 백성이, 모든 열방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나라. 오늘 우리 앞에 견고해 보이는 자리가 있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그 자리는 반드시 열리고, 우리는 결국 그 참된 시온, 참된 안식에 이르게 될 줄 믿습니다. 그 소망을 붙들고 하나님이 세우신 그 자리에서 말씀에 순종할 때 오 수고와 손해를 넉넉히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삼하 5:11-12
여러분, 다윗이 시온을 정복하고 난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세요? 11절을 보겠습니다.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두로 왕 히람이 최고급 백향목을 보내주고요, 실력 있는 목수와 석수들을 보내줍니다. 그래서 다윗을 위한 궁궐이 세워집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이게 어떤 순간이에요. 형제들에게 부름받아 왕이 되고, 아무도 못 뚫었던 시온을 정복하고, 이제 화려한 궁궐까지 눈앞에 세워지는 순간이에요. 인생의 정점이라고 할 만한 자리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이 정도쯤 되면 어떤 마음이 들겠어요.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내가 해냈구나." 이런 마음이 드는 게 어쩌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12절을 보십시오. 여러분, 이 구절이 오늘 본문 전체의 결론입니다.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알고 또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의 나라를 높이신 줄 알았더라"
여러분, 이 화려한 성공의 정점에서 다윗이 뭐라고 고백해요? "내가 해냈다"가 아니에요.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셨다"는 거예요. 여기 "알았더라"는 말이요, 히브리어로 "야다"라는 단어인데요, 이게 그냥 정보를 아는 것,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에요. 인격적으로, 몸으로, 삶으로 체험해서 아는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다윗은 지금 그냥 "아 그렇구나" 하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자기 존재 전체로 이 사실을 붙들고 있는거에요. "나는 내가 세운 게 아니다. 하나님이 세우셨다."
여러분, 형제로 부름받아서, 시온을 정복하고, 궁궐까지 세워진 그 모든 과정의 끝에서, 다윗의 결론이 이거였습니다. "내가 해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세우셨다." 그리고 여러분, 다윗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한 가지를 더 고백해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의 나라를 높이신 줄 알았더라." 자신이 세워진 이유가 자기 영광이 아니라, 백성을 위함이라는 것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던거에요.
여러분, 저는 이 두 가지 앎이 함께 붙어있다는 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우셨다"는 고백만 있고 "그것이 백성을 위함이었다"는 고백이 없으면, 그 사람은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살 수 있어요. "그래, 하나님이 나를 세우셨으니까 나는 특별한 사람이야." 이렇게 변질될 수 있는거에요. 그런데 다윗은 그 두 가지를 함께 붙들었습니다. 나를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나를 세우신 목적도 나 자신이 아니라 백성이라는 것을요.
이제 우리의 삶에 질문을 던져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세우셨을까요? 나를 왜 불러 주셨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믿게 하셨을까요? 나 잘되라고요? 나 성공하라고요?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살라고요? 아니죠. 다시금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저는 이번 베트남 선교를 다녀오면서 이 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깊이 깨닫게 됐습니다. 우리가 그 땅에 왜 갔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셨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우리는 사실 다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선교사라는 게 저 멀리 특별한 사람들만 부르시는 자리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자리에, 이 가정에, 이 직장에, 이 삶의 현장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왜 우리를 부르시고 이 땅에 보내셨을까요. 오늘 다윗의 고백이 그 답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시고 보내신 이유는요, 바로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서에요. 우리의 형제들을 위해서에요.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섬기고, 세워내고, 키워내는 일. 그 일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거에요. 베트남의 그 땅에서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저는 우리가 그곳에 보내진 이유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걸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들을 섬기라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세우라고 보내신거에요.
여러분, 이게 비단 선교지에서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 하나님이 여러분을 세우신 그 자리도 마찬가지에요. 가정의 자리든, 직장의 자리든, 교회의 어떤 섬김의 자리든, 하나님이 우리를 거기에 세우신 이유는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만나는 누군가를 위해서입니다. 다윗이 왕좌의 정점에서도 "내 백성을 위하여"라고 고백했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그 자리에서 "이건 나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한 자리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다윗은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형제로, 목자로 세워진 왕이었습니다. 다윗은 시온을 소망하는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그 나라를 원했고 그 나라를 세워갔습니다. 그리고 오늘다윗은 그 모든 것의 결론을 고백합니다. 나를 세우신 이는 하나님이시고, 그 목적은 백성을 위함이었다고요. 여러분, 이 세 가지가 다 하나로 이어집니다. 형제로 부름받았기에, 섬기는 왕으로 살았고, 그 섬김의 소망은 시온으로 이어졌고 그는 정점에서도 다윗은 여전히 겸손하게 하나님이 나를 세우셨고, 당신의 백성을 위해 세우셨음을 분명히 고백합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를 마치며 각자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 누가 세우셨습니까. 그리고 이 자리는 누구를 위한 자리입니까. 우리를 세우신 하나님과, 그 목적을 분명히 알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인도 멘트

1단 — 말씀 결단 기도

오늘 말씀을 통해 다윗의 세 가지 고백을 함께 살펴봤습니다. 형제로 세워진 왕, 시온을 완성해가신 하나님, 그리고 "여호와께서 나를 세우셨다"는 다윗의 고백. 이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 앞에 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들을 돌아봅니다. 가정의 자리, 직장의 자리, 교회에서 맡겨주신 섬김의 자리. 그 자리를 군림하는 자리로 여기고, 내 뜻대로 누리려 했던 순간들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잘 될 때는 내가 잘나서 그런 줄 알았고, 형통할 때는 그것이 오직 나를 위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주님, 그 착각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다윗처럼 우리도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나를 세우신 이는 하나님이시요, 그 목적은 나를 위함이 아니라 함께한 이들을 위함이라는 것을요. 우리를 보내신 그 자리에서, 형제를 형제로 여기고, 목자의 마음으로 섬기며, 낮아질수록 오히려 더 견고히 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결단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이름 크게 한번 부르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통성기도)

2단 — 교회와 공동체를 위한 기도

두 번째로 우리 교회 공동체를 위해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주님, 먼저 얼마 전 다녀온 베트남 단기선교를 위해 감사드립니다. 낯선 땅, 낯선 언어 가운데서도 우리 선교팀을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무사히 이 자리로 돌아오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땅에서 우리 팀원들이 흘렸던 땀과 눈물과 섬김이 결코 헛되지 않게 하시고, 그곳에서 만난 형제자매들의 삶 가운데 복음의 열매로 자라나게 하여 주옵소서. 그 땅에 심겨진 씨앗이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열매 맺게 하시고, 우리 공동체가 계속해서 그 형제들을 품고 기도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몸이 약하고 아프신 환우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지금 이 시간에도 병상에서, 혹은 삶의 무거운 짐 아래서 견디고 계신 지체들이 있습니다. 주님이 친히 그들을 붙드시고, 세우시고, 회복시켜 주옵소서.
가정 안에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다. 자녀 때문에 마음이 무거우신 분들, 부부 사이에 아픔이 있으신 분들, 부모님을 향한 근심이 있으신 분들 — 그 가정마다 찾아가 주시고,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말씀의 기준으로 그 가정을 세워가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교회의 각 부서와 사역팀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새 학기와 다가오는 절기를 준비하는 모든 손길 위에 지혜와 하나 됨을 더하여 주시고, 우리 교회가 형제로 세워진 다윗처럼, 서로를 섬기는 공동체로 든든히 서가게 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제목을 위해 다시 한번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통성기도)

3단 — 개인 기도제목으로 마침

마지막으로 여러분 각자가 가지고 나온 개인의 기도 제목을 주님 앞에 올려드리겠습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 누가 세우셨는지 잊고 지내지는 않았습니까. 그 자리가 누구를 위한 자리인지 놓치고 살지는 않았습니까. 오늘 다윗의 고백을 붙들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여쭤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저를 왜 이 자리에 세우셨습니까. 이 자리는 누구를 위한 자리입니까."
"주님, 저를 세우신 분이 주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이 자리가 저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한 자리임을 기억하며 살게 하옵소서. 형제로, 목자로, 보내심 받은 자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게 하옵소서."
각자의 간절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마지막으로 힘써 기도하며 나아가겠습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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