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깔딱 고개: 탄식에서 환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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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7:14-8:2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서론] 한탄과 탄식, 그 숨 막히는 고개

우리나라의 산들을 오르다 보면 종종 ‘깔딱고개’라는 이름이 붙은 구간을 만나게 됩니다. 이름만 들어도 대충 어떤 곳인지 짐작이 갑니다. 경사가 갑자기 가팔라지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숨이 차오릅니다. 다리에는 힘이 빠지고, 심장은 빠르게 뛰고,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만큼 힘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산을 처음 오를 때는 힘이 있습니다. 주변 풍경을 바라볼 여유도 있고, 함께 가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눕니다. 그런데 깔딱고개에 들어서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말수가 줄어들고, 주변 풍경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앞사람의 발만 바라보면서 한 걸음씩 올라갈 뿐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도 이와 비슷한 순간이 있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에는 모든 것이 달라질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쁩니다. 이제는 이전과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데도 나는 여전히 화를 냅니다. 말씀을 읽는데도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미워합니다. 기도하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용서가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7장 후반부에는 바로 이와 같은 인간의 탄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신앙의 탄식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로마서가 이 탄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탄식이 감사로 바뀌고, 절망이 환희로 바뀝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사로잡힌 사람이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해방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이 신앙의 깔딱고개를 넘어가는지를 함께 나누며 은혜를 받는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본론 1] 선을 원하는데, 선을 행할 수 없는 사람

로마서 7장을 읽다 보면 바울이 비슷한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15절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8절입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절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1절에서도 다시 말합니다.“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왜 바울은 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반복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지금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아주 집요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무엇이 선인지 몰라서가 그러는게 아닙니다. 바울은 무엇이 선인지 압니다. 그래서 2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선을 행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선을 원한다고 해서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얼마나 익숙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몰라서만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를 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화를 냅니다. 사람을 미워하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미워합니다. 용서하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지만, 그 사람의 얼굴만 떠올라도 마음이 뒤집어집니다.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말을 뱉어 놓고 난 뒤에 후회합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말씀을 읽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섬겨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 간격이 있는게 문제인 것이죠.
바울은 바로 그 간격을 바라보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로마서 7장의 문제는 단순히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결심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번에는 정말 잘해야지.” 그런데 우리는 이미 얼마나 많이 결심했습니까? 우리는 새해마다 결심합니다. 설교를 듣고 결심합니다. 기도하면서 결심합니다. 실패하고 난 뒤에도 다시 결심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닫게 됩니다. 결심하는 나는 있는데, 그 결심을 끝까지 살아내는 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18절에서 말합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이것이 신앙의 깔딱고개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가장 크게 낙심하는 순간 중 하나는 하나님을 몰라서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알고, 말씀도 알고, 무엇이 옳은지도 아는데 그렇게 살아내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포장하고 싶어집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기를 원합니다. 교양 있고, 도덕적이고, 친절하고, 신앙도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모든 포장을 벗겨내십니다.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알고 있죠.
내 안에 얼마나 많은 욕심이 있는지, 얼마나 많은 질투가 있는지, 얼마나 교만한지, 얼마나 쉽게 사람을 판단하는지, 얼마나 쉽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그것을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죄의 책임을 환경과 사람과 상황으로 돌리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기합리화를 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말한다고 해서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죄가 했으니 나는 책임이 없다”는 뜻으로 말한게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더 무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죄는 내가 가끔 저지르는 실수 정도가 아니라 나를 붙잡아 끌고 가는 하나의 권세라는 것입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나를 사로잡는” 바울은 죄의 힘을 전쟁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죄가 나를 포로로 끌고 갑니다. 나는 선을 원합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자꾸 끌려갑니다. 바울은 바로 그 현실 앞에서 자신의 무능을 발견합니다.

[본론 2] “어떻게”가 아니라 “누가”

우리는 보통 문제가 생기면 방법을 찾습니다. ‘어떻게 하면 화를 덜 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죄를 이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더 잘할 수 있을까?’ 방법을 찾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7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죄의 문제가 단순히 더 좋은 방법 하나를 발견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달리기를 하는 제 모습과 같습니다.
달리기를 할 때 처음에는 괜찮습니다. 5분, 10분 정도는 호흡을 조절하면서 달릴 수 있습니다. 심박수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계에 다다르면 호흡도 너무 가쁘고, 자세를 신경쓰기도 어렵습니다. 2초마다 시계를 보면서 목표한 시간을 채우고 걷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내 의지와 내 능력 사이에 간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영적인 한계점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24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기서 저는 한 단어를 주목하고 싶습니다. “누가” 바울은 “어떻게”라고 묻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바울은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중요한 전환입니다.
신앙의 깔딱고개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 고개를 넘어가는 방법은 우리의 영적인 체력을 조금 더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악물고 조금 더 버티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구원하십니다.” 이 고백은 패배의 선언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서는 이 고백이 오히려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나를 구원하시는 분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본론 3] 탄식에서 감사로

24절과 25절은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24절에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고백하더니 25절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조금 전까지 절망하던 사람이 갑자기 감사합니다.
바울의 고백이 바뀐 이유는 자신의 능력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탄식은 감사로 바뀝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십니다. 나는 나를 건져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건져내십니다. 나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스스로 끊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의 마지막 탄식이 로마서 8장에 들어가면서 놀라운 선언으로 바뀝니다.
8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 문장을 천천히 보십시오.
“그러므로” 앞에서 이야기한 모든 것을 받아서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제” 과거와 다른 새로운 현실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이 약속은 우리의 능력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완벽해졌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주어집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여기에 복음의 환희가 있습니다. 바울은 조금 전까지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탄식했습니다. “나는 왜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합니까?”, “나는 왜 또 넘어집니까?” 그런데 복음은 그런 바울에게 선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여러분,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우리가 이제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로마서 8장에 들어왔다고 갑자기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넘어지고, 실수하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에게 최종 판결을 내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고발로 정죄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단지 “정죄하지 않겠다”고 선언만 하신게 아닙니다. 2절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본문의 주어는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해방하십니다. 이것이 로마서 7장과 8장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로마서 7장의 중심에는 끊임없이 “나”가 등장합니다. 내가 원합니다. 내가 행합니다. 내가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실패합니다. 내가 곤고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에 들어오면 성령께서 등장하십니다. 우리가 더 강한 의지로 생명을 선택하여 자신을 구해내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의 성령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성령을 따라 살아갑니다.
우리가 잘 살아서 해방되는 것이 아닙니다. 해방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순종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변화는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이 우리 안에서 맺어가는 열매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로마서 8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환희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합니다. 로마서 8장에 들어왔다고 인생의 오르막길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8장을 조금 더 읽어보면 오히려 “탄식”이라는 말이 계속 등장합니다. 피조물이 탄식합니다. 우리도 탄식합니다. 심지어 성령께서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우리에게 고통이 없는 인생을 약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깔딱고개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숨도 차고, 넘어지기도 하고, 힘든 일도 겪게 됩니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생명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다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은 “내가 해냈다!”라고 외치는 깔딱 고개의 정상이 아닙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고백하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결론] 신앙의 깔딱고개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신앙의 깔딱 고개가 찾아옵니다.
결심했는데 또 넘어지고, 같은 모습이 반복될 때 우리는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라고 탄식합니다. 신앙의 깔딱 고개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이를 악물고 더 버티는 법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를 건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고, 죄와 사망의 법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더 강합니다.
그러므로 탄식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탄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는 감사로, 마침내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복음의 환희로 바뀌는 은혜가
오송중앙의 모든 가족들의 삶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후 기도문]

하나님 아버지, 선을 원하지만 거듭 넘어지며 탄식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합니다.
신앙의 깔딱 고개에서 내 힘으로 버텨보려던 교만을 내려놓고, 이 사망의 몸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온전히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실패보다 크신 십자가의 은혜로 "결코 정죄함이 없다" 선언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셔서, 오송중앙교회의 모든 가족들이 절망의 탄식을 넘어 구원의 환희와 감사를 누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를 영원히 해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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