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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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여러분, 요즘엔 잘 쓰지 않지만,
예전에 많이 쓰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웃사촌’
저도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이 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대구에 있는 동산동이라는 동네에서 태어나서 자랐는데요..
제 기억에도..
우리 동네 골목이
안타깝지만…
이제는 거의 추억 속으로 사라져가는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내 삶의 울타리를 치고 살아갑니다.
나에게 친절한 사람,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만을 '내 이웃'이라 정의하며 그 테두리 안에서만 호의를 베풉니다.
세상이 정의하는 이웃은 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축복하는 사람에 국한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이웃의 정의를 새롭게 내리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웃에는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고, 뺨을 치며, 심지어 겉옷까지 빼앗으려는 자가 포함됩니다.
세상 기준의 '원수'가 주님 안에서는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 재정의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이웃의 정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세상 기준을 따라 우리의 이웃을 정하고 살아갑니다.
내게 잘 해주고 친절한 사람, 나른 인정해 주는 사람,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을 이웃으로 정의해 버립니다.
그러면서…반대로…
내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는 사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이웃의 범위에서 제해 버립니다.
따라서….오늘 말씀에서 처럼…
세상이 생각하는 이웃과 주님이 생각하는 이웃이 다르다
세상이 생각하는 이웃은 너를 사랑하고, 너를 선대하고, 축복하는 자들이지만,,
주님이 생각하는 이웃은 너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고, 뺨을 치고, 겉옷을 빼앗는 자들까지 포함한다.
결국, 세상에서의 원수도 우리에겐 이웃이다.
2.주님의 제자라면….삶의 수준을 끌어 올려라. ….세상의 수준과는 다른 차원으로 살라.
죄인들의 수준에 머물지 말라…죄인들이 하는 것보다 더 수준 높은 삶을 살아야 한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는 삶을 살라
높은 수준에서의 선을 행하는 구체적인 방식은 무엇인가?
먼저, 입의 말이 달라져야만 한다.
누군가 모욕하는 말을 골라서 할지라도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축복의 말로써 기도하라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이다다.
저주할 때 악담으로 되받지 말고 진심으로 위해서 축복하라는 것이다.
사랑은 감상적인 기분이 아니다.
사랑은 적극적인 친절이다.
사랑은 원수의 선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나를 지금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는 사람의 선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사랑하라’는 말씀 속에 포함되어 있다.
사랑하는 것은 행동으로 선을 베푸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언어로 축복을 비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중심에서부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말과 행동과 표정이 바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면 그들도 우리를 사랑할 것이라는 감상주의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의 현재 모습보다 그들 안에 있는 가능성을 보고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3.결국…제자의 수준은 하나님 아버지의 수준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같이, 하나님 아버지 처럼.....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가야 한다.
제자의 삶에서 하나님의 향기가 나고,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야 한다.
그러므로,…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우리도 자비로워야 한다.
곧…이웃을 비판하지 않는 자비, 정죄하지 않는 자비, 용서하는 자비….
아낌 없이 나의 것을 내어 주는 자비…
그런데, 여’기서….비판하지 말라’라는 명령만큼이나 쉽게 오해되는 말씀도 드물다.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할 이유가 없으니 무슨 일이든지 판단 없이 받아들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기 쉽다.
성경은 타인의 도덕적 상태에 대한 무관심을 결코 권장하지 않는다.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바라보고 진지하게 살피는 일을 그만두라는 권면이 아니다.
여기서 금하는 바는 남의 잘못을 들추고 사사건건 비난하는 태도다.
내가 낫다’는 우월감을 경고한다.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준다.
결론….그리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 받는 복을 누리게 된다.
단지, 세상이 우리를 비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비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로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복이 임한다.
추가 결론…그런데, 위와 같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제자가 해야 할 일은?) ?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기에….
그러므로…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기도는 나를 변화 시키고, 성령의 능력을 받게 한다.
설교 개요
설교 개요
제목: 세상의 수준을 넘어, 아버지의 자비로 살라
본문: 누가복음 6장 27절~38절
핵심 논지: 그리스도인은 원수까지 포함하는 주님의 이웃관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를 닮아가는 높은 차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서론: 이웃의 경계를 넘어서라
서론: 이웃의 경계를 넘어서라
[서론 예화: 링컨과 스탠턴]
[서론 예화: 링컨과 스탠턴]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게는 에드윈 스탠턴이라는 독설가 정적이 있었습니다. 스탠턴은 링컨을 향해 "고릴라", "치졸한 촌뜨기"라며 공개적으로 모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국방장관이라는 가장 막중한 자리에 바로 스탠턴을 지목했습니다. 주변 참모들이 "저 사람은 당신의 원수입니다. 왜 그런 사람을 곁에 두십니까?"라며 극구 말렸을 때, 링컨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원수를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를 나의 친구로 만드는 것입니다." 링컨이 암살당했을 때, 그의 시신 앞에서 가장 많이 눈물을 흘리며 "여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리더가 누워 있다"고 고백한 사람이 바로 스탠턴이었습니다. 링컨이 원수를 이웃으로 품었을 때 악의 연쇄 고리가 끊어졌듯,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원수까지 품는 넓은 이웃관을 요구하십니다.
본론: 세상과 다른 차원의 제자도
본론: 세상과 다른 차원의 제자도
1. 제자의 삶: 세상의 수준을 뛰어넘어라 (27-35절)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죄인들의 수준에 머물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고, 받을 것을 계산하며 꾸어 주는 것은 불신자들도 하는 세상의 계산법입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세상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삶의 기준을 끌어올려야 합니다.
높은 수준의 선을 행하는 구체적 방식은 가장 먼저 '입의 말'에서 시작됩니다.
나를 모욕하는 사람을 향해 가장 아름다운 축복의 말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주를 받을 때 악담으로 되받지 않고, 그 사람의 선을 진심으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낭만적인 감상주의가 아닙니다. "내가 사랑해주면 저 사람도 언젠가 변하겠지"라는 기대나, 그 사람 안에 있는 가능성을 보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상대의 상태와 상관없이 행동으로 선을 베풀고, 언어로 축복을 빌며, 중심에서부터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적극적인 친절입니다.
2. 제자의 목표: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를 닮아가라 (36-38절)제자가 도달해야 할 삶의 수준은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입니다. 제자의 삶에서 하나님의 향기가 나고 그분의 형상이 드러나야 합니다. 주님은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자비는 타인을 비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으며, 용서하고 내어주는 자비입니다.
[오해에 대한 경고]: "비판하지 말라"는 말이 타인의 도덕적 상해나 죄악에 대한 '방관과 무관심'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타인의 삶을 진지하게 살피는 일을 멈추라고 하지 않습니다.
금하는 것은 남의 허물을 들추고 사사건건 비난하며,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는 영적 우월감입니다. 정작 자신의 허물은 보지 못하는 눈먼 태도를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본론 예화: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과 안재선]
[본론 예화: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과 안재선]
1948년 여순사건 당시, 손양원 목사님은 사랑하는 두 아들(동인, 동신)을 공산주의 청년 안재선에 의해 잃었습니다. 두 아들의 장례식을 치른 후, 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죽인 원수 안재선을 사형선고에서 구출해내고, 자신의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손 목사님은 단지 감상적인 불쌍함으로 그를 품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 음식과 옷을 제공하고 그를 위해 날마다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안재선은 훗날 양아버지의 그 무조건적인 자비에 깨어져 참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손 목사님의 삶에는 자신의 자존심이나 세상의 보복 법칙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신 형상이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결론: 성령의 능력으로 기도하라
결론: 성령의 능력으로 기도하라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모욕하는 자를 축복하며, 우월감 없이 용서의 자비를 베풀 때 어떤 복이 임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참된 복을 누리게 됩니다. 단순히 세상이 나를 알아주는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비판하지 않으시고, 정죄하지 않으시며, 나를 용서하시는 은혜를 입습니다. 또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38절) 안겨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높은 수준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이 높은 수준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우리의 연약한 혈기와 본성으로는 절대로 원수를 사랑할 수도, 자비를 베풀 수도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나를 변화시키고,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오늘 이 시간 세상의 계산기를 내려놓고,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아버지의 자비를 세상 가운데 흘려보내는 거룩한 제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