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라는 이름의 비정함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5 views
Notes
Transcript

사사기 21:1-12

찬송가 369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오늘은 ‘정의라는 이름의 비정함’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나누겠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참 정의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정의로운 삶,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지요, 그런데 이런 모습들이 잘못된 모습으로 나아가는 경우들이 참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들의 잘못이나 비리, 죄가 발견되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어, 그 사람을 향해 돌을 던집니다.
왜 그럴까요? 정의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그런 이유로 돌을 던지는 것이죠, 저런 사람은 마땅이 처벌을 받아야 되, 저런 사람은 사회에서 매장당해야 해, 이렇게 정죄의 칼을 들이미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남을 정죄하던 손가락이, 정작 자기 자신이나, 자기와 가까운 사람의 잘못 앞에는, 슬그머니 방향을 바꾸는 것이 사람들의 참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시죠, 형제의 눈에 있는 티끌은 보고, 네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말씀하십니다.
정의라는 명분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잘못된 삶의 행태들이 죄인들의 삶에 보여지는 것이지요. 우리 안에도 이와 똑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실수나 잘못은요 도무지 용서가 안되는데요, 내 실수, 내 자녀의 실수는 그냥 그럴 수 있지 하고 넘어가버리는 마음, 이게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정의의 민낯인지 모릅니다.
오늘 사사기 21장은 사사기의 마지막 장인데요, 그야말로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이 얼마나 영적으로 어두웠는지를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기브아의 죄를 심판한다면서 형제 지파인 베냐민을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습니다. 잘못한거 맞지요, 그런 악인들을 안넘겨준거 베냐민 지파가 괘씸하고 잘못한거 맞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들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베냐민은, 그들이 척결해야 하는 없애버려야 하는, 진멸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끌어 안아야할 형제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정의와, 율법의 기준을 가지고 베냐민을 처단했습니다. 그리하여 거의 한 지파가 사라질 지경이 되버린거에요. 성경에 보면요, 그 지파 성인 남성이 겨우 600명만 남게 됩니다. 죄를 심판한다는 그 명분이, 어느새 형제 전체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게 되버린거에요.
그리고 오늘 본문 2절과 3절에 보면요,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하나님 앞에 큰 소리로 울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겨서 한 지파가 없어지냐고 우는거에요. 이게 참 웃긴 모습이지요. 하나님이 허락했지만, 하나님이 넘겨주셨지만, 누가 한 일입니까? 그 심판을 내린 것은 자기들 손으로 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신들과 상관 없는 일처럼, 책임을 온전히 하나님께 넘기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게 참 교묘한 마음입니다. 겉으로는 애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 눈물의 방향이 자기 죄를 향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되게 하셨습니까"라는 말 속에는, 은근히 이런 마음이 숨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정의를 세우려 했을 뿐인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졌습니까." 자기 손으로 저지른 일의 책임을, 하나님께 슬며시 떠넘기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진짜 애통입니까. 아닙니다. 진짜 애통이라면 이렇게 물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습니까." 방향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눈물은 흘렸지만, 그 눈물이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원망의 눈물이었을 가능성이 큰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종종 "정의"라는 이름 아래서, 사실은 하나님을 향한 불만을 품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내린 판단, 내가 내뱉은 말, 내가 저지른 선택으로 인해 관계가 무너지고 상황이 틀어졌을 때, 우리는 정직하게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보다,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기게 하셨습니까" 하고 묻고 있지 않습니까. 죄를 끌어안고 애통하는 대신, 그 책임을 은근히 하나님께 전가하는 연약함이 우리 안에도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잘못된 판단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관계가 깨지고, 스스로 만든 문제로 괴로워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반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왜 나를 이런 상황에 두셨을까"라는 원망입니까, 아니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하는 정직한 자기 성찰입니까. 이스라엘의 눈물처럼, 우리의 눈물도 방향이 잘못되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새벽, 우리 마음속에 있는 눈물의 방향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향해 흘리고 있는 그 눈물이, 정말 내 죄를 끌어안는 애통입니까, 아니면 은근히 하나님께 책임을 떠넘기는 원망입니까. 내 손으로 저지른 일 앞에서 정직하게 "제 잘못입니다" 하고 엎드릴 수 있는, 그 정직한 애통을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들의 새벽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번째 살펴볼 부분은요, 그들이 뒤늦게 이런 후회의 눈물을 흘린후 한 일이 무엇일까요?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계산을 해냅니다. 1절에 보면요, 그들은 이렇게 서로 약속합니다. 베냐민을 치게 될텐데, 우리 중에 누구든지 베냐민에게 딸을 주지 않을 것이다. 서로 맹세를 한거에요. 그러니깐 베냐민 지파가 후손이 끊어질 것을 이미 그들이 약속한 겁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그들이 어떻게 풀어요? 5절에 보면요, 미스바 총회에 나오지 않는 자들을 죽이기로 맹세했다. 그 때 안나온 사람들이 누구에요? 8-9절을 보면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안나오는거에요.
그래서 그곳을 쳐서, 베냐민 지파의 후손을 이을 여자들을 구하겠다는거에요. 남녀 어린 아이를 치고요, 모든 남자, 남자와 동침한 여자들까지 진멸하기로 합니다. 말이 되는 논리입니까?
자기들이 성급하게 뱉은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이번에는 전혀 상관없던 길르앗 야베스라는 마을을 통째로 침공합니다. 남자들을 죽이고, 아이들을 죽이고, 결혼한 여인들을 다 죽입니다. 그리고 12절에서 남겨둔 것이 무엇입니까.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한 처녀 사백 명." 그 처녀들을 살려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애처로워서가 아닙니다. 베냐민에게 데려다주기 위해서, 즉 자기들이 만든 문제를 메울 재료로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 이 모든 일에 붙은 이름이 무엇입니까. "정의"입니다. "우리는 맹세를 지켰을 뿐이다." "미스바 총회에 오지 않은 죄를 심판했을 뿐이다." 겉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그 정의라는 이름 아래서 실제로 벌어진 일은 무엇입니까. 아무 죄 없는 마을 하나가 통째로 희생된 겁니다. 형제 하나를 살리겠다고, 전혀 상관없는 또 다른 생명들을 제물로 삼은 겁니다.
이게 참 인간이 가진 잔인함입니다. 그들은 베냐민 지파를 살리겠다는 명분, 그리고 자신들이 한 맹세를 지키겠다는 이유로요, 한 마을을 몰살시킵니다. 또 다른 희생양을 제물로 삼는 것이지요.
여러분,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이게 이스라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희생시킬 때, 절대 그냥 희생시키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럴듯한 명분을 만듭니다.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명분으로 힘없는 사람들의 자리를 손쉽게 정리합니다. "내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의 아픔에는 눈을 감습니다.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 한마디로, 내가 누군가에게 준 상처와 손해를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립니다. 여러분, 이 명분들이 하나같이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나라, 경제, 가족, 생계 — 다 소중하고 다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그럴듯하기 때문에, 그 명분 뒤에 숨은 잔인함을 우리는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이스라엘도 그랬습니다. "형제 베냐민을 살려야 한다"는 명분, "우리가 한 맹세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 다 그럴듯했습니다. 그런데 그 그럴듯한 명분 아래서, 아무 상관없던 길르앗 야베스의 남자들과 여인들과 아이들이 칼에 죽었습니다. 명분은 언제나 희생자의 얼굴을 지워버립니다. "경제를 위해서"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뒤에서 밀려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습니다. "가족을 위해서"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로 인해 상처받는 다른 누군가의 얼굴을 보지 않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도 이스라엘에게는 그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얼굴과 이름을 가진 사람들로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십시오. 나는 어떤 명분으로 누군가를 희생시키고도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직장에서, 가정에서, 관계 속에서, 우리도 그럴듯한 명분 하나를 앞세워 누군가의 아픔을 손쉽게 지나쳐버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세상 속에 있는 잔인함이고, 동시에 우리 마음속에도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잔인함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다시금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을 위하여 남을 희생제물 삼는 인생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희생제물이 되어줄 수 있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는 우리를 희생시킬 명분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었고,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였습니다. "이들의 죄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셔도 아무도 그분을 탓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명분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심판을 자기 자신에게로 가져가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신을 십자가 위에 내어주신 겁니다. "어쩔 수 없이 너희를 희생시켜야겠다"가 아니라, "내가 너희 대신 희생하겠다"는 사랑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세상의 방식과 완전히 다른 방식입니다. 세상은 늘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누군가가 항상 나 아닌 다른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자리에 스스로 들어가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잔인함을 보며 마음이 무거웠다면, 이제 그 무거움을 안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기꺼이 희생 제물이 되어주신 그 사랑 앞으로요.
여러분, 우리도 이 주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명분 앞에서도 남을 희생시켜 내 자리를 지키려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내가 손해 보고, 내가 낮아지고, 내가 기꺼이 희생하는 사람. 그것이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과는 정반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를 닮은 삶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새벽, 내가 붙들고 있는 그 명분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 명분이 혹시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게 만드는 가림막은 아닌지요. 그럴듯한 이유 뒤에 숨겨진 얼굴들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 자리에서 기꺼이 희생할 줄 아는, 우리를 위해 제물이 되어주신 그 주님을 닮은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무리 기도문

하나님 아버지, 오늘 새벽 이 말씀 앞에 저희를 세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형제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고도, 정작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며 원망 섞인 눈물을 흘렸던 이스라엘의 모습이 낯설지 않습니다. 저희도 그렇습니다. 제 손으로 저지른 일 앞에서 "제 잘못입니다" 하고 정직하게 엎드리기보다,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기게 하셨습니까" 하고 슬며시 책임을 돌리며 살아온 날들이 있었습니다. 주님, 그 연약함을 이 시간 고백합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나라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먹고살기 위해서 — 저희는 그럴듯한 명분 뒤에 숨어, 누군가의 얼굴과 아픔을 외면해온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그 명분이 소중한 것일수록, 그 뒤에 감춰진 잔인함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주님, 저희 마음의 눈을 열어 주셔서, 제가 지금 붙들고 있는 명분이 혹시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가림막은 아닌지 정직하게 분별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주님, 저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저희를 희생시키실 명분이 얼마든지 있으셨음에도, 오히려 스스로 십자가 위에서 희생 제물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남을 제물 삼아 자기를 지키는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어 남을 살리시는 주님의 방식을 오늘 저희 삶에 심어 주옵소서.
오늘 하루, 저희가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정직하게 마주하게 하시고, 손해 보더라도 기꺼이 낮아지고 섬길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정의를 앞세워 남을 판단하기보다, 먼저 제 자신을 살피는 겸손한 하루가 되게 하시고, 주님이 저희를 위해 짊어지신 그 사랑을 오늘도 잊지 않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