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 않은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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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사기 21:16-25
16 회중의 장로들이 이르되 베냐민의 여인이 다 멸절되었으니 이제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얻게 할까 하고
17 또 이르되 베냐민 중 도망하여 살아 남은 자에게 마땅히 기업이 있어야 하리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짐이 없으리라
18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 하니라
19 또 이르되 보라 벧엘 북쪽 르보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쪽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도다 하고
20 베냐민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포도원에 숨어
21 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하나를 붙들어 가지고 자기의 아내로 삼아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22 만일 그의 아버지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시비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하건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의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하매
23 베냐민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춤추는 여자들 중에서 자기들의 숫자대로 붙들어 아내로 삼아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성읍들을 건축하고 거기에 거주하였더라
24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곳에서 각기 자기의 지파,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갔으니 곧 각기 그 곳에서 나와서 자기의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서론
서론
2011년, 우리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폐 질환으로 산모와 어린아이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원인은 가습기 살균제였습니다. 한 기업이 "인체에 무해하다"며 시장에 내놓은 제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대로 된 흡입 독성 검증조차 거치지 않은 채 서둘러 내놓은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도, 그 기업은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유리한 결과가 나오도록 연구를 조작하고, 불리한 자료는 숨겼습니다. 그리고 그 회사는 "인과관계가 명확히 입증되지 않았다면서 오랫동안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그 사이 가장 큰 대가를 치른 것은, 자기 목소리를 낼 수조차 없었던 아기들과 산모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분노합니다. "어떻게 사람 목숨을 두고 저럴 수가 있나." 그런데 사사기 21장은 더 심각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검증도 없이 성급히 내리는 판단과, 그 판단이 낳은 문제를 덮으려는 모습, 그리고 절차대로 했으니 약자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책임지려 하지 않는 모습들이 적날하게 드러납니다. 문제는 이런 모든 악한 행동들이 이스라엘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사기 21장은 이스라엘이 베냐민 지파와 벌인 참혹한 내전 직후의 이야기입니다. 19-20장에서 한 여인이 성적 노리개와 폭력으로 비참하게 죽고, 그 일 때문에 이스라엘 열한 지파가 베냐민과 전쟁을 벌여 베냐민을 거의 전멸시킨 사건을 보았습니다. 베냐민 지파에 살아남은 자는 육백 명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위기를 자기들 손으로 수습하려 합니다. 그런데 그 수습의 과정에서, 처음에는 슬픔으로 시작된 일이 결국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킵니다. 그리고 본문은 이 모든 일을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21:25)
설교의 요점
설교의 요점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스스로 낸 성급한 결정은 더 큰 죄를 낳고, 그 죄는 결국 가장 약한 사람들을 희생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만났을 때, 먼저 우리의 생각이나 판단이 아니라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신,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연결어
연결어
이제 이 메시지를 본문의 흐름을 따라 세 장면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급한 맹세. 둘째, 더 큰 폭력. 셋째, 사람을 도구로 삼은 궤변. 이 모든 장면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해서 일어난 결과였습니다.
첫번째로 살펴볼 것은 성급한 맹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여쭙지 않고 하는 서약은 불행을 몰고 옵니다. (사사기 21:1-7)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여쭙지 않고 하는 서약은 불행을 몰고 옵니다. (사사기 21:1-7)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스바에서 맹세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1절). 아마도 이 맹세는 베냐민 기브아 사람들이 저지른 끔찍한 죄에 대한 정당한 분노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나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거의 전멸했고, 살아남은 사람은 육백 명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벧엘에 모여 하나님 앞에 앉아 저녁까지 소리 높여 통곡합니다. "어찌하여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되었나이까"(3절). 열두 지파 중 하나가 사라질 위기 앞에서 그들은 진심으로 슬퍼했습니다.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까지 드립니다(4절).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통곡했고, 예배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해야 할 한 가지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묻는 일입니다. 20장을 보면 이스라엘은 전쟁 중에 하나님께 몇 번이나 물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싸우리이까"(20:18), 패배한 뒤에 또 묻고(20:23), 언약궤 앞에서 제사장을 통해 다시 묻습니다(20:27-28). 전쟁의 전략은 그렇게 신중하게 하나님께 물으면서, 정작 자기들이 했던 잘 못된 맹세와, 그 맹세가 낳은 위기 앞에서는 단 한 번도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은 벧엘에 모여 울고, 제사를 드리고, 스스로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예증
성급한 맹세가 낳는 비극은 사사기 안에서 이미 한 번 등장했습니다. 입다입니다. 그는 암몬과의 전쟁을 앞두고 "내가 이기고 돌아올 때 내 집 문에서 나를 영접하는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삿 11:30-31). 그리고 그 문에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외동딸이었습니다(삿 11:34).
하나님은 이런 맹세를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도, 자신의 열심과 감정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잠언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함부로 이 물건을 거룩하다 하여 서원했다가 뒤에 궁리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덫이 되느니라"(잠 20:25). 전도서 기자도 같은 말을 합니다. "네 입을 서둘러 열지 말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라"(전 5:2, 5). 성경은 일관되게 말합니다. 감정이 앞선 성급한 결정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었다 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적용
여러분, 우리 삶에도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화가 나서, 상처받아서, 때로는 나의 열심에 사로잡혀, 결심이나 약속을 쉽게 하지 않습니까? "다시는 그 사람 안 본다." "이제 이 일에서 손 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렇게 하겠다." 어디서 이런 결심이 나옵니까. 대개 감정이 가장 격렬한 순간, 기도보다 감정이 앞서는 자리에서 나옵니다. 왜 이것이 위험합니까. 미스바의 맹세처럼, 그 순간에는 정당해 보이지만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결심은 나중에 반드시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살펴볼 것은 더 큰 폭력인데요.
죄로 덮은 해법은 더 큰 폭력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사사기 21:8-14)
죄로 덮은 해법은 더 큰 폭력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사사기 21:8-14)
미스바에는 또 다른 맹세도 있었습니다. 총회에 참석하지 않는 자는 죽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5절, 8절). 이스라엘은 명단을 확인하다가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큰 용사 만 이천 명을 보내어 이렇게 명령합니다. "가서 야베스 길르앗 주민을 칼날로 치되 여자와 아이를 막론하고 진멸하라... 오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를 살려두라"(10-12절).
잠시 멈추어 생각해 봅시다. 그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베냐민 지파가 거의 사라진 것을 슬퍼하며 통곡하던 바로 그 백성이, 이제는 또 다른 성읍 하나를 통째로 진멸하고 있습니다. 여자와 아이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베냐민의 멸절을 막겠다는 선한 목적이, 야베스 길르앗이라는 또 다른 공동체 전체를 희생시키는 결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얻은 처녀 사백 명을 베냐민 생존자들에게 주지만(14절), 육백 명 중 사백 명만 채워졌을 뿐 여전히 이백 명이 부족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장 전체를 관통하는 패턴을 봅니다. 성급한 맹세(1차 죄)가 있었고, 그 맹세를 지키려고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2차 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 대신, 그들은 자신들이 했던 서원을 지키기 위해 더 큰 폭력을 선택한 것입니다.
예증
목적이 선하다는 이유로 수단을 정당화하는 이 논리는 분명 죄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이런 자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3:8). 아무리 선한 목적이 있어도, 악한 수단은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교회 역사도 이 경고를 뼈아프게 증언합니다. 십자군 전쟁이나 종교재판은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지킨다"는 선한 명분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국 무고한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폭력을 가한 사건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명분이 거룩할수록, 그 명분으로 정당화된 폭력은 더 위험합니다.
적용
내가 잘못이나 실수를 만회하려고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면, 문제입니다. 실수를 감추려는 거짓말, 깨진 관계를 수습하려다 또 다른 상처 주기, "이번만 이렇게 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며 스스로를 설득하는 순간에 일은 더 커집니다.
왜 이것이 심각합니까. 야베스 길르앗 사건처럼, 죄를 죄로 덮으려는 시도는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반드시 새로운 피해자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제일 좋은 길은 솔직하게 문제를 직면하는 것이고,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죄도 드러나지만, 결국 진실은 반드시 승리하고,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죄를 죄로 덮지 말고, 죄는 사실과 진실로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번째로 생각할 것은, 사람을 도구로 삼은 궤변입니다.
세번째로 생각할 것은, 사람을 도구로 삼은 궤변입니다.
여러분, 형식 때문에 사람을 버리는 것은 궤변입니다.
여러분, 형식 때문에 사람을 버리는 것은 궤변입니다.
길르앗 야베스, 처녀 사백 명으로도 여전히 이백 명이 부족했습니다. 장로들은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합니다. 마침 매년 여호와의 절기가 실로에서 열리고 있었습니다(19절). 실로는 하나님의 처소, 언약궤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장로들은 살아남은 베냐민 남자들에게 이렇게 지시합니다. "포도원에 숨어 있다가, 실로의 딸들이 춤추러 나오거든 각각 그 중에서 자기 아내를 붙잡아 베냐민 땅으로 데리고 가라"(20-21절).
그리고 만약 그 딸들의 아버지나 형제가 항의하러 오면 이렇게 말하겠다고, 미리 답까지 준비해 둡니다.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22절). 참으로 교묘한 논리입니다. 처음 맹세는 "우리가 딸을 아내로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준 것이 아니라 빼앗기게 놔둔 것이니, 맹세를 어긴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판결합니다. 결국 서원한 것은 형식적으로 지켰지만, 하나님의 뜻과 사람에 대한 존중은 완전히 짓밟혔습니다.
이 본문에서 가장 마음 아픈 부분은, 실로의 딸들도 야베스 길르앗의 처녀들도 본문 어디에서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저 "필요한 숫자"로 계산될 뿐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 전체가 19장, 한 여인이 이름 없이 폭력당해 죽은 사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죽음에 분노하여(복수하려고) 시작된 전쟁이 20장을 거쳐, 결국 또 다른 이름 없는 여성들에 대한 폭력으로 21장이 끝맺습니다. 폭력을 바로잡겠다는 이야기가, 또 다른 폭력의 순환으로 마무리되는 것입니다.
베냐민 사람들은 이대로 행하여 각자 아내를 얻어 돌아가 성읍을 재건합니다(23절). 이스라엘 백성도 각자 자기 지파와 가족과 기업으로 흩어져 돌아갑니다(24절). 그리고 본문은 마지막 한 문장으로 사사기 전체를 마무리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5절)
예증
법의 형식은 지키면서 그 정신을 배반하는 모습은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있음에도, "내가 드릴 것을 하나님께 고르반, 곧 예물로 드렸다"고 선언하기만 하면 부모를 봉양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막 7:9-13). 예수님은 이것을 "너희가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21:22의 논리도 정확히 같은 구조입니다. 문자적으로는 규정을 지켰지만, 그 규정을 지키려고 하는 본질은 완전히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마 23:23). 겉으로 보이는 형식에는 철저하면서, 정작 정의와 자비와 신실함이라는 본질은 버리는 것, 이것이 사사기 21장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간 길이었고,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걸어간 길이었습니다.
적용
우리가 규정이나 절차는 지키면서, 실제로는 힘없는 사람을 존엄의 대상이 아닌 그저 내가 마음대로 해도 되는 물건처럼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특히 여성을, 사사기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철저히 유린당했습니다)
직장에서 "규정상 문제없다"며 넘기는 결정들, 가정에서 자녀나 배우자의 마음보다 겉으로 보이는 절차를 앞세우는 순간, 교회 안에서 사람을 세우기보다 일을 처리하는 데만 집중하 것들이 바로 이런 궤변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실로의 딸들처럼, 이름조차 불리지 못한 채 누군가의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사람이 바로 지금 우리 곁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묻지 않고 낸 성급한 맹세가, 어떻게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지고, 결국 형식은 지키기 위해, 가장 약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세 장면 모두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통곡했고, 제사를 드렸고, 회의를 열어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의지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사백 년에 가까운 사사 시대 전체가 결국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렇다면 이 어두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우리는 무엇을 붙들어야 하겠습니까.
결론
결론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사사기가 이렇게 어두운 문장으로 끝난 직후, 성경은 바로 이어서 또 다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룻기입니다. 룻기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룻 1:1). 같은 시대, 같은 배경입니다. 그런데 룻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름 없는 도구로 취급된 여성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보아스라는 한 사람이 이방 여인 룻을 율법의 정신을 따라 존귀하게 맞아들이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계보에서 다윗이 태어나고, 마침내 참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십니다(마 1:5-6).
여러분, 사사기 21장의 사람들에게는 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소견대로 맹세하고, 자기 소견대로 그 맹세를 지키려 폭력을 저지르고, 자기 소견대로 사람을 도구 삼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왕이 계십니다. 룻기를 지나 다윗을 거쳐 마침내 오신 그 왕,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사람을 수단으로 삼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희생하여 우리를 살리신 왕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입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먼저 내 소견을 따라 서둘러 판단하지 말고, 우리의 참 왕이신 그리스도께 묻는 것입니다. 묻는 다는 것은 신뢰한다는 것이고, 의지한다는 것이고,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다시 질문해봅시다. 나는 감정이 앞선 결심을 하나님께 묻지 않고 밀어붙이고 있지 않은가? 나는 잘못을 또 다른 잘못으로 덮으려 하지 않는가? 나는 형식을 지킨다는 이유로 사람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왕이 없던 시대의 사람들처럼 살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정한 왕이 계십니다. 그 왕께 묻는 한 주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