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긴 몸, 하나 되게 하신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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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찢긴 몸, 하나 되게 하신 몸」
제목: 「찢긴 몸, 하나 되게 하신 몸」
본문: 사사기 19:22-30(요약 낭독), 20:1-2, 20:26-28, 21:1-3, 21:25 / 분량: 약 20분 / 대상: 온세대 (어린이~노년)
설교 전 목회적 유의사항: 본문 19장에는 성폭력과 살해, 시신 훼손 등 매우 참혹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온세대 예배에서는 이 사건의 세부 묘사를 절대 생생하게 재현하지 말고, 아래 설교문처럼 절제된 언어로 "심한 폭력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정도로 요약해 전달하시기 바랍니다. 유아·유치부가 함께하는 예배라면 담당 교역자와 사전에 상의하여 해당 부분의 표현 수위를 한 번 더 조정하시길 권합니다.
1. 우리의 이야기 — "깨진 걸 고치려다 더 깨뜨린 적, 있나요?" (3분)
1. 우리의 이야기 — "깨진 걸 고치려다 더 깨뜨린 적, 있나요?" (3분)
혹시 유리컵이나 화분을 깨뜨려서, 순간접착제로 몰래 붙여본 적 있으신가요? 조각을 겨우 맞춰 붙여도, 금이 간 자리는 여전히 보이고, 심지어 다시 만지다가 손을 베이기도 합니다. 깨진 것을, 깨진 조각으로 고치려 하면 오히려 더 다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관계도 비슷하지 않나요? 친구와 크게 싸운 뒤에, 화해한다고 한 말이 오히려 상처를 더 깊게 만든 경험, 다들 있으실 겁니다. 반 친구 하나가 잘못을 저지르면 순식간에 단체 채팅방이 갈라지고, 편이 나뉘고, 그 친구를 향한 험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걸 본 적 있을 거예요. 어른들의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서, 심지어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누군가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던 정당한 분노가 시간이 지나며 또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방식으로 번져가는 걸 우리는 자주 봅니다.
정말 궁금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우리 손으로, 우리 방식대로 바로잡으려 할 때, 우리는 정말 그것을 고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깨진 유리조각으로 또 다른 상처를 만들고 있는 걸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볼 사사기 20-21장은, 바로 이 질문 앞에 이스라엘 온 백성을 세워 놓은 이야기입니다.
2. 본문의 이야기 — 정당한 분노가 부른 세 번의 폭력 (10분)
2. 본문의 이야기 — 정당한 분노가 부른 세 번의 폭력 (10분)
사사기의 마지막 두 장, 20장과 21장을 이해하려면 먼저 19장에서 있었던 일을 알아야 합니다. 한 레위인에게 아내처럼 함께 살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여행길에 베냐민 지파의 성읍 기브아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을 때, 그 성읍의 불량한 사람들이 몰려와 그 여인에게 극심한 폭력을 가했고, 결국 그녀는 그 밤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맙니다. 성경 역사상 유례없는 참혹한 사건이었습니다.
레위인은 분노합니다. 그런데 그의 방식이 매우 충격적입니다. 그는 그녀의 시신을 열두 조각으로 나누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각 지역으로 보냅니다. "이 일을 보라. 말하라. 상의하라." 그것은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전쟁 소집장이었습니다.
그러자 오늘 본문 20장 1절,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 모여 여호와 앞에 이르니." 브엘세바에서 단까지, 이스라엘 전 국토에서 40만 명의 사람들이 "마치 한 사람처럼" 모입니다. 사사기 전체를 통틀어 이스라엘이 이렇게 완벽하게 하나로 뭉친 순간은 이때가 유일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단 한 번도 이렇게 다 함께 모인 적이 없던 이스라엘이, 분노와 응징을 위해서는 즉시, 완벽하게 하나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에게 그 불량한 자들을 넘기라고 요구하지만 베냐민은 거절하고, 결국 이스라엘 지파와 베냐민 지파 사이에 전쟁이 벌어집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나님은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답하십니다(20:18). 순종해서 올라간 이스라엘은, 그런데 그 전투에서 2만 2천 명을 잃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묻고, 다시 올라가지만, 이번에는 1만 8천 명을 잃습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했는데 왜 두 번이나 참패할까요? 성경학자들은 이 부분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짚습니다. 이 전쟁은 베냐민만의 죄를 심판하는 자리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는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기브아의 죄는 베냐민 한 지파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사기 내내 반복되어 온 이스라엘 전체의 영적 부패가 곪아 터진 상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승리를 주시기 전, 이스라엘 자신이 먼저 낮아지기를 기다리십니다.
셋째 날, 이스라엘은 벧엘로 올라가 울며 종일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20:26). 그제야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올라가라. 내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20:28). 이스라엘은 매복 작전으로 마침내 승리하지만,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베냐민 지파의 성읍들이 모두 불타고, 살아남은 사람은 바위 굴로 도망친 단 600명의 남자들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하나가 거의 완전히 사라질 뻔한 순간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면 좋았겠지만, 21장은 계속됩니다. 승리한 이스라엘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벧엘에서 웁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이스라엘 중에 일어나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21:3). 문제는, 그들이 미스바에서 감정적으로 서원한 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21:1). 하나님이 명하신 서원이 아니라, 자기들이 분노 속에서 스스로 만든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면서 동시에 베냐민 지파를 살리기 위해, 이스라엘은 또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미스바 총회에 오지 않았던 야베스 길르앗을 기습해 그곳 처녀 400명을 데려와 베냐민 생존자들에게 아내로 줍니다(21:10-12). 그런데도 수가 모자라자, 실로에서 열리는 축제 때 춤추는 처녀들을 베냐민 남자들이 숨어 있다가 붙잡아 데려가도록 방조합니다(21:19-23). 정의를 세우겠다며 시작한 전쟁이, 결국 또 다른 여성들의 희생으로 마무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사기는 이 한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분노도, 눈물도, 금식도, 제사도, 이스라엘을 진짜 하나 되게 하지 못했습니다. 정의를 향한 그들의 분노는 결국 스스로 정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번 오늘 본문이 말하는 진리를 되새겨 봅시다. 우리를 참으로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분노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찢기신 예수님의 몸입니다.
3. 우리의 한계 — 왜 우리 힘으로는 안 되는가 (3분)
3. 우리의 한계 — 왜 우리 힘으로는 안 되는가 (3분)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라면 저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우리도 뉴스나 SNS에서 누군가의 잘못을 보면 순식간에 분노하고, 그 분노를 함께 나눌 사람들과 빠르게 하나가 됩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우리의 정당한 분노가 상대를 향한 무자비함으로, 또 다른 사람을 향한 낙인과 상처로 번지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가요.
왜 우리는 스스로 이 문제를 고칠 수 없을까요? 유리병이 깨졌을 때, 그 깨진 유리 조각을 손에 쥐고 다른 것을 고치려 하면 결국 내 손도, 옆 사람 손도 베이게 됩니다. 우리의 정의감 자체가 이미 깨어진 세상, 깨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묻고, 울고, 금식하고, 제사까지 드렸습니다. 그런데도 그 모든 종교적 열심이 그들을 진짜 회복으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어린 친구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친구랑 화해하고 싶어서 미안하다고 말했는데, 오히려 더 싸운 적 있죠? 우리 마음속에는 화해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있어요. 그래서 우리 힘만으로는 진짜 화해가 잘 안 돼요." 우리에게는 우리 밖에서 오는, 더 완전한 화해의 길이 필요합니다.
4. 예수님 — 찢기심으로 하나 되게 하신 분 (5분)
4. 예수님 — 찢기심으로 하나 되게 하신 분 (5분)
다시 그 참혹한 장면을 떠올려 볼까요. 레위인은 죽은 여인의 몸을 열두 조각으로 나누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보냈습니다. 그 찢긴 몸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지만, 그것이 부른 것은 전쟁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보면, 이 장면과 정확히 반대되면서도 놀랍도록 닮은 또 하나의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며 떡을 떼어 나눠 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라"(눅 22:19). 사도 바울은 이 떡을 두고 이렇게 설명합니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 10:17).
찢긴 몸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번엔 정반대입니다. 사사기의 찢긴 몸은 사람들을 소집해 서로를 죽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찢긴 몸은 서로 원수 되었던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하나 되게 합니다. 에베소서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6). 이스라엘과 베냐민을 갈라놓았던 그 피의 벽을,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로 완전히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 레위인은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가장 약한 사람, 자신에게 속한 그 여인을 밖으로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로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선한 목자"라 부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레위인은 자기를 지키려고 약한 자를 내어주었지만, 예수님은 약한 우리를 지키시려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를 대표하고 이끌어야 할 그 자리에서, 인간의 지도자는 실패했지만, 참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완전하게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어린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해줄 수 있겠습니다. "사사기 이야기에서는 찢겨진 몸이 사람들에게 '가서 싸우자'고 불렀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몸을 우리에게 나눠 주시면서 '이제 그만 싸우고, 나를 통해 다시 하나가 되렴'이라고 말씀하세요." 어른들에게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평생 풀지 못한 그 관계, 그 분노, 그 원수 됨이, 여러분의 화해 노력이나 정의감으로는 결코 완전히 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리스도의 몸이,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의 그 담을, 그리고 여러분과 원수 된 그 사람 사이의 담을 이미 허물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5. 그래서 우리는 — 오늘, 여기서 (3-4분)
5. 그래서 우리는 — 오늘, 여기서 (3-4분)
어린이 여러분에게: 친구와 다퉜을 때,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기보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먼저 화해의 길을 여셨다는 걸 기억하고 먼저 손 내미는 사람이 되어 볼까요?
청소년·청년 여러분에게: SNS에서 누군가를 향한 집단적 분노에 휩쓸리기 전에, 잠깐 멈춰서 물어보세요. "이 분노가 정말 그 사람을 바로잡는가, 아니면 나도 그 분노에 취해 있는 건 아닌가?" 편을 가르는 자리보다, 십자가 앞에서 화해자가 되는 자리에 서 보세요.
가정과 삶의 무게를 짊어지신 여러분에게: 직장과 가정, 공동체 안에서 성급한 판단과 손절 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용서와 회복의 자리를 만들어 보세요. 특히 여러분 곁의 가장 약한 사람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 주세요 — 자신을 지키려 약자를 내어준 레위인이 아니라, 약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따라서요.
인생의 연륜을 쌓아오신 어르신들에게: 오랜 세월 쌓여온 공동체와 가정의 갈등을, 화해되지 않은 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이 걸어오신 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화해의 유산을 다음 세대에게 보여주시고 전해 주세요.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똑같습니다. 다시 한번 함께 되새겨 봅시다.
"우리 힘으로는 화해할 수 없어요. 우리를 위해 찢기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로 만드실 수 있어요."
그분의 몸은 우리를 전쟁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평화로 부르셨습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 힘으로 붙잡고 있던 정의와 분노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참된 화해자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