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어느 때가지니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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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오늘 시편과 함께 걷는 인생길 시리즈의 세 번째를 맞이했습니다.
지난 첫 번째 설교에서는 시편을 묵상하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복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이미 모든 충만한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교제하며 그분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설교에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와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다 합치더라도 다다를 수 없는 위대한 권능과 권위를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그 높으신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생각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인간성 회복의 길이라는 것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한 주간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는 찬양을 계속 반복해 보자고 말씀드렸었지요.
그런데 오늘 시편은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오늘 시편은 비탄의 시, 혹은 탄식의 시라고 불립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은 그렇게 위대하시고, 그분이 우리를 그렇게 귀중하게 여기신다면 한 가지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인생은 늘 평안하고 행복하지 않은가?
왜 우리의 삶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있고, 고통과 고난이 있는가?
더 나아가 그런 어려운 일들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닥친 어려움을 신속하게 해결해 주시지 않는가?
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때때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오늘 시편 13편은 바로 이 질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불안한 현실과 그 현실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먼저 우리의 불안한 현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우리의 불안한 현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상이 완전히 정의롭고 공평하다고 믿으시는 분이 계신가요?
물론 세상의 모든 정의와 공의가 무너져서 완전히 무법천지가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언뜻 보면 세상은 어느 정도 질서를 유지하며 돌아갑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운전해서 교회에 오셨을 텐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통신호와 법규를 지킵니다. 모든 사람이 신호를 무시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운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내가 신호를 잘 지키고 법규를 잘 지키더라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신호를 어길 수도 있고, 갑작스러운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오늘이 어제와 비슷할 것이라고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타락한 세상에서는 언제든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질병이 찾아오기도 하고, 사고가 생기기도 하고, 관계가 깨어지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내가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모든 결과를 내가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질서가 있지만, 동시에 깨어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반 은혜로 세상이 유지되고 있지만, 죄로 인해 타락한 세상에는 여전히 불의와 고통과 죽음이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삶 속에서 불안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모든 일이 잘되어 가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우리 마음 한편에는 작은 불안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 그 막연한 불안이 실제 상황으로 나타나 우리의 삶에 고통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호사다마라는 사자성어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좋은 일에 좋지 않은 일이 끼어들기도 한다는 뜻이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우리 교회 본당을 리모델링하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너무 기쁘고 감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염려가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 과정에서 서로 의견이 달라서 마음에 상처를 받는 분이 생기지는 않을까, 혹시 우리가 기대하지 못한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오늘 시편에서 다윗이 겪는 고난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삶이 잘되어 가는 때에도 인간은 내일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는 작은 예입니다.
아직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지 못한 우리는 죄로 물들어 타락한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우리는 때때로 불의를 경험하고 고통과 고난을 경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여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도 이 고난과 고통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 이제부터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고난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교회 생활을 잘하면 세상 사람들이 겪는 질병과 사고와 상실과 눈물이 모두 우리를 피해간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붙들려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 가운데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고,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며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소망하게 하십니다.
고난과 고통을 똑같이 겪는 우리가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고난과 고통을 똑같이 겪는 우리가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고통 가운데 도움을 구할 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아픔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고, 눈물로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정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지금 당장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움직이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세상이 불의하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세상의 불의함을 날마다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의롭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왜 그 불의를 즉시 바로잡아 주시지 않는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온 세상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전쟁과 재난과 고통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묻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신다면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우리의 개인적인 삶 속에서도 같은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왜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오늘 시편 13편의 1절과 2절이 바로 그 질문을 던집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다윗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윗이 묻습니다.
“하나님, 나를 잊으신 것입니까?”
“왜 얼굴을 숨기십니까?”
“원수가 나를 치고 있는데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침묵이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시고 영원히 잊으신 것처럼 느껴졌던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헤아려 본 슬픔』이라는 책에서 비슷한 경험을 고백합니다.
이 책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뒤 깊은 슬픔 속에서 쓴 기록입니다.
그 고난 가운데 루이스도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때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오히려 이런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내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분이라면 어떻게 하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믿어 왔는데,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자신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데도 아무런 대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니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인지 다시 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루이스는 시간이 지나면서 한 가지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는 왜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허락하셨는지 모든 이유를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아내를 되돌려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의 모든 질문에 설명이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고통 가운데 그의 질문이 조금씩 바뀌어 갔습니다.
“하나님을 통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인가?”
라는 질문에서
“나는 하나님 자신을 원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시편 13편에서도 볼 수 있는 변화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를 놓치면 안 됩니다.
다윗은 단순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3절과 4절을 보면 다윗은 여전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다윗은 실제적인 도움을 구합니다.
상황의 변화를 구합니다.
자신을 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문제의 해결을 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프면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눈물로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믿음에는 그것보다 더 깊은 자리가 있습니다.
다윗은 5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여기에서 사랑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언제 문제가 끝날지는 알지 못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침묵하셨는지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다시 붙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먼저 바뀐 것이 아닙니다.
먼저 바뀐 것은 다윗의 시선입니다.
문제만 바라보던 시선이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던 다윗은 여전히 그 “때”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다림 가운데 한 가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께서 왜 지금 침묵하시는지 그 구체적인 이유를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고통의 이유를 우리가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고통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능력과 섭리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무엇보다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 주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십자가는 변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우리의 느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우리가 왜 지금 이 고난을 겪는지는 모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즉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시는지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때문에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셨다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의 구주께서도 버림받은 것 같은 깊은 어둠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통 가운데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라고 부르짖을 때 예수님은 그 외침을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통 밖에서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라 친히 고통 속으로 들어오신 분입니다.
C. 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고통을 “귀먹은 세상을 깨우시는 하나님의 확성기”에 비유했습니다.
그 말은 고통 자체가 선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통을 무조건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메시지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통조차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지하던 거짓된 안전을 흔드시고,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을 깨뜨리시며, 하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 고통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더 분명히 깨닫습니다.
눈물이 없는 나라,
죽음이 없는 나라,
더 이상 아픔도 이별도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간절히 기다리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삶의 불안과 걱정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오늘 고통과 고난 가운데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외면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싫어하시기 때문에 침묵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능력이 없기 때문도 아닙니다.
왜 하나님께서 지금 이 고난을 허락하시며 왜 즉시 응답하지 않으시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붙들고 계십니다.
어떤 고난도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모든 이유를 다 알아야만 하나님을 믿겠다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유를 알지 못할 때에도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입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라고 눈물로 물으면서도,
동시에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시편 13편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성도가 탄식과 간구를 멈추지 않고, 십자가로 드러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의지하도록 부른다.
시편 13편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성도가 탄식과 간구를 멈추지 않고, 십자가로 드러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의지하도록 부른다.
이번 한 주도 시편 13편을 묵상하고 찬양하시면서,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그분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다시 기쁨과 소망을 회복하며 모든 고난과 고통과 불안을 믿음으로 걸어가는 복된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