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써 덮어두고 사는 것

이사야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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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애써 덮어두고 사는 것
본문: 이사야 38:1-22
주제: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시간이므로, 남은 삶을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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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존경받는 목회자이자 설교자였던 찰스 스펄전은 목회자들에게 죽음의 현장을 항상 가까이 하라고 강조했습니다.
죽음 앞에 서보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인생의 진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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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초대 문화부장관을 지내신 이어령박사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애써 덮어놓고 사는 것 가운데 하나가 ‘죽음’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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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치 죽지 않을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삶의 진실이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자주 잊고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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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전도서 7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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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우리에게 늘 죽음을 생각하며 우울하게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죽음을 기억할때 비로소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선명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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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피스현장에서 간호사로 오랫동안 일한 브로니 웨어는 자신의 경험을 ‘죽을때 가장 후회하는 다섯가지’라는 책에 담았습니다.
그가 돌보았던 사람들에게서 반복적으로 들었던 후회를 다섯가지로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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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다른 사람의 기대에 맞추기보다 나 자신에게 진실한 삶을 살 용기가 있었더라면.
둘째, 그렇게 일만 하며 살지 않았더라면.
셋째,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용기가 있었더라면.
넷째, 친구들과 계속 연락하며 지냈더라면.
다섯째, 내가 좀 더 행복하게 살도록 허락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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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이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마음에 와 닿을까요?
그런데 조금 더 중요한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만약 오늘 하나님께서 “이제 네 삶을 정리하여라”고 말씀하신다면, 나는 무엇을 가장 후회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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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1]
오늘 말씀의 히스기야가 바로 그런 말을 듣습니다.
히스기야는 아직 자신의 삶이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언자 이사야가 찾아와 청천벽력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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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입니다.
“네가 죽게 되었으니, 너의 집안 모든 일을 정리하여라. 네가 다시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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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런 말을 들으니 히스기야는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당시 히스기야와 유다를 위협하고 있던 가장 큰 문제는 앗수르였습니다.
앗수르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유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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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히스기야에게 앗수르보다 더 무서운 적이 찾아온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죽음입니다.
앗수르라는 적은 성벽을 쌓고 군대를 동원해서 어느 정도 막아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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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죽음은 다릅니다.
어떤 군대를 동원해도 막을수 없습니다.
자신의 신하가 대신 죽어줄수도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왕도 평범한 사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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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으로 향합니다.
왜 일까요?
분명 사람이나 주변환경을 피해 하나님께만 집중하여 기도하려는 것입니다.
그가 바라보고 의지할분은 오직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전 교회에서도 이렇게 벽보고 기도하시는 분들이 계셨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만 집중하여 기도하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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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진실하게 살아온 것, 온전한 마음으로 순종한 것, 주님 보시기에 선한 일을 한 것을 기억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마치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평상시에는 이런 기도가 올바른 기도인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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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은 죽음 앞입니다.
자신의 작은 행실 하나라도 하나님 앞에 항변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행을 많이했어도 죽음을 막을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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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우리에게 아주 불편하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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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기에는 지금 죽으면 말이 안될거 같은 경우가 있습니다.
“왜 하필 지금입니까?”
“왜 하필 이 사람입니까?”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죽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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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과 함께1’을 보면 말을 못하시는 어머니가 홀로 두 아들을 어렵게 키워 내셨습니다.
두 아들 모두 착하고 훌륭합니다.
그런데 그 두 아들을 모두 잃게 됩니다.
이런 가슴 아픈 일이 영화에서만 일어나는게 아닙니다.
우리 삶 가까이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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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우리의 계획과 상관없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시편 90편 12절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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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기억하라, ’메멘토모리’는 것은 우울하게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죽음을 기억할때 오늘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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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정말 세월이 빠르게 흘러갑니다.
흔히 나이가 인생의 속도라는 말을 합니다.
20대는 시속 20킬로미터로 가고, 30대는 30킬로미터, 40대는 40킬로미터로 간다는 것입니다.
제가 20대에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실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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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이처럼 빠르게 흐르고, 죽음은 우리가 전혀 컨트롤할수 있는게 아니고 말입니다.
그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이 주신 오늘이라는 하루를 소중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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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는 죽음의 통보를 받고 나서야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통보가 오기 전에 우리도 스스로 물어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주신 이 하루를 나는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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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2]
그런데 놀랍게도 죽음을 앞둔 히스기야에게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5-7절입니다.
15년 더 살게 해주시고, 앗수르로부터 예루살렘을 보호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에 대한 어마어마한 증거까지 보여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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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런 생각이 들수 있습니다.
“와~히스기야는 어떤 기도를 했길래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해주실까?”
“생명을 연장시켜주시는 어떤 비법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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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히스기야가 올바른 삶을 살고, 선행을 해서 응답하신게 아닙니다.
특별한 기도 방법이나 기도문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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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입니다.
“네가 기도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고, 네가 흘리는 눈물도 내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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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단지 히스기야와 유다를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다윗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슬품중에 있는 히스기야와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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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약속의 증거로 해시계에 비친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해시계는 원래 ‘아하스의 계단’을 의미합니다.
계단에 드리워지는 해 그림자를 통해 시간을 측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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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나님은 그 그림자를 열 계단이나 뒤로 물러나게 하십니다.
이것은 시간을 되돌린다는 의미입니다.
지나간 시간을 어떻게 다시 돌릴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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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이런 표징이었을까요?
하나님은 ‘시간의 주인이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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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우리는 시간이 내 것이라고 여깁니다.
내 시간이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며 시간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시간이 누구거일까요?
회사주인거라서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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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고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떨까요?
시간은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뜬 것도 당연한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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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이 질문이 남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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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3]
사실 오늘 본문은 열왕기하20장과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열왕기하에는 없는데 이사야서에만 있는 특별한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9-20절에 기록된 이사야의 찬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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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는 왜 굳이 이 긴 찬양을 여기에 기록했을까요?
이게 병에서 낫고난후 고백한 것이거든요.
히스기야는 병이 나았다는 사실보다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이 깨달은 바를 고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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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앞부분은 자신의 처참한 신세를 한탄하고 슬퍼하는 내용입니다.
이제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땅에서 이제 더이상 주님도 못보고, 사랑하는 사람도 볼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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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생명이 목동이 장막을 거두듯, 베틀에서 베를 거두듯 사라지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만큼 죽음은 히스기야에게 절망적인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원해달라고 울부짖었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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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8-19절에서 자신이 살아야할 중요한 이유 하나를 발견합니다.
바로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죽어서는 주님을 찬양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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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것은 주님을 찬양할수 있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죽음 앞에 서면서 삶의 목적을 새롭게 한 것입니다.
그 동안 왕으로서 얼마나 바쁘게 살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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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다스려야 했습니다.
앗수르의 위협에 대비해야 했습니다.
수많은 국정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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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중요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죽음 앞에 서보니 그 모든 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왜 살아있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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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크고 더 많이 무엇인가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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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히스기야는 훌륭한 왕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 왕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중심이 흔들렸던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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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절에서 그는 사는날 동안 성전에서 주님을 찬양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수금을 뜯으며 찬양하겠다고 고백합니다.
15년이라는 시간동안 주님을 찬양하며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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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도대체 주님을 찬양하며 사는 것이 무엇일까요?
다 내려놓고 하루 종일 기도와 찬양만 하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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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는 여전히 왕으로서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돌보고, 주어진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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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중심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왕의 자리가 내 인생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일이 내 인생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재산과 성공이 내 인생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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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더 가져야 행복할 것 같고,
다른 사람보다 더 인정받아야 성공한 것 같고,
내가 계획했던 것을 이뤄야만 인생을 잘 산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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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죽음앞에서 그런 비교는 앞에서 본것처럼 가장 후회할 일중 하나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선물같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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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에게 15년이라는 시간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우리에게도 오늘이라는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15년이 남아있을수도 있습니다.
30년이 남아있을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생각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도 알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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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오늘 이 시간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 시간 찬양하는 삶을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그게 선물을 주신 주님께 드리는 최고의 보답일 것입니다.
히스기야처럼 우리도 주님을 찬양하는 여생이 되길, 오늘이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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