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헤립의 나, 하나님의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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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alm 34:18–22 NKRV
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20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21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 22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찬송가: 200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Isaiah 37:21–38 NKRV
2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사람을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네가 앗수르의 산헤립 왕의 일로 내게 기도하였도다 하시고 22 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23 네가 훼방하며 능욕한 것은 누구에게냐 네가 소리를 높이며 눈을 높이 들어 향한 것은 누구에게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에게니라 24 네가 네 종을 통해서 주를 훼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나의 허다한 병거를 거느리고 산들의 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의 깊은 곳에 이르렀으니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향나무를 베고 또 그 제일 높은 곳에 들어가 살진 땅의 수풀에 이를 것이며 25 내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으니 내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하수를 말리리라 하였도다 26 네가 어찌하여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네가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 27 그러므로 그 주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 수치를 당하여 들의 풀 같이, 푸른 나물 같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 28 네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나를 거슬러 분노함을 내가 아노라 29 네가 나를 거슬러 분노함과 네 오만함이 내 귀에 들렸으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를 꿰며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돌아가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30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올해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둘째 해에는 또 거기에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셋째 해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 31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32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33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화살 하나도 이리로 쏘지 못하며 방패를 가지고 성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며 흉벽을 쌓고 치지도 못할 것이요 34 그가 오던 길 곧 그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35 대저 내가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6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37 이에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38 자기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그의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하였으므로 그의 아들 에살핫돈이 이어 왕이 되니라
들어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조금 앞으로 가야 합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의 군대가 유다의 성읍들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이제 예루살렘 성문 앞에 진을 쳤습니다. 랍사게라는 사람이 성벽 아래에서 유다 말로 크게 외칩니다. “너희가 의지하는 것이 무엇이냐? 애굽이냐? 상한 갈대다. 여호와냐? 내가 여호와의 뜻이 아니고 이 땅에 올라왔겠느냐?”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 나라의 신들 중에 누가 자기 땅을 내 손에서 건져냈느냐?”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랍사게는 단순히 항복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유다 백성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지워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롱을 편지에 적어 히스기야에게 보냅니다.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받고 무엇을 했습니까? 14절입니다. 그는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았습니다. 접어서 품에 넣지 않았습니다. 손에 쥐고 흔들지도 않았습니다. 펴 놓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답장입니다.
오늘 본문은 단지 앗수르 군대가 물러간 기적 이야기 이지만 이 본문은 사실 두 개의 “내가”로 표현되는 주도권이 정면으로 부딪히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는 산헤립으로 대변되는 세상으로 “내가 주도한다”라고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주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새벽에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을 결정하는 “내가”가 누구의 “내가”입니까? 산헤립입니까? 하나님입니까?
1. 전형상화: 하나님은 산헤립의 ‘내가’를 꺾으시고 자신의 ‘내가’를 드러내십니다
1) 하나님의 답장은 “네가 내게 기도하였도다”로 시작합니다 (21절)
21절을 보십시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편지로 써서 보낸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네가 앗수르의 왕 산헤립의 일로 내게 기도하였도다.”
여러분, 이 첫 마디가 저는 참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의 답변은 “내가 앗수르를 치겠다”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네가 내게 기도하였도다”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확인해 주시는 것은 전쟁의 판도가 아니라 한 사람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나서 이렇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이 기도가 하나님께 닿기는 했을까?” “너무 사소한 문제로 하나님을 귀찮게 하는 건 아닐까?” 그런데 하나님은 응답을 시작하시면서 먼저 그 기도를 세어 주십니다. 여러분이 오늘 새벽 이 자리에 나와 드린 그 기도, 말이 잘 나오지 않아 한숨만 쉬고 앉아 있던 그 시간, 하나님은 그것을 “네가 내게 기도하였도다”라고 세어 주십니다.
히스기야라는 이름의 뜻을 아십니까? 히브리어로 히즈키야후, “여호와께서 강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의 이름에 이미 답이 있었습니다. 그는 강한 왕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강하게 하시는 왕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강한 성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강하게 하시는 성도입니다.
2) 산헤립의 조롱은 결국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22–25절)
23절에서 하나님은 산헤립에게 직접 물으십니다. “네가 훼방하며 능욕한 자가 누구냐? 네가 소리를 높이며 눈을 높이 들어 향한 자가 누구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니라.”
여기서 “훼방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하라프’입니다. 조롱하고, 모욕하고, 벗겨서 수치를 준다는 뜻입니다. 산헤립은 자기가 지금 유다라는 작은 나라를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상대한 것은 유다가 아니다. 나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히브리어로 ‘카도쉬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십니다. 이 칭호는 구약 전체에 서른한 번 나오는데 그중 스물다섯 번이 이사야서에 나옵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는 스랍의 찬양을 들었던 그 하나님이십니다. 산헤립은 지금 그분을 향해 입을 열었습니다.
이어지는 24절과 25절에 산헤립의 자랑이 나옵니다. 한번 세어 보십시오. “내가 많은 병거를 거느리고”, “내가 산들의 꼭대기에 올라갔으며”, “내가 그 높은 백향목을 베고”, “내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고”, “내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하수를 말렸노라.” 온통 “내가”입니다.
여러분, 교만이 무엇입니까? 없는 일을 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산헤립이 한 말은 대부분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정복했고, 실제로 강했습니다. 교만은 사실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의 주어를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두고 “내가 했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교만입니다.
3) 그러나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이 태초부터 정하신 일이었습니다 (26–29절)
이제 26절에서 하나님의 “내가”가 나옵니다. “네가 어찌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니라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
여러분,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산헤립이 무너뜨린 그 성읍들, 그가 자기 힘으로 정복했다고 자랑하던 그 모든 전쟁이, 사실은 하나님이 태초부터 정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산헤립은 자기가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그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였을 뿐입니다.
이사야는 이미 10장 15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끼가 어찌 그것으로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그것을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도끼가 나무를 찍고 나서 “내가 이 나무를 넘어뜨렸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도 그렇게 살 때가 있지 않습니까?
28절과 29절에서 하나님은 결론을 내리십니다. “네 앉고 서고 나가고 들어오는 것과 나를 거슬러 분노함을 내가 아노라. 네가 나를 거슬러 분노함과 네 오만함이 내 귀에 들렸으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를 꿰며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돌아가게 하리라.”
갈고리로 코를 꿰고 재갈을 물린다는 표현은 앗수르 사람들이 포로들에게 실제로 하던 방식입니다. 부조에 그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산헤립이 다른 민족에게 하던 그 방식 그대로 그를 다루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예루살렘에 화살 하나 쏘지 못하고 오던 길로 돌아갔습니다.
2. 형상화: 오늘 우리 손에 들린 편지는 무엇입니까
주님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오늘 우리의 새벽으로 가져와 봅시다.
여러분은 오늘 새벽 무엇을 들고 나오셨습니까? 우리에게도 산헤립의 편지 같은 것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받아 든 진단서일 수 있습니다. 자꾸 줄어드는 통장 잔고일 수 있습니다. 아이의 성적표, 회사에서 통보받은 인사 발령, 몇 년째 풀리지 않는 관계의 상처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 손에 편지처럼 들려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의지하는 것이 무엇이냐? 여호와냐? 그것으로 이 상황이 해결되더냐?”
랍사게의 조롱이 무서운 이유는 거짓말이어서가 아닙니다. 절반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열거한 정복의 목록은 진짜였습니다. 우리 손에 들린 편지도 그렇습니다. 진단서에 적힌 병명은 진짜입니다. 잔고의 숫자도 진짜입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그 사실이 하나님보다 커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예배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곧 우리가 크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크게 여기는 것이 사실상 우리의 신입니다. 새벽마다 무릎을 꿇으면서도 마음속에서는 계속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앉아 있으면서 실은 다른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히스기야와 우리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성전에 가지고 올라가서 여호와 앞에 펴 놓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편지를 접어서 품에 넣고 밤새 뒤척입니다. 아니면 손에 쥐고 사람들에게 흔들며 하소연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 활짝 펴 놓았습니다.
저는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두려워 사소한 일에 거짓말을 하던 제 모습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좀처럼 고쳐보려고 했지만 쉽게 고쳐 지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실수한 모습을 인정하면 스스로 패배자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저를 꽉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여전히 반복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제 모습을 보고 견딜 수가 없는 비참한 마음과 절망감속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모든 수치와 비아냥과 모욕과 실패와 고난을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의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아니 그 평가가 여전히 신경이 쓰이기는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은 없습니다. 그리고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자 더 이상 거짓말로 나를 포장하거나 숨을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려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는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옮겨 놓는 것입니다. 산헤립의 편지를 성전에 펴놓은 히스기야에게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편지가 도착합니다.
3. 재형상화: 하나님의 ‘내가’를 붙들고 오늘을 사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세 가지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1) 편지를 펴 놓으십시오
오늘 새벽 여러분이 들고 나온 그것을 하나님 앞에 펴 놓으십시오. 정리해서 아뢰지 않으셔도 됩니다. 히스기야도 그 편지의 내용을 다듬어서 올려드리지 않았습니다. 조롱이 적힌 그대로 펴 놓았습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를 준비하느라 기도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정리되면 기도하겠다고 미룹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리된 마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펼쳐진 마음을 원하십니다. 오늘 아침 그 자리에 그대로 펴 놓으시기 바랍니다.
2) 남은 자의 뿌리를 내리십시오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징조를 주십니다. 30절과 31절입니다. 금년에는 저절로 난 것을 먹고, 이듬해에는 그것에서 난 것을 먹지만, 삼 년째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원을 심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여러분, 회복은 폭발하듯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첫해에 창고를 가득 채워 주시지 않았습니다. 저절로 난 것으로 한 해를 견디게 하시고, 이듬해도 견디게 하시고, 삼 년째에 심고 거두게 하셨습니다. 아래로 뿌리를 박는 일이 먼저이고 위로 열매를 맺는 일은 그다음입니다. 지금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뿌리를 내리는 계절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32절 마지막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여기 “열심”이라는 히브리어는 ‘킨아’입니다. 이 단어는 질투라고도 번역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것에 빼앗기지 않으려는, 뜨겁고 배타적인 마음입니다. 여러분의 회복은 여러분의 의지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열심이 이룹니다.
3) 궁극적으로 우리는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제 3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지키시는 이유가 나옵니다. “대저 내가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여러분,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다 백성이 잘해서가 아닙니다. 히스기야의 신앙이 완전해서도 아닙니다. “내가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이름과 다윗에게 주신 언약, 그것이 구원의 근거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에스겔 36장에서 들었던 말씀과 정확히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구원의 근거는 언제나 우리 밖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근거를 찾으면 절망뿐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에서 찾으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면 그 다윗의 자손이 마침내 오셨을 때, 그 성은 그분을 지켰습니까?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다윗의 참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문 밖으로 끌어내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하고 말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36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었습니다. 십팔만 오천 명이 죽고 한 성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분이 죽으시고 수많은 사람이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원수에게 쏟아져 예루살렘이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자기 아들에게 쏟아져 우리가 살았습니다.
마지막 38절을 보십시오. 산헤립의 최후입니다. “자기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그의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죽이고.” 산헤립은 자기 신의 신전에서, 자기 아들의 칼에 죽었습니다. 그가 섬기던 신은 그를 지켜 주지 못했고, 그의 아들은 그를 찔렀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어떠하십니까? 그분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습니다. 산헤립의 신은 아들에게 죽임당하는 아버지를 지켜 주지 못했지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지키셨습니다. 이것이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입니다. 우상은 우리에게 바치라고 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십니다.
결론
주님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새벽에 두 개의 주도권 “내가”  앞에 있습니다.
하나는“내가 병거를 거느리고 내가 올라갔고 내가 말렸노라” 하는 산헤립의 “내가”가 있습니다. 그 것은 요란하고 위협적이지만, 결국 자기 신의 신전에서 자기 아들의 칼에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네 앉고 서고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내가 아노라, 내가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시는 하나님의 “내가”가 있습니다. 이 “내가”는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지키셨습니다.
우리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를 위협하는 편지의 내용이 아닙니다. 그 편지를 펴 놓은 자리에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내가”입니다.
오늘 하루도 손에 편지를 붙잡고 계산하며 살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내려 놓고 사시기 바랍니다. 아래로 뿌리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의 남은 인생을 이루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아멘.
마무리 기도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이 새벽에 우리를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손에 들린 편지들이 너무 커 보여서 하나님이 작아 보이던 날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밤새 그것을 접어 품에 넣고 뒤척이던 우리를, 오늘 이 자리에 불러 펴 놓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의 “내가”를 내려놓게 하시고 하나님의 “내가”를 붙들게 하옵소서. 우리의 앉고 서고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을 신뢰하게 하시고, 열매가 보이지 않는 계절에도 아래로 깊이 뿌리내리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십팔만 오천이 죽고 한 성이 산 것이 아니라, 한 분이 죽으시고 우리가 살았음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오늘 하루 그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를 지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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