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세계를 돌보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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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와 환경 돌봄

시편 139:7–12 NKRV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로마서 8:18–22 NKRV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사랑합니다. 꿈사땅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기후위기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마 과학시간이나 뉴스나 유튜브를 통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기후위기라고 하면 우리에게는 조금 멀게 느껴질 수 있다. “지구가 조금 더워지는 것 아닌가?”,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야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한번 생각해 보자. 예전에는 쉽게 볼 수 없었던 기록적인 폭염과 집중호우, 갑작스러운 홍수와 산불, 극심한 가뭄과 이상기후가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너무 많은 비가 내려 사람들이 집을 떠나야 하고, 또 어떤 지역에서는 비가 오지 않아 농사를 짓기 어려워지고 있다. 바다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해양 생태계가 무너지고, 산호초가 사라지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동식물들이 살아갈 터전을 잃어가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날씨가 조금 이상해진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생태계 전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생태계라는 것은 어려운 말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생명의 연결된 관계를 말한다. 나무가 있고, 곤충이 있고, 새가 있고, 물고기가 있고, 강과 바다가 있고, 그 안에서 인간도 함께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 한 부분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다른 부분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숲이 사라지면 그곳에 살던 동물들이 살아갈 곳을 잃는다. 나무가 줄어들면 대기 중의 탄소를 흡수하는 능력도 약해진다. 바다가 오염되고 수온이 올라가면 해양생물들이 살아가기 어려워진다. 결국 그 영향은 인간에게도 돌아온다. 우리가 먹는 음식, 마시는 물, 마시는 공기,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후위기는 단순히 “환경을 깨끗하게 사용하자”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심각하게 깨어지고 있다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생태계와 환경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환경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문제로만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내가 분리수거를 조금 한다고 세상이 달라지겠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환경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성경은 이 세상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창조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이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을 시편 139편은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시며 우리가 있는 모든 곳을 아시는 분이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로마서 8장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성경은 인간만 바라보지 않는다. 죄로 인해 인간의 삶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가 함께 신음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탄식하는 세계를 외면해야 할까?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를 귀하게 여기고, 그 세계를 돌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 말씀을 통해 왜 우리가 생태계와 환경을 돌보아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7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질문한다.
시편 139:7 NKRV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편 139:8–9 NKRV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이 질문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신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시편 기자가 아무리 멀리 도망가더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수사학적 질문이다. 첫째 연(7절)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모두 아신다는 사실을 고백했다면, 이제 둘째 연(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하나씩 떠올린다.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심지어 “흑암이 나를 덮고 밤이 나를 두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신다. 여기에서 하늘과 스올, 바다와 흑암은 단순히 특정한 장소 몇 곳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편 기자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공간의 극단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임재가 어느 한 장소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가장 높은 곳인 하늘에도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이 죽음 이후에 들어가는 가장 깊은 곳인 스올에도 하나님이 계신다. 동쪽의 끝을 상징하는 새벽 날개를 타고 날아가거나 서쪽의 끝을 상징하는 바다 끝에 거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해 하늘에서 땅까지, 동쪽에서 서쪽까지, 삶에서 죽음까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은 없다.
시편 139:11–12 NKRV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특히 11–12절에서 시편 기자는 흑암을 이야기한다. 흑암은 단순히 빛이 없는 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불확실함과 두려움을 가져오는 영역을 상징하기도 한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는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보지 못하시는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 숨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시편 기자는 곧바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이 표현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창조의 시작에서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빛이 생겼고,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 따라서 시편 139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임재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모든 장소를 돌아다니며 지켜보고 계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모두 다스리시는 창조주이시며, 인간이 알지 못하고 통제할 수 없는 영역조차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10절에서 시편 기자는 중요한 고백을 한다.
시편 139:10 NKRV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편재성(어디에나 계심)이 단순히 인간을 감시하고 따라다니는 무서운 임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어디에서든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시고 붙드시는 분이다. 우리가 가장 높은 곳에 있든 가장 낮은 곳에 있든, 빛 가운데 있든 어둠 가운데 있든,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결국 시편 139편 7–12절은 “하나님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과 동시에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 준다. 시편 기자는 어디로 가든 하나님께서 이미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가 바라보는 생태계와 환경의 문제에도 중요한 관점을 보여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과 생태계 역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공간이 아니다. 하늘과 바다, 땅과 숲,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자연의 영역까지 모두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 있다. 그러므로 환경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인간만의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세계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고통받고 탄식하는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시편 139편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곳에 계시는 창조주이심을 살펴보았다면, 로마서 8장은 그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세계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보여 준다. 바울은 18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로마서 8:18 NKRV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현재를 결코 낭만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지금의 세상에는 질병과 죽음, 굶주림과 가난, 자연재해와 같은 수많은 고난이 존재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이러한 고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난이 전부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현재의 고난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고난이 아무리 크고 무겁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실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에서 갑자기 “피조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19절은 이렇게 말한다.
로마서 8:19–20 NKRV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여기서 말하는 ‘피조물’은 인간을 제외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전체, 곧 우리가 살아가는 땅과 바다와 하늘, 동물과 식물 등 창조세계를 가리킨다. 물론 산과 나무와 바다가 실제로 사람처럼 생각하거나 말한다는 뜻은 아니다. 바울은 피조세계를 사람처럼 표현함으로써 인간의 타락이 창조세계 전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죄의 문제를 인간의 마음이나 인간의 관계에서만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죄가 인간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창세기 3장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심판하실 때 땅도 저주를 받았다. 인간의 타락은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전체에 깨어짐을 가져왔다.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세계는 선하고 아름다웠지만, 죄가 들어온 이후 그 세계에는 죽음과 썩음과 고통이 들어왔다.
그래서 바울은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했다고 말한다. ‘허무하다’는 것은 단순히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만드신 창조세계가 이제는 깨어지고 망가져서 본래의 목적대로 온전히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을 바라보면 이것을 조금 이해할 수 있다. 아름다운 숲이 있는가 하면 산불로 숲이 사라지기도 한다. 풍성한 바다가 있는가 하면 오염으로 생명체들이 살아가기 어려운 바다가 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생태계가 있는가 하면 인간의 욕심과 무분별한 개발로 동식물들이 살아갈 터전을 잃기도 한다. 자연에는 아름다움이 있지만 동시에 죽음과 파괴와 고통도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피조세계의 탄식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바울은 피조물이 단순히 고통받고 있다고만 말하지 않는다. 피조물이 “고대하고 있다”고 말한다. 19절의 ‘고대하다’는 말은 무엇인가를 간절히 기다리면서 목을 길게 빼고 바라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너무 기다려서 계속 문밖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피조세계가 무엇인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금의 연약하고 고난받는 모습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세상에서 그 영광이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을 완성하시는 날, 하나님의 자녀들이 진정 어떤 존재인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때 피조세계도 변화된다. 2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로마서 8:21 NKRV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해방시키고 변화시키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구속하시고, 나아가 창조세계까지 새롭게 하시는 분이다. 성경의 마지막에는 바로 이러한 소망이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고 모든 것이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소망은 “언젠가 이 지구를 버리고 영혼만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망가진 창조세계를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새롭게 된 세계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성경이 보여 주는 궁극적인 소망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떠한가? 22절은 이렇게 말한다.
로마서 8:22 NKRV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여기서 ‘탄식’은 아무런 소망이 없는 절망의 신음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것이 오기를 기다리는 탄식이다. 아이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출산 과정에 고통이 있지만, 그 고통이 단순한 절망의 고통은 아닌 것과 같다. 고통 가운데 있지만 그 끝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것을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6장에서 이러한 모습을 출산의 고통에 비유하셨다.
바울이 말하는 피조세계의 탄식도 이와 같다. 세상은 지금 깨어져 있고 탄식하고 있지만, 그것이 마지막 모습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창조세계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깨어진 세계를 결국 회복하시고 새롭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환경의 현실을 보면서 절망에 빠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실 회복을 소망하며 지금의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환경을 돌보아야 할 이유가 생긴다. 우리가 환경을 돌보는 것은 “내가 지구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지구를 구원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또한 우리가 환경을 잘 관리하면 하나님의 새 창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도 아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를 맡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이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세계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것을 함부로 파괴하거나 소비하지 않아야 한다. 물을 아껴 쓰고, 불필요한 쓰레기를 줄이고, 물건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을 돌보는 작은 행동들이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를 귀하게 여기는 방식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작은 행동 하나로 세상의 모든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계를 우리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태도이다. 피조세계는 지금 탄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 탄식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 가운데 나타나는 날, 피조세계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세계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 탄식하는 세상을 바라보며 절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회복을 소망하면서 오늘 내가 맡겨진 창조세계를 돌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냥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지으신 창조세계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연을 바라볼 때도 “이것이 나에게 얼마나 유익한가?”보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내가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문제를 혼자 해결할 수 없다. 여러분 한 사람이 분리수거를 잘한다고 지구 전체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물 한 번 아낀다고 모든 환경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내가 세상을 구원하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충성하는 삶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부터 우리의 삶을 조금만 돌아보면 좋겠다. 학교에서나 교회에서 아무 생각 없이 버리던 쓰레기를 한 번 더 분리해서 버리고, 사용하지 않는 전등과 에어컨을 끄고, 일회용품을 습관처럼 사용하는 대신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고, 자연과 생명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작은 선택을 해보는 것이다. 이런 행동들은 단순히 착한 시민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이 될 수 있다. 또 하나 기억했으면 좋겠다. 로마서는 피조세계가 탄식한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소망도 이야기한다. 세상이 깨어졌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이며, 우리는 그 회복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를 함께 붙들어야 한다. 하나는 소망이고, 다른 하나는 책임이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실 것을 믿기에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세계이기에 오늘의 삶을 함부로 살아가지 않는 것이다. 사랑하는 꿈사땅 여러분, 이번 한 주 동안 이렇게 살아가면 좋겠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 내 것이 아니라 /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다.” 물을 사용할 때도, 물건을 버릴 때도, 자연을 바라볼 때도 그 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작은 실천이 세상을 완성시키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은 반드시 우리의 삶의 태도를 바꾸게 한다. 탄식하는 창조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의 회복을 소망하며, 오늘 맡겨진 세상을 사랑으로 돌보는 꿈사땅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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