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만든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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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odus 32:1–6 NKRV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서론

유명한 부부 상담학 책에 이런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부부 같이 사는게 기적입니다.
동의 하시나요?
이 책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아버지처럼 자신을 보호해 주면서도, 동시에 아들처럼 자기 말을 고분고분 잘 들어주기를 기대합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아내가 딸처럼 순종하기를 바라면서도, 자신이 지치고 힘든 날에는 엄마처럼 품어 주기를 기대합니다.
한 사람에게 서로 다른 두세 가지 역할을 동시에 기대하며 살아가니, 부부가 함께 잘 산다는 것 자체가 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자에게 요구하는 이 모순된 기대, 혹시 하나님께도 똑같이 하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는 하나님이 아버지처럼 나를 완전히 보호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동시에, 그 하나님이 내 말을 잘 들어주시기를 원합니다.
강하신 보호자이면서도, 내 뜻대로 움직여 주는 존재.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신이 있다면, 그것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속으로 빚어낸 상상의 신일 가능성이 큽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볼 본문은 바로 이 모순된 욕구가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떻게 터져 나왔는지를 보여줍니다.
출애굽기 32장,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열 가지 재앙을 보았고,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목격했으며,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모세가 산에서 조금 늦게 내려온다는 이유로 우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도 놀랍게도, 새로운 신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들이 평생 예배해 온 그 이름, 엘로힘을 그 금송아지에게 붙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단순히 "다른 신을 섬긴 배교"가 아니었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다시 만들어 낸 죄였습니다.
부부 사이에서 배우자에게 이중적인 역할을 요구하듯, 그들은 하나님께 보호자와 순종자라는 두 가지 얼굴을 동시에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죄는 삼천오백 년 전 시내산 아래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 속에서,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죄입니다.

대지1

본문: 출애굽기 32: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배경으로 함께 가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4장 18절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가 사십 일 사십 야를 머물렀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보고,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목격하고, 시내산에서 천둥과 번개와 나팔 소리와 연기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던 그 백성이,
모세가 조금 늦어진다고 해서 하나님을 저버릴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런데 본문 1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히브리어로 "더딤"은 보쉐쉬(בֹשֵׁשׁ)인데, "지체하다, 부끄러울 정도로 늦다"는 뜻입니다.
사십 일이라는 시간, 눈에 보이는 지도자가 사라진 그 긴 침묵의 시간이 백성의 마음에 균열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들이 아론에게 요구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여러분, 이 말이 얼마나 이상한 말인지 아십니까. 신을 "만든다"는 말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신이라면 우리를 만드신 분이어야지, 우리가 만드는 존재가 어떻게 신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두려움과 불안 앞에서 인간은 이 모순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왜 하필 송아지 형상이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사백삼십 년을 살았습니다. 그 땅에는 아피스(Apis)라는 신성한 황소 숭배가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멤피스의 신 프타의 화신으로 여겨진 이 황소는 애굽 전역에서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예배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움 속에서 손을 뻗은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평생 곁눈질로 보아 온,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신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기다리다 지친 그들은, 애굽에서 늘 보아 온 그 익숙한 형상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서론에서 나눈 부부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 보시다
배우자에게 보호자와 순종자, 이 상반된 두 얼굴을 동시에 기대하는 그 마음이, 오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을 향해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버지처럼 나를 완전히 보호해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동시에, 그 하나님이 마치 순종적인 아들처럼 자기들 말을 고분고분 들어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완전한 보호자이면서도, 내 뜻대로 움직여 주는 존재 — 이것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이 은연중에 그리는 신의 모습입니다.
왜 우리 안에 이런 이중적 욕구가 있을까요. 에덴동산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는 원래 완전한 보호 아래 있었습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그분의 세계를 다스리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 보호와 풍족함을 잃어버린 이후, 인간의 심층 심리에는 "그 완전한 보호를 다시 얻고 싶다"는 갈망과 함께, "이번에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방식으로"라는 왜곡된 욕구가 함께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예수님은 인간의 창조의 모습 원래 인간의 목적을 정확히 아셨기에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 것을 먼저 하면 내 것도 채워지겠지"라는 거래의 논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만, 그 나라의 통치 아래서만 우리의 진짜 필요가 채워진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 필요를 채우지 못하기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망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눈에 보이고 내 마음대로 되는 신"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4절을 보면 백성들은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라고 외쳤는데, 여기 "신"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는 엘로힘(אֱלֹהִים)입니다.
이 단어를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 등장하는 바로 그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신의 이름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평생 예배해 온 바로 그 이름, 엘로힘을 자기 손으로 만든 송아지에게 붙인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죄는 "다른 신을 섬긴 배교"가 아니라, "같은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다시 만들어 낸 죄"였다는 것입니다.
5절에서 아론이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선포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여호와를 예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그 여호와가 사십 일씩이나 침묵하지 않고, 자기들이 원할 때 즉시 응답하며, 애굽에서 늘 보아 온 형상처럼 자기들 손으로 빚어 통제할 수 있는 여호와였을 뿐입니다.
여러분, 이들이 그렇게 어리석어 보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다릅니까. 우리도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이랬으면 좋겠다"고 하나님의 뜻을 우리 틀에 맞추려 하지 않습니까.
나를 고난으로 밀어 넣는 신은 원하지 않고, 내 앞길을 시원하게 터주는 신을 원하지 않습니까. 내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그런 엘로힘을 우리도 마음 깊은 곳에서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봅시다.
우리의 기도 제목을 한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들이 "하나님,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를 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은연중에 "하나님, 제 뜻대로 이루어 주옵소서"를 향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응답이 더디다고 느껴질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기도한 지 사십 일, 사백 일, 어쩌면 수십 년이 지나도록 침묵하시는 것 같은 그 시간, 우리 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조급함이 찾아옵니다.
그 조급함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 오늘 함께 깨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만들어 낸, 우리 마음대로 움직이는 신이 아니라, 침묵하시는 순간에도 여전히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을 붙드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첫 번째 도전인줄 믿습니다.

대지2

본문: 출애굽기 32:4-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4절을 다시 자세히 봅시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여기 "새겨"라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야차르(יָצַר)인데,
창세기 2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에서 사용된 바로 그 동사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야차르).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사람이 금으로 신을 지었습니다(야차르).
창조주와 피조물의 자리가 완전히 뒤바뀐 것입니다. 원래 흙에 불과했던 인간이, 이제는 금을 녹여 자신이 섬길 신을 스스로 빚어내는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금이 어디서 왔는지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 금 고리들은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출애굽 직전에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은혜로 얻게 하신 것이었습니다(출 12:35-36). 그런데 이제 그들은 이 은혜의 선물을 녹여, 마치 자기들의 능력으로 이룬 것처럼 신을 만들어 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더 깊이 볼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구원은 순전한 은혜였습니다.
그들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그
런데 백성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사백 년 노동의 대가로 착각한 것처럼 행동합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그렇게 고생했으니, 우리 손으로 우리를 위한 신 하나쯤은 만들어도 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 이것이 바로 은혜를 자기 공로로 바꾸어 버리는 인간의 죄성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만의 문제가 아님을 기어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끊임없이 하나님과 거래하려 들지 않습니까. 나의 봉사, 나의 헌금, 나의 새벽기도, 나의 직분이 하나님 앞에 내놓고 흔들 "협상 카드"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도 이만큼은 해 주셔야지" 하는 마음,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금송아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 십자가 앞에 우리의 공로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노력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구원받은 이후에 이상한 착각을 합니다.
자신의 섬김과 봉사를 하나님과의 거래 재료로 사용하려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속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완전히 변화되었다는 뜻인데, 우리는 "내가 이렇게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금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더 주시겠지" 하는 마음을 은근히 품습니다. 생명의 은혜를 선물로 받고도, 우리는 여전히 싸구려 복을 흥정하려 드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정확히 오늘 아론의 금송아지의 모습입니다. 구속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노력으로 만든 싸구려 금신상을 향해 절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아이러니이지만, 우리도 서슴지 않고 이 일을 반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정직하게 점검해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봉사와 헌금과 기도가 혹시 하나님과의 거래 재료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도 이만큼 갚아 주시겠지" 하는 계산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십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은연중에 만들어 온 "내가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 받아야 한다"는 거래의 신앙을 내려놓읍시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전적인 은혜였음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대지3

본문: 이사야 55:8-9, 마태복음 26:3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인간은 이중적 욕구로 자기 뜻대로 되는 신을 원했고, 그 신은 자신의 노력으로 빚어낸 가짜 엘로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묻고 싶습니다. 진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사야 55장 8절과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Isaiah 55:8–9 NKRV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진짜 하나님은 우리 생각의 틀 안으로 들어오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생각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높은 곳에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창세기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갔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가 겪은 고난 중 어느 하나도 그가 원했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총리가 된 요셉은 자신을 팔았던 형들 앞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요셉이 원했던 길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길은 훨씬 더 크고 선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진리가 가장 선명하게 모든 그림자를 뒤로하고 빛으로 드러난 자리가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러분, 예수님조차도 인간적으로는 그 십자가의 잔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 앞에 완전히 내려놓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의 그 잔을 치우지 않으셨습니다.
왜입니까. 그 십자가의 고난이야말로, 모든 잃어버린 양들의 생명을 대속하여 부활의 첫 열매로 나아가게 만드는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처럼 "내 마음대로 되는 신"이었다면, 아들의 간구를 듣고 그 잔을 치워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은 우리의 요구가 아니라, 더 크고 선한 그분의 계획을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셨습니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출애굽기 32장에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이 백성을 진멸하겠다 하셨을 때(출 32:9-10), 모세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중보하였습니다(출 32:11-14).
모세의 중보로 백성은 멸망을 면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세의 중보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더 크신 중보자가 오셨음을 기억합시다
히브리서 7장 2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Hebrews 7:25 NKRV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신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금송아지처럼 하나님을 배신하는 순간에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그리스도의 중보가 있기에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에 응답되지 않는 기도가 있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자리에 계십니까. 여러분이 원하는 방향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인생의 길 앞에 서 계십니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그 침묵과 그 고난 앞에서, 우리는 또 다른 금송아지를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셔야 한다"는 나만의 신을 다시 빚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은 요셉의 고난을 선으로 바꾸셨고, 욥의 고난을 정금으로 바꾸셨고, 아들의 십자가마저 부활의 첫 열매로 바꾸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 자리에서, 눈앞에 답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믿음을 구하십시오.
예수님처럼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만든 신을 내려놓고, 우리를 만드신 참 하나님께 우리의 계획과 방법을 내려놓는 그 자리로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사건을 통해 한 가지 진실을 마주했습니다.
우리 안에는 나를 보호하면서도 내 뜻대로 움직여 주는 신을 원하는 이중적 욕구가 있고, 그 욕구로 빚어낸 신은 결코 참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참 하나님은 우리의 노력이나 거래로 만들어지는 분이 아니라, 요셉의 고난을 선으로, 아들의 십자가를 부활의 첫 열매로 바꾸신 당신의 계획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은연중에 만들어 온 나만의 엘로힘을 내려놓고, 이해할 수 없는 자리에서도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신 예수님을 따라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실패한 그 자리를 완전히 순종하신 그리스도께서 대신 채우셨으니, 이제 우리는 그분을 붙들고 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함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거울 삼아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감춰진 부끄러운 민낯을 마주합니다.
우리는 입술로는 주님을 찾으면서도, 실제로는 내 뜻대로 다룰 수 있고 내가 원할 때 당장 응답해 주는 금송아지를 은연중에 바라고 있었습니다.
눈앞의 현실이 막막하고 주님의 침묵이 길어질 때마다, 조급한 마음에 스스로를 위로할 가짜 신을 만들어 내려 했던 우리의 어리석음을 이 시간 고백합니다.
주님, 나의 작은 정성과 봉사로 주님의 은혜와 거래하려 했던 교만한 마음을 십자가 앞에 모두 내려놓습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우리의 얕은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선하신 주님의 계획을 온전히 신뢰하게 하옵소서.
당장 이해할 수 없는 막막한 시간과 뼈아픈 고난 속에서도, 결국 우리를 정금처럼 빚어내시고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아버지의 따뜻하고 단단한 손길을 굳게 붙잡게 하옵소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엎드리시며,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순종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우리 마음에 새깁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수없이 넘어지고 실패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위해 간절히 중보하시는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 안에서 다시 일어서게 하옵소서.
이제는 내 욕심으로 깎아 만든 헛된 우상을 부수고, 우리를 지으신 참 하나님 한 분만으로 깊이 만족하는 성도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참된 구원자이시며 유일한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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