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궤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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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6:1-12
사무엘하 6:1-12
오늘은 ‘언약궤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겠습니다.
여러분, 삼일간 평안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들어가기 전에 옆에 계신 지체와 이렇게 인사 나눠볼까요? "거룩함은 태도에 있습니다!" 그 고백 기억하시면서 오늘 말씀 함께 들어가시죠.
여러분, 전기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으십니까. 전기는 현대에 있어서 위대한 발견이자, 모든 과학기술의 근간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전기가 있는 세상은 너무나 좋습니다. 어두운데 환하게 불을 밝힐 수 있고요, 음식물이 상하지 않도록, 집에 냉장고를 돌립니다. 더운 날에도 시원하게 에어컨을 켤 수 있습니다. 전기로 스마트폰을 사용하고요, 요즘에는 심지어 전기를 가지고 자동차를 운전까지 합니다. 이 에너지가 너무나 소중하고 귀하잖아요. 그런데 이 에너지를 다룬다는 것은 굉장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전기를 다루는 사람은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에는 꽤나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이 필요한 일이지요. 전기의 원리를 배우고, 이 전기 작업을 할 때에 광장히 조심히 해야 하지요. 특히나 고압선을 다룰 때에는 더욱 그리해야 합니다. 원칙을 지키고, 정해진 순서와 장비를 잘 착용하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이라는게 익숙해지면 어떠합니까?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원칙을 지키면서 하기 보다, 이제 안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자신이 능숙하게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방심하게 되는거에요. 그러다가 원칙을 지키지 않고, 간소화 하고, 작업을 하다가 사고가 나는 경우가 생기지요.
불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이라는 에너지 얼마나 사람의 삶에 필요한 에너지 입니까. 불의 따뜻함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음식을 구워서 먹을 수 있게 되었고요, 추운 날에도, 에너지를 보존할 수 있는 열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에너지 역시 잘못되는 순간에 어떻게 됩니까? 화재를 화마라고도 하잖아요, 불이라는게 마귀가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그 에너지를 잘못다루거나 잘못되는 순간,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재앙이 되는 겁니다. 전기와 불의 힘 자체는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에도 이와 똑같은 원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존재 역시요,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말씀, 예배와 직분이라는 이 강력한 은혜의 에너지를 우리는 매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거룩한 은혜를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습니까. 오래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 은혜에 대한 떨림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익숙해집니다. 성경을 펴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예배당에 앉는 것도 습관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익숙함 속에서 우리도 모르게, 마치 피복 벗겨진 전선을 아무렇지 않게 만지듯, 거룩한 것을 함부로 대하는 순간들이 생깁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들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합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모습들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난 5장에서 우리는 다윗이 마침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난공불락이라던 여부스 요새 예루살렘을 정복해 다윗성으로 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어서 블레셋의 침공도 두 차례나 물리치며, 다윗의 왕권은 이제 완전히 안정되어 갑니다. 나라의 기초가 세워졌고, 수도도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윗에게는 중요한 일 하나가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언약궤였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상징하는 가장 거룩한 성물인데, 이 궤는 오래전 블레셋과의 전쟁 중에 빼앗겼다가 돌아온 후로, 줄곧 예루살렘이 아니라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방치되다시피 머물러 있었습니다(삼상 7장). 무려 사사 시대 말부터 수십 년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궤가 정작 이스라엘의 신앙과 정치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던 겁니다. 그는 그것이 생각났고 그 일을 위하여 준비 하게 됩니다.
이제 왕권이 안정된 다윗은 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와, 나라의 중심에 하나님의 임재를 모시고자 합니다. 겉으로 보면 너무 아름다운 일 아니겠습니까?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가장 중요했으면 하는 그의 마음이었겠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1절부터 12절은, 바로 이 아름다운 목적을 가진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보여줍니다.
1대지 거룩함을 훼손하는 익숙함과 편의주의 — 웃사의 비극 (1-8절)
본문 1절부터 보겠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다윗이 일어나서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계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다윗은 삼만 명이나 되는 인원을 동원해 이 일을 준비합니다. 언약궤가 3만명이나 필요한 일일까요? 언약궤의 크기에 대해 성경은 길이가 약 2.5규빗 1m가 조금 넘는 크기 입니다. 별로 크지 않은 물건이지요. 그리 무거운 물건도 아니었을 거에요. 조금 큰 택배 박스 정도 되는 크기였을 겁니다.
그런데 몇 명을 준비해요? 3만명을요. 이것은 다윗이 이 일을 대충준비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몰았다." 새 수레입니다. 얼마나 정성을 들였습니까. 새것으로, 깨끗하게, 최선을 다해 준비한 것으로 언약궤를 모시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알다시피 바로 이 지점에 그들에게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민수기 4장 15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 궤를 옮기는 방법을 정확히 명하셨습니다. 레위 지파 고핫 자손이 채를 꿰어 어깨에 메고 옮기라는 것입니다. 수레가 아닙니다. 사람의 어깨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이스라엘은 이 방식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블레셋 사람들이 궤를 이스라엘에 돌려보낼 때 썼던 바로 그 방법, 새 수레를 그대로 가져다 씁니다(삼상 6:7 참고). 이방인들이 궤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편의상 사용했던 방식을, 하나님의 백성이 그대로 답습한 겁니다.
여러분, 이게 왜 그렇게 위험한 일입니까. 겉으로 보면 수레든 어깨든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과 사람이 편한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말해줍니다. 어깨에 메는 것은 사람이 궤에 직접, 인격적으로, 조심스럽게 관계하는 방식입니다. 수레에 싣는 것은 궤를 하나의 물건, 짐짝처럼 취급하는 방식입니다. 효율은 있었지만 그 안에 경외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6절,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뛰므로 궤가 흔들립니다. 웃사가 손을 내밀어 하나님의 궤를 붙듭니다. 7절, "여호와께서 웃사의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여러분, 웃사가 하나님을 대적하려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그저 궤가 떨어질까 봐,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을 뿐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오히려 기특해 보이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핵심입니다. 웃사가 궤를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만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악해서가 아니라 무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는 잘 몰랐던 것이죠. 웃사라는 사람은요 아비나답의 집에서 오랫동안 궤와 함께 살아온 사람입니다(2절,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매일 보던 것, 늘 곁에 있던 것이었기에, 그에게 궤는 어느새 그저 익숙한 가구, 만져도 괜찮은 물건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거룩한 것과 매일 함께 살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 거룩함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든 겁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봅시다. 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익숙하게, 아무렇지 않게 대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궤를 옮기려 했던 그 마음 자체는 진심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삼만 명을 동원했습니다. 나팔을 불고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을 연주하며 춤을 추었습니다(5절). 이것은 억지로 하는 종교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진심으로 기뻐하며,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려 했던 겁니다.
여러분, 바로 이 지점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무서운 도전입니다. 전심으로 섬기려는 마음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문제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열심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을 담아낸 그릇, 곧 방법이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이 쓰던 방식, 편리하고 익숙한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음만 진실하면 되지 않을까." "정성만 있으면 방법이야 뭐가 중요한가."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진심이 잘못된 방법을 정당화해주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걸 우리 시대에 비추어 보면 더 아프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철저하게 실용주의와 편의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시대입니다. 무엇이든 더 빠르고, 더 쉽고, 더 효율적인 것이 좋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시대의 가치관이 어느새 우리의 신앙 안에도 그대로 들어와 있지는 않습니까.
예전에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새벽을 깨워 무릎으로 기도했습니다. 성경 한 절을 붙들고 몇 시간씩 묵상했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서기 전 옷깃을 여미고, 헌금 할 때에도, 빳빳한 새 지폐를 사용하고 강단 앞에서는 함부로 큰 소리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다소 불편하고 시간이 걸리는 방식이었을지라도, 그 안에는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경외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기도도, 예배도, 봉사도 점점 더 간편하고 효율적인 방식을 찾습니다. 물론 시대에 맞는 방식을 찾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편리함을 좇는 사이에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 앞에서의 떨림과 경외감이 함께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신앙 앞에, 우리의 삶에 핑계되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배는 참석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지 중 하나가 되고요, 말씀은 필요할 때 검색해서 찾아보는 정보가 되고, 기도는 하나님 앞에 드린 다는 마음보다는, 그저 해치워야될 순서정도로, 심지어 내가 기도해야 할 순서 인데도, 그것을 귀중한 자리로 여기지 못하고 늘 부담이고, 하기 싫은 일로 자리 잡아 버리진 않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믿음을 담아내는 방식에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은 어느새 실용주의에게, 나라는 바쁜 삶이라는 핑계에 자리를 내어준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이 새 수레를 준비했을 때, 아무도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가장 깨끗하고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여겼을 겁니다. 이것이 더 무섭습니다. 우리도 우리 시대의 편리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은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입니까, 아니면 내가 편해서 선택한 이 시대의 방식입니까. 내 열심과 정성이 진짜라 할지라도, 그 열심을 담아내는 그릇까지 점검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의 열심과 진심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라 착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 시대의 편리함과 효율이 아니라, 주님이 정하신 방식으로, 익숙함 속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회복하는 우리의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대지 거룩한 부담을 기꺼이 껴안는 헌신 — 오벧에돔의 수용 (9-11절)
9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다윗이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웃사가 죽는 그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다윗의 반응입니다. 여러분, 이 반응 자체는 이해할 만합니다. 삼만 명을 동원해 정성껏 준비한 축제가, 순식간에 장례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다윗은 두려워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두려움의 방향을 잘 보셔야 합니다. 다윗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돌아보기보다, "이 위험한 것을 내게서 멀리 치워야겠다"는 쪽으로 반응합니다. 10절,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그 것을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갔더니." 다윗은 결국 궤를 자기 성으로 들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집으로 떠넘깁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감당해야 할 복이 아니라, 피해야 할 위험한 짐으로 여기게 된 겁니다.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라는 말 속에는 신학적으로는 맞는 두려움이 담겨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 거리를 두려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 자체는 정당합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하나님을 더 가까이 모시려는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밀어내는 회피로 이어졌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지점에서 본문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한 사람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그렇게 두려워 떠넘긴 그 궤를, 가드 사람 오벧에돔은 아무 저항 없이 자기 집으로 받아들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을까요? 웃사가 그 궤 곁에서 즉사한 사건이 이미 온 무리에게 퍼져 있었을 겁니다. 심지어 왕까지도 두려워서 자기 집에 들이기를 거부한 그 위험한 물건입니다. 그런데 오벧에돔은 그것을 자기 집 한가운데로 들입니다.
여러분, 이 대비가 얼마나 극명합니까. 한쪽은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고, 다른 한쪽은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사람입니다. 왕은 그 거룩한 부담을 밀어냈고, 이름 없는 한 사람은 그것을 짊어졌습니다. 신앙의 크기는 자리나 권세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본문은 이렇게 조용히 보여줍니다.
여러분, 오벧에돔이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그도 분명 두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그의 두려움은 회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두려움을 안은 채로,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를 자기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경외함의 모습입니다. 참된 경외함은 하나님을 멀리 두고 무서워하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두려운 존재 앞에서도, 오히려 그분을 내 삶의 중심으로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을 생각해 보십시오. 불은 위험합니다. 함부로 다루면 집을 태웁니다. 그런데 그 불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예 집 밖으로 내쫓아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겨울에 얼어 죽습니다.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진짜 지혜는 불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불을 안전하게 담아낼 화덕을 만들어 집 한가운데 두는 것입니다. 오벧에돔이 한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라는 그 강력한 불을 피하지 않고, 자기 가정을 그 불을 온전히 담아내는 튼튼한 화덕으로 내어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도 이런 순간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시는 어떤 자리, 어떤 헌신, 어떤 순종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너무 무겁고 부담스러워 보일 때, 우리는 다윗처럼 그것을 슬며시 다른 사람에게, 혹은 다른 때로 떠넘기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저는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제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일이에요"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십자가의 길, 헌신의 자리는 원래 무겁습니다. 원래 부담스럽습니다. 그런데 그 무거움을 피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오벧에돔처럼 그 무거운 것을 기꺼이 내 삶의 중심으로 짊어지고 오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은 부담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부담조차도 하나님이 맡기신 것인 줄 알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이 편안해야 한다고 착각합니다. 무언가 부담스럽고 무겁게 느껴지면, "이게 맞나" 하고 의심부터 합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서도 믿음의 길이 쉽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맞지요. 감사가 맞지요. 그런데 또 한편에서는요, 믿음은 세상을 거슬러야 하는, 나의 악한 자아를 부인해야 하는 길임을 늘 이야기 합니다.
마태복음 7장 14절,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요? 문이 크고요, 길도 넓고요,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 생명은요? 쉽고 넓은 길이 아니라, 좁고 협착한 길이라고 찾는 자가 적대요. 마태복음 16장 24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은요, 편안한 길을 걸으라 하지 않으시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래요. 여러분, 십자가가 편리한 도구입니까. 십자가는 그 자체로 무겁고, 고통스럽고,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것을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시대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쉬운 것이 좋은 것이고, 편리한 것이 옳은 것이라고요. 효율적인 것이 진리이고 그런데 신앙은 이 시대의 논리와 정반대로 갑니다. 편하거나, 편리하거나, 효율적인 길이 아니라, 좁고 협착하고 때로는 부담스러운 그 길이 바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오벧에돔이 걸었던 길이 바로 이 길이었습니다. 그는 그 무거운 궤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편한 선택지가 눈앞에 있었음에도, 그는 부담스러운 그 자리를 향해 걸어 들어갔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지금 이런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감당하기 버거워 보이는 섬김의 자리, 마음이 불편해서 피하고 싶은 관계,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해서 자꾸 미루게 되는 순종의 부르심. 여러분, 그 무거움 자체가 잘못된 신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시는 자리라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쉬운 길로만 가려 한다면, 그게 어떻게 주님을 따르는 길이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지금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맡기신 자리를 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편리함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고, 정작 하나님이 걸으라 하시는 좁은 길에서는 발을 빼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원하는 길 말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걸어갈 수 있는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이 부담을 떠안은 오벧에돔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11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사무엘하 6: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여러분, 이 한 절이 얼마나 놀라운 반전입니까. 바로 몇 절 앞에서 이 언약궤는 사람을 죽인 위험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일한 언약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는 석 달 동안 머물며 그 집 전체에 복을 흘려보내는 근원이 됩니다. 이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고작 석달입니다. 세달간 오벧에돔의 집에 있었는데요? 그가 그 부담을 끌어 안았을 때?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셨다. 오벧에돔만 주신게 아니라요. 그의 온 집이, 하나님이 주신 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정확히 짚어야 할 것은요 궤가 바뀐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오벧에돔의 집에서만 특별히 온화해진 것도 아닙니다. 웃사에게 임했던 그 하나님과 오벧에돔에게 복을 주신 그 하나님은 동일한 분이십니다. 달라진 것은 단 하나, 그 언약궤를 대하는 사람의 태도였습니다. 그가 당시 다윗 왕도 가져가기 부담스러워 하던, 그 언약궤를 자신의 집에 들이자, 모시자, 하나님은 그의 온 집안에 복을 주셨던거에요.
여러분, 이것이 오늘 본문 전체가 우리에게 주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문제는 언약궤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었습니다. 익숙함과 편리주의로 함부로 대하면, 그 거룩한 임재는 심판과 죽음의 자리가 됩니다. 그러나 두렵고 떨림으로, 그러면서도 피하지 않고 삶의 중심으로 모셔 들이면, 그 동일한 임재가 생명과 축복의 근원이 됩니다.
이 본문이 말하는 것은요, 어쩌면 우리의 태도에 대한 부분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 복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태도"라는 것을 조금 더 풀어보고 싶습니다. 이 태도는 단순히 마음가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음가짐과 더불어, 세상의 방식과 나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면 그로 인한 부담과 불편함까지도 기꺼이 감수하는 실천, 그 둘을 끌어안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이 두 가지가 가야 합니다. 마음만 있고 실천이 없으면 그것은 감상에 그칩니다. "저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해요"라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살지 않고, 부담스러운 순종의 자리는 요리조리 피해 간다면, 그 사랑은 말뿐인 사랑입니다. 반대로 실천만 있고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형식에 그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는 것 같아도, 그 안에 경외함과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그저 껍데기뿐인 종교 행위입니다. 웃사의 문제는 마음가짐이 무뎌진 것이었고, 다윗의 문제는 방법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벧에돔에게는 이 둘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동시에 그 두려운 것을 실제로 자기 집에 들이는 행동까지 나아갔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태도는 마음속에서만 끝나지 않고 반드시 삶의 구체적인 자리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진짜라면, 그것은 말씀을 내가 편한 대로 해석하지 않고, 불편해도 그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내는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복음을 대하는 태도가 진짜라면, 그것은 그 복음을 나 혼자만 누리고 끝내지 않고,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이웃에게 전하고 나누는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예배를 대하는 태도가 진짜라면, 그것은 예배가 내게 편리한 시간과 방식일 때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다소 불편하고 희생이 따르더라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의 자리를 지켜내는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신앙은 대개 이렇습니다. "부담 없이, 편하게, 내게 맞는 방식으로." 그런데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신앙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이라면, 설령 그것이 내게 불편하고 부담스러워도, 그것을 끌어안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벧에돔이 그랬습니다. 그는 위험을 알고도 받아들였고, 부담을 알고도 짊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실천이 있었기에, 그의 마음가짐도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진짜 신앙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각자의 삶으로 이 말씀을 가져와 봅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 말씀이 내게 불편한 것을 요구할 때, 나는 그것을 조용히 외면하지는 않습니까. 나는 복음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일이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나 혼자만의 신앙으로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예배와 헌신의 자리를 대하는 태도가 어떻습니까.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슬며시 발을 빼고, 편할 때만 나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벽한 사람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직한 태도를 요구하십니다. 마음으로는 경외하면서 삶으로는 실천하는, 그래서 부담과 불편함까지도 끌어안는 믿음, 그것이 바로 오벧에돔이 보여준 신앙이고,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요, 오히려 우리에게 복을 주고 싶어서 그 복을 누리길 원하시는 분이세요. 여러분 오벧에돔이 어떤 복을 받았는지 아세요? 오늘 본문에는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역대상 26장을 보면요, 오벧에돔의 집안이 어떤 복을 받았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자손들은요, 훗날 성전 문지기와 곳같을 맡은 자로 세워지게 됩니다. 심지어 그의 아들 8명이 다 용사요 능력 있는 자였다라고 기록합니다. 그 부담을 무릅선 순종의 신앙이 대대에 하나님이 복주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 겨우 석달 그 궤를 끌어안았습니다. 부담을 끌어 안았습니다. 그 순종이 그의 온 집과 그 후손 대대로 이어지는 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감수하는 순종의 시간이 아무리 짧고 작아보여도, 하나님은 그것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는 것이지요.
여러분 때로는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은 순종의 자리가 있다면요, 오히려 하나님이 나에게 복주시려는 자리로 여길 수 있는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이 하나님의 주시는 복이 있다는 것을, 이 시간 음성으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삶으로 경험할 수 있는 축복의 인생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단 기도 — 말씀 결단 기도
먼저, 오늘 들은 말씀을 붙들고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는 같은 언약궤 앞에서 완전히 다른 두 가지 태도를 보았습니다.
익숙함과 편의주의로 거룩한 것을 함부로 대하다 심판을 받은 웃사와,
두렵고 떨리지만 그 부담을 삶의 중심으로 짊어들인 오벧에돔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저희도 오랜 신앙생활 속에서 처음의 떨림을 잃어버리고,
말씀과 예배와 맡겨진 직분을 손에 익은 습관으로만 대해온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방법보다 저희에게 편한 방식을 앞세웠던 그 "새 수레"를
오늘 이 시간 정직하게 내려놓습니다.
또한 주님이 맡기신 부담스러운 자리 앞에서
"저는 아직 준비가 안 됐습니다" 하며 슬며시 발을 뺐던 저희의 모습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신앙의 길이 편하고 쉬워야 한다는 이 시대의 착각에서 벗어나,
좁고 협착한 그 길, 부담과 불편함까지도 끌어안는 믿음을 저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오벧에돔처럼 마음으로는 경외하고 삶으로는 실천하여,
저와 제 가정과 다음 세대에까지 이어지는 견고한 복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 이제 들은 말씀을 붙들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2단 기도 — 세계 선교와 네팔을 위한 기도
두 번째로 세계 선교와 지금 고통 가운데 있는 네팔 땅을 위해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최근 네팔에서 일어난 대규모 홍수와 산사태로 수많은 생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고, 아직도 많은 분들이 실종된 채 발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고 삶의 터전이 무너져 내린 그 땅의 사람들을 주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그 가운데 있던 우리 한국인 근로자와 그 가족들도 지켜 주시고, 아직 실종된 분들이 하루속히 안전하게 발견되게 하시며, 지금 이 순간에도 애통하며 무너져 있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임하게 하옵소서. 구조와 회복을 위해 애쓰는 모든 손길들에게 힘을 더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그 땅과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들고 섬기고 있는 선교사님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이 서 있는 자리마다 오벧에돔처럼 두렵고 떨리는 부담이 있을 줄 압니다. 그 부담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짊어진 그들의 헌신을 주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언어와 문화의 장벽 너머로 주님의 임재가 그 땅 가운데 흘러가게 하옵소서. 재난과 아픔이 있는 곳마다 복음이 먼저 가서 위로와 회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고, 세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나라가 흔들림 없이 확장되게 하여 주옵소서.
👉 이제 세계 선교와 네팔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3단 기도 — 우리 교회를 위한 기도
마지막으로 우리 광혜교회 공동체를 위해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지금 큰 수술을 앞두고 계신 김OO 장로님을 붙들어 주옵소서. 간암 수술이라는 크고 두려운 자리 앞에 서 계시지만, 오벧에돔이 두려운 부담 앞에서도 주님을 삶의 중심으로 모셔 들였듯이, 장로님과 그 가정도 이 두려운 순간 속에서 오히려 주님의 임재를 더욱 가까이 붙드는 은혜를 누리게 하옵소서. 수술하시는 의료진의 손길 위에 주님의 지혜를 더하시고, 수술 전 과정과 회복까지 모든 순간을 친히 주관하여 주옵소서.
또한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는 우리 아이들을 기억합니다. 어린 나이에 병상에 누워 있는 그 자리가 얼마나 낯설고 힘들지 압니다. 주님께서 그 작은 몸과 마음을 친히 만져 주시고, 속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뛰어놀 수 있게 회복시켜 주옵소서. 곁에서 마음 졸이며 지키고 있는 부모님들에게도 위로와 평안을 부어 주옵소서.
그리고 올가을 있을 우리 교회 중직자 선출을 위해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처럼, 이 일이 사람의 계산이나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의 뜻과 방법을 따라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세워지는 이들이 그 자리의 무게와 부담을 회피하지 않고, 오벧에돔처럼 두렵고 떨림으로 기꺼이 짊어지는 자들이 되게 하시고, 우리 교회 전체가 이 과정을 통해 주님의 임재를 더욱 삶의 중심에 모시는 공동체로 세워지게 하옵소서.
👉 이제 우리 교회를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