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심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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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시편과 함께 걷는 인생길 5번째 설교입니다.
지난 주 시편 23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 분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안에서 우리는 만족과 평안을 누리니, 어려움이 찾아와도 우리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하는 인생은 참으로 복받은 인생입니다.
지난 주 시편 23편에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았다면, 오늘 시편 51편에서는 그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내가 누구인지를 보게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그의 양이지만, 죄인이다.”
신앙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과 동시에 나 자신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51편도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그 표제에 보면 언제 다윗이 이 시를 지었는지가 나옵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사건 이후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던 다윗도, 사울 왕에게 쫓기던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범죄하지 않았던 그 다윗도 모든 일이 잘 되고 있는 때에 마음이 느슨해지고 교만해져서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이 위대한 인물의 죄와 실패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의 죄를 분명하게 기록하였지요.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분명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설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분명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설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시편을 인용하며 인정합니다.
로마서 3장 10절입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이어서 로마서 3장 2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사실을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 다윗은 단지 자신의 죄악만을 회개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고 죄 중에 잉태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실존적 고백인 것이지요.
이러한 실존적 고백 속에서 나단을 통해 지적받은 그의 죄악이 다윗의 실수로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나오게 된 결과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나는 원래 죄인이니까 어쩔 수 없었습니다”라고 변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4절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자신의 죄된 본성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범한 죄의 책임을 분명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본성으로부터 나온 죄악을 어떻게 사람이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 죄의 문제를 어떻게 인간이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하다못해 우리의 식성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 아니겠습니까?
베가스의 멋진 음식점을 돌아다니며 산해진미를 맛보아도 결국에는 호텔에 돌아와서 라면에 김치를 찾는 것이 우리들 아닙니까?
물론 식성과 죄성을 비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 안에 깊이 밴 습관 하나 바꾸기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죄로 기울어진 우리의 마음을 우리 스스로 어떻게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나는 본성적으로 타락하였으므로 죄를 짓기가 쉬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 나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이해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상한 마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에 매여 있어 죄를 짓기 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 앞에 그 죄를 고백하며 나아가는 것이 상한 마음이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상한 마음은 단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인정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를 고칠 수 없고, 나를 깨끗하게 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긍휼밖에는 붙들 것이 없다고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다윗에게 남아 있는 것은 자기 의가 아닙니다.
자기 변명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직한 영으로서 자신의 죄악을 알고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왜 그런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나의 잘못을 지적하는 대상에 대하여 세 가지 형태로 반응합니다.
우리는 나의 잘못을 지적하는 대상에 대하여 세 가지 형태로 반응합니다.
첫번째는 역공격입니다.
첫번째는 역공격입니다.
“내 잘못보다 당신 잘못이 더 크다.”
지적을 받으면 화를 내거나 상대를 비난하며 공격의 방향을 돌립니다.
“당신은 잘했어?”
“왜 나한테만 그래?”
“당신 때문에 그런 거잖아.”
“당신은 떳떳해?”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있어?”
여기에는 분노, 책임 전가, 상대의 과거 잘못 끄집어내기 등이 포함됩니다.
두번째는 회피입니다.
두번째는 회피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잘못 자체를 부정하거나 축소하고, 상황이나 다른 사람을 이유로 변명합니다.
“그 정도는 누구나 해.”
“목사, 장로도 그 정도는 하잖아?”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상황이 어쩔 수 없었어.”
침묵하거나 자리를 피하고 대화를 끊어 버리는 것도 넓은 의미의 회피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는 인정입니다.
세번째는 인정입니다.
“내가 잘못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는 반응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그래, 내가 잘못했어”라고 말하는 것 이상입니다.
건강한 인정은 잘못을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상대가 받은 상처를 받아들이며, 필요하면 사과하고 행동을 바꾸는 것까지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 가지 반응 중에서 역공과 회피는 관계를 무너뜨립니다.
왜냐하면 역공과 회피는 겉모습은 다르지만, 그 중심에는 상당히 비슷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핵심적으로는
“내가 잘못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을 견디기 어렵다”
는 자기방어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둘을 아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역공은 수치심을 분노로 밀어내는 반응이고,
회피는 수치심을 변명으로 덮는 반응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스스로 만들어 놓은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라는 이미지가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타인을 정죄하거나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뒤 숨고, 책임을 다른 존재에게 돌린 모습이 바로 이런 패턴을 잘 보여줍니다.
반대로 복음은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자유를 줍니다.
“내가 옳기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받아들여졌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복음은 죄가 없다고 말할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다고 인정할 자유를 줍니다.
복음은 죄가 없다고 말할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다고 인정할 자유를 줍니다.
내가 나를 의롭게 만들어야 한다면 끝까지 변명해야 합니다.
끝까지 나를 변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의 의가 되신다면 더 이상 그렇게 나를 변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숙한 회개는 자존감이 낮아서 나오는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정당화가 필요 없을 만큼 은혜 안에서 안전해진 사람의 반응입니다.
오늘 시편의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우리의 죄를 정직하게 하나님께 고백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가볍게 여기시는 분이 아니라, 그 죄를 심판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이시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정죄를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죄받을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요한1서 1:9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오히려 그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 상한 마음으로 주께 나아갈 때 주님이 그 제사를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예배를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죄를 지은 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제물을 많이 가져가면 되는 것입니까?
값비싼 것을 드리면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6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그리고 1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어떤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제사 곧 예배를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형식만 남은 제사를 받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데, 형식만 갖추고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무엇입니까?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기 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긍휼만을 붙들며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정직한 마음입니다.
상한 심령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희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을 붙드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늘 죄로 물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넘어지고 또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죄를 다시 깨닫고 상한 심령으로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예배를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복음은 죄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죄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죄인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를 숨기지 마십시오.
변명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지 마십시오.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 내가 죄를 범하였습니다.”
“나를 씻어 주십시오.”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
그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씻으시고, 새롭게 하시며,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