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길 수 없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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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2 수요예배]
비길 수 없는 하나님
본문: 이사야40:12-26
1.소요리문답 전제
소요리문답 네 번째 질문과 답을 살펴보겠습니다. 1문부터 3문까지는 소요리문답의 전제라고 했습니다. 전제가 무엇입니까?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기본 설정을 해놓는 것입니다. 영화관에서 보신 적이 있을텐데요. 실제 있었던 역사나 사건들을 다루는 영화들을 유심히 보면, 상영 전에 캄캄한 화면에 하얀 글씨로 이 영화가 사실에 기반을 해서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사실과는 다르게 각색을 했는지 알려줍니다. 기본 설정을 해주는 것이죠. 그런데 만약 그런 문장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몰랐던 내용이라면 이게 실제 있었던 일인지 궁금할 것입니다. 또 알고 있었던 내용과 다른 장면이 나온다면 이 영화의 진정성과 역사적 고증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작 전 10초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 미리 설정 해놓은 전제가 관객들의 생각을 하나로 모으며, 영화 속으로 몰입시킵니다.
소요리문답의 전제인 1-3문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미지➊] 총107개의 연속적인 질문과 답의 방향을 설정해 주는 것이 바로 1문에서 3문이었습니다. 1문은 인간의 목적이 무엇인지, 2문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지, 그리고 3문은 그 기준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얻은 답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인데, 그 기준이 바로 ‘성경’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크게 ‘두 가지’를 가르칩니다. ①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②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의무를 요구하시는가? 성경이 가르치는 이 두 가지는 4문부터 이어질 소요리 문답의 큰 두 줄기가 됩니다. [4문부터 38문까지]는 성경이 우리에게 믿도록 가르치는 하나님과 구원의 진리를 다루고, [39문부터 107문까지]는 그렇게 믿는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룹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3문을 정리하며 성경은 믿음과 행함의 책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2.소요리문답 4문
그렇다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믿음에 관한 첫 질문은 무엇일까요? 4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제가 질문을 읽으면, 여러분들이 답 해주십시오. [이미지➋]
문4.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답4. 하나님은 영이시며, 그의 존재와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선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며, 영원하시며, 불변하십니다.
첫 번째 질문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믿음이 바르게 세워지고, 자라나서, 성숙해지기 바란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보다 먼저, 하나님 그분의 존재와 속성을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전에는 혈액형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A형이라 하면 말을 가려서 하려고 하죠. 속이 좁다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B형 남자라 하면 어떻게 합니까? 조심합니다. 독특한 기질이 있다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MBTI가 그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물론 하나님의 속성을 인간의 성격유형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 그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듯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르게 아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과 행하심을 이해하는 토대가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관하여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일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수납하게 됩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신앙과도 직결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우리의 믿음이 자라납니다. 또 우리의 믿음이 자라면 우리의 행동도 그에 걸맞게 달라집니다.
그런데 오늘 4문의 답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대하여 정말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그의 존재와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선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며, 영원하시며, 불변하십니다.” 이러한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을 만들어낸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1,000번이 넘는 회의를 거듭했습니다. 수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모여 성경을 연구하고 토론하며 심혈을 기울여 이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많은 사람이 오랜 시간 연구하여 이렇게 훌륭한 답을 만들어냈다 할지라도, 이 한 문장에 하나님을 다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이 문답은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우리로 하여금 이해하도록 압축하여 정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광대하시며, 어떤 수식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완전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이러한 하나님이다”라고 자신을 계시해 주셔야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40장 역시 바로 그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소요리문답 4문의 답은 짧습니다. 하지만 이 짧은 문답에 담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결코 얕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알려주는 만큼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가고자 합니다.
3.이사야 40장의 배경
이사야서 40장은 39장까지 이어온 심판의 메시지와는 다르게 희망을 노래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고, 결국 나라가 분열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고, 남유다 역시 장차 바벨론에 의해 무너지고 포로로 끌려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본향으로 이끌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내용이 바로 4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0절과 11절입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40:10-11)
하나님께서 강한 자로 임하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동시에 목자가 양을 품에 안듯이 자기 백성을 품으시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백성들의 눈앞에는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있습니다. 나라를 잃고 포로로 끌려갈 백성들에게 바벨론은 너무나 강해 보이고 자신들은 너무나 작고 초라해 보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너희를 다시 구원하실 것이다”라는 약속이 쉽게 믿어졌겠습니까? 결국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이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그 질문에 바벨론이 얼마나 약한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12절부터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질문들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4.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12절부터 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주었느냐”(사40:12-14) 우리가 주욱 읽었지만, 이 3구절에는 10개의 질문이 있습니다. 이 질문들은 하나님과 인간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먼저 12절에 기록된 4개의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떠서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본 분이 계십니까? 아니면 한 뼘 두 뼘으로 하늘을 재어본 적은 있습니까? 아니면 땅의 티끌과 산과 언덕들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도구들로 그 양과 무게를 달아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합니다. 왜입니까? 그 일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에 모든 것을 질서 있게 만드셨습니다. 하늘과 땅, 바다의 경계를 정하셨고, 어느 것도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게 보시기에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비록 죄로 인해 세상이 타락하고 오염되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이 땅을 다스리고 보전하고 계십니다.
최근 네팔에서 일어난 대홍수의 소식을 보면서 다시 한번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키고 많은 것을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게 되었지만,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는 여전히 속수무책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사야는 우리의 시선을 자연의 거대함에서 한 단계 더 높이 들어 올립니다. 우리에게는 그토록 거대해 보이는 바다와 하늘과 산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습니까? 바닷물은 손바닥으로 헤아리시고, 하늘은 한 뼘으로 재시며, 산들은 저울에 달아보십니다. 이사야가 말하고 싶은 것은 분명합니다. 피조 세계가 아무리 광대해 보여도 창조주보다 클 수는 없다.
그런데 13절부터 질문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앞서 12절에 기록된 4개의 질문의 답이 ‘하나님’이라면 13절과 14절에 기록된 6개의 질문의 답은 ‘아무도 없다’ 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하나님을 지도하고 가르치며 교훈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데 누구에게 허락을 구하며 의논해야겠습니까? 하나님은 누구에게 배워야 하시는 분이 아니며, 누구의 조언을 구해야 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소요리문답은 하나님을 ‘영’이시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사들도 영적인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도 영혼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적 존재이고, 우리의 영혼 역시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조된 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영이시며, 어떤 피조물의 한계에도 매이지 않으시는 무한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처럼 어떤 것을 배우셔야 알게 되는 분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물어보거나, 정보를 얻거나, 조언을 받아서 지혜로워지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한계가 없고, 하나님의 지혜는 부족함이 없다.’
5.한 방울 물과 같은 인간
그렇다면 이처럼 무한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큰 존재일까요? 이사야는 이제 하나님과 열방을 비교합니다. 15절부터 17절입니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여기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다시 비유를 사용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열방은 무엇과 같습니까? ‘통의 한 방울’과 같습니다. 물통의 물을 다 쏟아버리고 마지막에 남아 있는 물 한 방울 정도입니다. 또 저울의 작은 티끌과 같습니다. 저울 위에 먼지 하나가 올라갔다고 해서 무게가 달라지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나라와 권세가 그 정도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에게 바벨론은 얼마나 크게 보였겠습니까? 바벨론은 당시 누구도 쉽게 대적할 수 없는 강대한 제국이었습니다. 남유다를 무너뜨리고,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갈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의 눈으로 바라보면 바벨론은 너무나 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바벨론을 내 저울 위에 한번 올려놓아 보아라.” 얼마나 됩니까? 작은 티끌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너무나 크게 보이는 바벨론도 하나님 앞에서는 통의 한 방울이며 저울의 작은 티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바벨론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바벨론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아무리 기도해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상황, 생각하면 할수록 두려워지는 현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문제를 만날 때 자꾸 문제와 나를 비교합니다. “내가 이것을 해결할 수 있을까?” “내 능력으로 이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내게 이것을 이겨낼 힘이 있을까?”
그렇게 나와 문제를 비교하기 시작하면 문제는 점점 커지고 나는 점점 작아집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의 비교 대상을 바꾸어 놓습니다. 문제와 나를 비교하지 말고, 문제와 하나님을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내게 바다처럼 거대한 문제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바닷물을 손바닥으로 헤아리시는 분입니다. 내게 하늘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문제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하늘을 한 뼘으로 재시는 분입니다. 내 앞에 산처럼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산을 저울에 달아보시는 분입니다.
6.한라산 등반
8월 한 달 안식월을 보내면서 저는 한라산을 한 번 올라갔다 왔습니다. 제 나름의 성취와 꺼드럭거리고 싶은 마음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한라산은 문경새재와 정말 달랐습니다. 문경새재는 정말 마실 나가는 수준이었습니다. 왕복 19km 정도를 오가는 거리였는데, 처음 4km는 무난히 올라갔습니다. 날씨가 더우니 배낭에는 물 두 병만 덩그러니 넣어서 순탄하게 올라갔습니다. 산을 자주 다니시는 분이라면 이미 거기에서부터 잘못됐다는 것을 캐치하셨을 겁니다. 문제는 6km부터 발생했습니다. 경사가 점점 급해지기 시작하더니 걸음이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뛰어서 올라가고, 벌써 정상을 찍고 뛰어 내려오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너무 힘이 들어서 몇 번을 앉았다가 데크 줄에 기대었다가 했는지 모릅니다. 설상가상으로 올라갈수록 안개도 자욱하고, 비바람도 거세어졌습니다. 내려오는 사람에게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나요? 물었더니 15분 정도면 될거라고 해서, 기운을 차리고 올라가는데 30분이 되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15분이라 말했던 사람이 얼마나 밉던지요.
그런데 급기야 일이 터졌습니다. 배가 고프고 당이 떨어져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겁니다. 산을 정복하겠다고 나선 걸음인데, 산의 가파름과 비바람이 나를 가로막는 듯 보였습니다. 그 순간 제가 자연 앞에 참 작아 보였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가쁜 숨을 들이쉬고 있는데, 내려가던 사람이 제가 불쌍했는지, 다시 돌아와서 친절하게 겉옷이 있냐고 물어주었습니다. 이런 복장으로 여기 계속 있으면 저체온증으로 큰일 날 수 있으니 일어나서 정상까지 곧장 올라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제가 용기를 내어서 그 분에게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먹을 것 좀 있으세요?” 감사하게도 그분이 달달한 시럽이 묻어 있는 비스켓을 하나 주어서 그것을 먹고 기운을 차렸습니다. 그러다 또 어떤 분이 초코바를 먹으며 내려오길래, “저도 하나 주실 수 있으세요?” 그러자 흔쾌히 자기에게 있는 것을 제게 주었습니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습니다. 사실 초코바만 있었어도, 허기진 배를 채울 무언가만 있었어도 그렇게까지 낭패를 겪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쉬운 소리를 못하는 제가 견뎌야지 견뎌야지 하면서 혼자 버티다가 결국 주저앉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참 연약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혼자 가파른 산과 비바람에 맞서려고 할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내가 견뎌야지, 내가 해결해야지, 내가 어떻게든 해보아야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 지혜에 부족함이 없고, 그 능력에 한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곁에 두고도 쓸데없는 자존심을 앞세워 혼자 버티다가 지쳐 쓰러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약하기 때문에 완전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7.비길 수 없는 하나님
그런데 이사야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렇게 크신 하나님을 우리가 누구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18절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 그런데 인간은 그런 하나님을 자꾸 무엇인가와 비교하려고 합니다. 19절과 20절을 보면 그 대표적인 모습이 우상입니다. 장인이 우상을 만들고, 금장색이 금을 입히고, 쓰러지지 않도록 단단한 나무를 골라 세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만들어야 존재하고, 사람이 세워주어야 넘어지지 않는 신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오디세이 영화 때문인지 요즘 그리스로마 신화도 다시 주목을 받는 것 같습니다. 영화에는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원작 이야기를 보면 오디세우스의 삶에 여러 신들이 관여합니다. 그런데 그 신들의 모습을 보면 과연 신이 맞는가 싶을 정도입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노하고, 서로 다투고, 때로는 인간보다 더 불완전해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국 인간이 자기 모습을 투영해서 만들어낸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자기가 만들어낸 존재를 다시 숭배합니다. 사람이 신을 만들고, 또 그 신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무나 금으로 우상을 만들지는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내 생각의 크기 안에 가두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해되면 하나님이 옳고, 내가 이해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잘못하신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면 하나님이 선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합니다. 이것도 결국 하나님을 내 기준에 맞추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신과 사람을 만든 하나님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다시 한 번 질문이 등장합니다. 마치 당연히 알아야 할 진리를 왜 모르느냐는 듯이 묻고 있습니다. 무엇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들어왔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앞의 바벨론이 너무 크게 보이니 그 사실을 잊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 위 궁창에 앉아 계시고, 그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은 메뚜기처럼 보입니다. 또 하나님은 하늘을 휘장처럼 펴시고 사람이 거할 장막처럼 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끝도 없이 광대한 하늘이지만 하나님께는 펼쳐 놓으시는 휘장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바벨론의 왕은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한번 입김을 불어버리시면 뿌리내리지 못하고 말라버리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질문하십니다. 25절 같이 읽겠습니다.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여러분들에게도 여쭤보겠습니다. 하나님과 비길 수 있는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사실을 어떻게 보여주십니까? 26절입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수많은 별들을 이끌어내시고, 그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우리 눈에는 셀 수도 없이 많아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하나도 빠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지혜는 부족함이 없고, 하나님의 능력은 한계가 없습니다. 별 하나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자기 백성을 잊으시겠습니까?
8.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
그런데 때로는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너무 멀고 아득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별들의 이름을 다 부르시는 그 크신 하나님이, 오늘 내 작은 삶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1:3).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골로새서는 더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 크신 하나님을 막연히 우러러보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잠잠케 하신 분,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분,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이 바로 그 무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이사야 40장에서 배운 이 크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성도 여러분, 본문이 말하고 있는 비길 수 없는 하나님은 결코 우리와 상관없는 먼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를 찾아오신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9.결론
그렇다면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미지➋]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며, 그의 존재와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선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며, 영원하시며, 불변하십니다.
우리 앞의 문제가 아무리 커 보여도 하나님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뜻하신 일을 이루시는 데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문제와 나를 비교하며 낙심하지 말고, 눈을 높이 들어 이 드넓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비길 자는 없습니다. 비교할 자도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더욱 견고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1.말씀을 생각하며 기도합시다. 우리 하나님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그분의 속성은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십니다. 누가 바닷물을 손바닥으로 떠서 헤아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또 누가 하늘을 손뼘을 잴 수 있겠습니까? 누가 이 땅의 먼지와 산과 언덕의 무게를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기도할 때 하나님,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해달라고, 너비와 높이와 길이를 깨달아 우리의 믿음이 바르게 세워지고, 자라나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2. 다시 한 번 기도할 때, 우리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인생의 장애물들이 많지 않습니까? 우리 앞에 있는 바벨론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얼마나 크고 두렵습니까? 얼마나 오랜 시간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까? 그 문제를 가지고 당신의 백성을 바벨론에서 구원하시며, 본향으로 이끄시는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만드시고, 사막에 강을 만드시는 분입니다. 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지으시고, 그 이름들을 기억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기억하시고, 나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포로된 나에게 자유를 주실 것을 믿으며, 긍휼히 여겨달라고,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구합시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교회여 일어나라>
3.교회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올해로 50주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50년을 꿈꾸며 하나님의 영광과 세계와 열방, 나라와 지역을 품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다음 주에 있을 가을 사경회를 위해 기도합시다. 김용의 선교사님을 통해 십자가 복음이 선명하게 증거되게 하시옵소서. 성령의 불로 우리를 태워주시고, 은혜의 강물이 흐르게 하옵소서.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도들이 올라오게 하옵소서. 돌아오는 주일부터 목장이 개강합니다. 소그룹이 강한교회가 되게 하소서. 하반기 관계전도훈련이 열립니다. 복음에 능수능란한 권능이 증인이 끊임없이 세워지게 하소서. 교회학교를 붙들어 주시고, 하반기 사역에 부흥을 허락하소서.
4.선교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5.환우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