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904 새벽기도회: 에스겔 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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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하시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를 새벽기도회 자리로 인도하시고 말씀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한 주도 저희를 은혜르 가운데 지키시고, 주일 말씀을 양식 삼아 살아가게 하시니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고, 심지어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하는 치열한 삶 가운데 있지만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복된지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복을 허락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항상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지치지 않고 부단히 살아갈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저희의 생명의 양식을 먹고자 나아갑니다. 이 말씀이 저희에게 자양분이 되게 하시고, 기도로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누리는 시간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함께하실 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8-3:3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에스겔 2:8–3:3 NKRV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도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한 주를 잘 마무리하시고, 주일에 주실 말씀을 기대하며 오늘 하루도 힘차게 보내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편지를 받아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어떤 편지가 여러분에게 가장 기억에 남으시는지요?
한번 편지 하나를 받았다는 상상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쓴 편지 하나를 받았다고 생각해봅시다. 정성껏 쓴 편지 한 장을 받아서 읽습니다. 앞면부터 읽어나가는데, 너무나도 다정한 말이 가득합니다. 그동안 고마웠던 것들, 너가 있어서 참 좋다는 말들, 몸 건강해라라는 말 등등 다정한 말들로 인해 마음이 뭉클해질 겁니다.
그런데 그 편지를 이제 뒤집어 뒷면을 읽어나갑니다. 뒷면에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얘야, 그 버릇은 이제 좀 고쳐라. 내가 그동안 말은 안 했지만 계속 마음에 걸렸다”라는 충고의 말로 적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앞에는 다정한 말, 뒷면에는 충고와 쓰라린 말을 적혀 있는 이 편지의 뒷면은 앞면보다 사랑이 덜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같은 한 장에 이어서 쓴 것입니다. 오히려 뒷면이야말로 어떻게 보면 앞면의 다정함이 진짜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정말 사랑하지 않으면 무관심해지지 그 말은 쓰지 못합니다. 사랑한다면 다정함과 함께 바른 길로 갔으면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모습이 마치 이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면 “오늘 은혜받았다”라는 생각을 하지만, 말씀이 나의 아픈 곳을 정확히 진단하고 짚으면 “오늘 말씀 좀 불편하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우리는 이렇게 말씀을 두 종류로 나눠 놓고 살 수 있습니다. 은혜 주는 말씀과 찌르는 말씀. 위로하는 말씀과 책망하는 말씀. 그리고 우리는 은혜 쪽만 골라 담고 싶어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에스겔 말씀은 그 둘이 나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나뉜 적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종이 한 장이 나옵니다. 두루마리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한 장에 앞뒤로 빼곡히 글이 쓰여 있습니다. 오늘 선지자 에스겔에게 주신 이 말씀을 보며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찔림을 주시는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관심을 기울이시는지 깊이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먼저 에스겔은 바벨론에 끌려간 포로였습니다. 1장 앞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는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일해야 하는 제사장이지만 성전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선지자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엇부터 시키시는지 보면 에스겔에게만 아주 특이한 것을 시키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8절입니다.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같이 패역하지 말고 너의 입을 벌리고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먹으라”
이 말씀을 보면 두 개의 명령이 붙어 있습니다. “들으라” 그리고 “먹으라”입니다.
먼저 “들으라”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백성들이 하나님께 보이는 반응을 대조해서 보면 더욱더 풍성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앞절인 5절과 7절을 보면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무슨 뜻입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꼐서 “듣지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하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오히려 귀를 막아버린 자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금 에스겔에게 하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저들은 듣지 않는다. 그러나 너는 들어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대언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선지자하면 먼저 “말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되는 첫 조건으로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잘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잘 듣는 것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 명령이 우리에게 참으로 이상하게 다가옵니다. “너의 입을 벌리고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먹으라”라고 하십니다. 앞에서 말하였듯 에스겔의 원래 직분은 무엇입니까?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에게 평생 훈련된 것이 무엇입니까?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가리는 일입니다. 제사를 집례하기 위해 항상 성결해야 하는 자가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주실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밝히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저 “입을 벌려라, 내가 주는 것을 먹어라”하십니다. 에스겔 입장에서는 걱정되는 마음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혹여나 제사장인 자신이 먹으면 안되는 것을 주시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시험입니다. 마치 사도행전에서 사도 베드로에게 보자기를 내리시며 “잡아 먹으라” 하셨을 때와 똑같은 시험입니다. “내가 주는 것이면 너가 그대로 받겠느냐”라는 에스겔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일종의 시험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말씀 앞에서 매번 이 시험대에 섭니다.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줄테니 알아서 먹으라”라고 하시지 않고, 그저 “입을 벌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을 벌린다는 것은 무엇이 들어올지 내가 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주시는 대로 받아 먹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다리자 무엇이 나타납니까? 9절입니다.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손 하나가 에스겔을 향해 뻗어 옵니다. 그리고 그 손에 들린 것은 음식이 아니라 두루마리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종이입니다. 음식이나 먹을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줄 알았는데, 먹으라고 주신 것이 두루마리입니다. 물론 지금 에스겔에게 보이는 것은 환상입니다. 환상 중에 하나님께서 두루마리를 에스겔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오늘 말씀의 핵심적인 말씀을 하나님께서 이어서 하십니다. 10절입니다.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라는 것은 앞뒤로 글이 쓰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조금 더 면밀하게 보면 아주 특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종이 앞뒷면에 글을 쓸 수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고대의 두루마리에는 앞뒤로 글을 쓰지 않습니다. 보통 한쪽 면에만 글을 씁니다. 뒷면까지 쓰는 일은 굉장히 드뭅니다. 그런데 이 두루마리는 앞면에만 쓰자니 공간이 모자라서 뒷면까지 쓴 것이 아니라 아주 의도적으로 앞뒤가 다 차 있는 것입니다. 결코 여백이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완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적힌 이 두루마리에 이것을 받은 에스겔이 자기 생각을 넣을 자리가 없습니다. 글을 더 쓸 수 있는 여백이 없으니 이 두루마리에 에스겔이 손댈 수가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받기만 해야 합니다. 그가 전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이지 자신의 주관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둘째는 이 두루마리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앞면과 뒷면이 각각 다른 종이가 아닙니다. 한 장의 종이입니다.
그러면 그 한 장인 두루마리에 무엇이 적혀 있었을까요? “애가와 애곡과 재앙”입니다. 이 단어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세 단어 모두 장례식에서 쓰이는 언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애가”는 사람이 죽었을 때 부르는 장송곡입니다. 이 단어는 사무엘하 1장에서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을 때 다윗이 이들을 위하여 부른 애가와 같은 단어입니다. 또 “애곡”은 상을 당한 가족과 곡하러 온 사람들이 내는 신음 소리입니다. 문자적으로 “우르르 울림, 으르렁거림”이라는 슬픔의 신음을 표현하는 의성어입니다. 이것이 명사형으로 굉음이라는 뜻으로 욥기에서 사용되고, 시편 90편에서는 “한숨”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마지막으로 “재앙”은 무언가를 크게 잃었을 때 터져 나오는 외마디 비명입니다.
여러분, 이 에스겔이 평생 들고 다녀야 할 두루마리에 적힌 것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노래가 아니라 장례식 때 들리는 곡소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이 나쁜 소식만 전한 것이냐는 질문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에스겔을 읽어 보셔서 아시겠지만, 에스겔은 나중에 마른 뼈들이 생명을 얻어 큰 군대가 되는 회복의 말씀을 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겠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오늘 말씀에는 이러한 회복의 말씀, 어떻게 보면 긍정적인 말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통곡하고 한탄하는 곡소리만 적혀 있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좋은 소식은 미리 각오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전하기 힘들어하는 것은 언제나 아픈 소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피하고 싶어 하는 그것부터 먼저 에스겔에게 먹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듣기 좋은 부분만 취사 선택하여 골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듣기 싫은 말씀이 적혀 있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한 장에 다 적혀 있기에 그 한 장을 다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루마리에 대한 하나님의 추가적인 말씀과 에스겔의 반응입니다. 3장 1절입니다.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에스겔은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심지어 모세처럼 “저는 입이 둔합니다”하지도 않고, 예레미야처럼 “저는 아이라 말할 줄 모릅니다” 하지도 않습니다. 2절은 그냥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그리고 3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배에 넣으며 너의 창자에 채우라” 이것은 읽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외우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것은 몸속으로 말씀을 들여보내라는 것입니다. 너의 것이 되게 하라, 에스겔 몸속에 말씀을 가득 채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말씀에 대한 에스겔의 반응이 나옵니다.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에스겔의 반응이 결코 심상치 않은 반응입니다. 이 말씀을 조금 더 깊이 봅시다. 앞에서 에스겔이 받은 말씀은 어떤 말씀이었습니까?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적힌 그 두루마리입니다. 장례식 때 들리는 곡소리가 빼곡히 적힌 그 종이인데, 에스겔이 그 말씀을 먹으니 꿀처럼 달았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내용은 장례식인데 맛은 꿀입니다. 장례식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마치 “잘 죽었다”라며 조롱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바로 오늘 말씀의 핵심이 있습니다. 에스겔이 말씀을 먹고 찾아온 달콤함은 내용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내용은 분명히 에스겔에게 쓰라린 것이었습니다. 이후에 읽으시면 아시겠지만, 에스겔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백성을 향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백성에게 쓰디 쓴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이 두루마리가 달콤할까요? 이 두루마리의 달콤함은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에스겔의 손에 쥐어 주셨다는 사실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용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달콤한 것입니다.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백성이 나쁜 길로 가지 않길 바라시는 하나님. 즉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 안에서 주어지는 말씀이기에 이 말씀이 내용에서는 쓰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달콤합니다.
따라서 말씀은 본래 달콤합니다. 시편 기자가 “주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달다”고 노래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말씀이 담고 있는 내용은 때로 쓰라립니다. 우리의 죄를 정확히 짚고, 내가 감추고 싶었던 부끄러운 모습을 들추어 냅니다.
그러나 그 쓰라린 내용도 단 말씀의 일부입니다. 내 입에 맞고, 나한테 달기 때문에 단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단 말씀입니다. 에스겔이 받은 말씀은 두 개의 두루마리가 아닙니다. 한 장의 두루마리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이제 내용은 쓰지만, 달콤한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할 것입니다. 이 에스겔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백성들에게도 이 말씀은 쓰라릴 것입니다. 오늘날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사역자를 통해 전해지는 말씀에서도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쓰라린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설교자는 선지자가 아닙니다. 에스겔과 같지 않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계시를 받았습니다. 어떠한 설교자도 선지자와 같지 않습니다. 설교자는 새 말씀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을 먹고 그 말씀을 청중에게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에스겔 말씀이 여전히 우리 교회와 우리 교회 강단에 관한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강설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족한 사람의 입을 통해서도,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이 성경이 뜻하고 있는 것이라면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따뜻해지고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만 듣고 싶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가 아닌 게 아니라 분명히 성경에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설교를 들으면서 우리의 죄를 지적할 때 우리의 마음이 찔리고 불편한 것도 똑같은 말씀이자 은혜입니다. 찔린다는 것은 말씀이 내 겉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안까지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고 말씀합니다. 아프지 않은 검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검은 우리를 죽이는 검이 아니라 수술하는 의사의 메스와 같이 생명의 검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은 더 분명하게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성도 여러분,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은 지적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지적은 관계의 증거입니다. 그러니 설교자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죄 지적도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징계를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것이 가장 강력한 증거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를 찌르는 말씀이 선포될 때 그 말씀은 하나의 두루마리라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이 은혜와 찔림을 한 장에 담고 있다는 이 진리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자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세상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들추어 내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지 않고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것, 그것이 십자가가 우리에게 하는 지적입니다. 그보다 더 아픈 지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동시에 그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뜨겁게 나타난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아닙니다. 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심판과 사랑이 모두 나타났습니다. 앞면에는 “너의 죄가 이렇게 무겁다”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그런데 내가 이렇게 너를 사랑한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한 장의 두루마리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분이 그러하셨으니,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도 그러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우리의 죄를 지적하시는 것 또한 은혜의 말씀임을 되새기고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하나의 두루마리라는 것으로 알고 아멘으로 받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에스겔의 입에서 곡소리 적힌 두루마리가 꿀처럼 달았던 것같이,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기에 우리를 찌르는 그 말씀도 우리 안에서 달콤한 말씀이 되기를, 그리하여 우리가 은혜만 골라담는 자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 한 장을 앞뒤로 다 받아 먹는 귀한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두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에게 말씀을 주시고, 특별히 에스겔 말씀을 깨닫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에스겔은 두 두루마리가 아니라 하나의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 이 두루마리에는 회복의 말씀도 있지만, 죄를 지적하는 쓰라린 말씀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며 날마다 저희에게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저희의 죄를 지적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고 이것을 아멘으로 받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통제하고 착취하고자 하는 폭군이 아니라, 가장 따뜻하신 아버지임을 기억하고 이 언약 관계 안에서 저희의 죄를 지적하신다는 것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항상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저희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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