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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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
시편 63편 1-8절
최근에 저의 자동차 배터리가 계속 방전이 됐었습니다. 
차를 운전해보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정말 가끔가다가 배터리가 멀쩡한데 한번씩 방전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점프를 뛰어야 합니다. 
모르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으니까 점프 뛰는거는 
다른 차나, 장치에 연결을 해서 배터리를 충전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저는 최근 2주동안 배터리가 6-7번 방전 되었습니다.
이럴경우에는 배터리 잔량에 문제가 있는것이기에 점프를 뛰는 그때에는 운행이 가능하지만 시동을 꺼버리면 금새 배터리가 방전이 됩니다. 
그래서 이거는 점프를 뛰는거로는 궁극적인 해결을 할 수 없습니다. 
배터리를 아예 새거로 갈아끼워야 하죠.
그런데 지금 현재 제가 이렇게 하고 있는데 
저는 휴대용으로 자동차 점프를 뛰는 장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제 배터리는 갈지 않고 이렇게 타고 다니면 될까요?
일주일에 2-3번 방전 될 때 마다 임시로 계속 점프를 뛰어서 타면 될까요..?
안되죠 근본적인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배터리를 갈아야 하는 것이죠.
제가 이 말을 왜 드리는가...? 
사실 우리의 예배에도 근본적인 것, 다시 말해서 본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질문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금요기도회에 왜 나오셨습니까?
여러분은 왜 오늘 하나님을 예배하고 계십니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정말 다양한 이유로 이 예배에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걱정과 고민이 있어서, 어떤 사람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서, 
어떤 사람은 의무감으로 나와야 하니까
먼저는 어떤 이유로든 이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여러분들 
너무 잘하셨다고 격려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이 예배의 자리에 나왔다는 것 이 자리를 지킨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이 기쁘게 여기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한 단계 더 성장해야 하기에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그게 예배의 본질입니까?
그리스도인이 예배를 드리는 목적이 오늘 이 예배의 나오는 이유가
정말 거기에만 있는 것 입니까? 
예배의 진짜 본질은 무엇일까요? 
신학자 존 오웬은 예배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배는 기계적인 종교의 의무가 아니라, 
신자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나누는 생명력 있는 대화이자 사랑의 교제이다.
다시 말해서 예배는 어떤 의무감도 아니고요. 
나의 걱정과 고민의 해결을 위한 수단도 아니고,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을 원하며,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 사랑의 교제를 하는 것이죠. 
그런데 마치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모습은 배터리를 가는게 아닌,
그저 부수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듯 해 보입니다.
나의 문제, 어려움을 놓고는 갈망하는데, 걱정과 고민과 염려를 놓고는 갈망하는데 
정작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 
하나님 자체를 갈망하는게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토저라는 신학자는 오늘날을 거룩한 갈망을 잃어버린 세대라고 이야기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나옵니다. 기도도 합니다.
문제와 걱정을 하나님께 해결해달라고 간구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이유로 더 이상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는거죠. 
더 이상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과 굶주림이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교제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배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배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63편은 다윗의 고백을 통해 
우리에게 한단계 더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진정으로 행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질문 앞에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고백이 우리의 예배가 바로 서길 소망합니다.
다윗의 상황과 고백
오늘 본문 1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지금 다윗의 처지가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지금 다윗의 현실적인 상황은 물이 없습니다. 
주위를 보아도 모든 것이 매말라버렸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상황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가 있는 처참한 신세에 놓여 있습니다.
물론 어떤 학자들은 이게 사울에게 쫒길 때인지, 
압살롬에게 쫒길 때인지 모른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11절에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라는 표현을 보며
다윗이 왕이었을 때다 그러니 압살롬에게 쫒길 때라는 주장을 합니다. 
어찌되었든 왕이었던 그가 한 순간의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얼마나 비참하고, 힘이 들겠습니까...? 
그런데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다윗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광야와 같은 매말라버린 황폐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육체적으로는 광야 한가운데서 마실 것도, 먹을 것도 없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생존의 위협을 받으며 쫒기는 도망자의 신세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여 갈급한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그에게는 지금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나의 육체적인 현실의 문제들
하나님과의 관계로 말미암는 영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런 다윗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고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다윗은 이런 상황과 순간 속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했다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고,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한다는 고백은요.
나의 전인격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온 몸이 모든 신경과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죠.
아니 그런데 여러분 영혼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육체는 먹을 음식을, 마실 물을, 지금 처한 상황을 갈구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의 영적인 현실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현실
눈을 뜨면 광야고, 당장 오늘 마실 물도, 먹어야 할 음식도, 
언제 자신을 잡으로 올지 모르는 그런 상황과 순간이 아닙니까? 
그런데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어떻게? 
어떻게? 다윗은 이런 갈망을 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광야 가운데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수 있었을까요?
다윗의 고백의 이유를 2-3절에서 함께 보겠습니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다는 표현에 집중해보십시오.
이 표현은 과거 성소에서 경험했던 기억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성소의 기억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에게는 과거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과거의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습니다.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헤세드’ 하나님의 책임지시는 신실하신 그 사랑이
나의 생명을 덮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아니 덮고도 남는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그 사랑이 내 생명을 덮고도 남는다.
다윗은 살아오면서 수많은 생명의 위협 가운데 있었습니다.
어린시절 맹수로부터 목숨을 걸고 자신의 양을 지켜야 했습니다.
거대한 골리앗 앞에서도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사울에게 쫒기며 죽지 않기 위해 오랜 세월을 도망다녀야 했습니다.
그는 살기 위해 미친 척도 했습니다. 
지금은 자신이 사랑했던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모든 일을 겪어보니..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자비가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하심이
내 생명을 덮고도 남는다는 것이죠. 
그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지금까지 나를 지켜왔고 
지금까지 나의 모든 삶을 인도했고, 앞으로의 삶도 인도하실 것이구나
여러분, 이게 다윗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갈망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다윗은 오늘 처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아닙니다. 
과거의 그 경험을 회상하며 과거의 하나님의 임재를,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며
지금 이 광야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습니까? 짧으면 대략 20몇년, 길면 30몇년을 살았지만 
돌아보면 우리에게도 수많은 광야가 있었습니다.  
나의 건강, 경제적인 어려움, 가정의 어려움, 직장의 어려움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으로 넘어지고 좌절하던, 
때로는 포기하고 싶었던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돌아보십시오. 
그 모든 순간에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덮고 있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
그래서 다윗이 4절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이러므로’라고 시작하며 2-3절과 같은 경험이 있기에 
내가 그 하나님을 경험했었기에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평생’ 자신의 삶이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 이죠.
여러분 손을 든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간구,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겠다는 자세입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는 것 이죠.
다윗은 지금 상황이 좋아지면 찬양하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 다윗은 여전히 광야에 있습니다. 눈을 뜨면 해결되지 않은 현실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셨기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을 덮고도 남기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죠.
그 근거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고백 가운데 
다윗은 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 5절입니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골수와 기름진 것은 잔치때에 먹는 진수성찬 풍성한 음식을 이야기 합니다.
마실 물도, 먹을 음식도 없었던 광야에서 
기름진 풍성한 음식을 먹는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얼마나 만족하겠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나의 삶이 
이 광야에서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를 만족시킨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의 영혼은 잔치에 참여한 것 
아니 그 이상의 만족감을 표현 하는 것입니다. 
1절의 공허함이,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그것이 지금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상황과 환경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험하자, 
나를 억압하는 육체적인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는 
만족감과 채움을 누리는 것이죠.  
6-7절입니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새벽, 밤이라고 하는 것은 불안과 공포가 가장 커지는 때입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
어두컴컴하여 사방이 보이지 않아 누가 지금 나에게 오고있는지
나를 죽이려고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그 상황 
다윗은 그 두려움의 시간에 불안 대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묵상합니다.
두렵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은혜를 기억했고, 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채우심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다윗은 경험한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다. 새가 자신의 새끼를 날개로 품어 보호하듯이 
주님은 나를 보호하신다... 
마지막으로 8절을 믿음으로 선포합시다. 찬양팀 올라와주시고요.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내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여기서 따르다는 의미는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에게 가까이 붙어 
떨어지고 싶지 않아하는 그런 밀착된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내 영혼이 하나님과 떨어지고 싶지 않아하는....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께 붙어있을 때에 
그때에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신다고 합니다.
붙드신다는 의미는 ‘굳게 지키다’ ‘꼭 붙잡아주다’라는 의미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굳게 붙잡아주고 계시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다윗의 이 모습을 보면서 저는 다윗의 삶이 그려지더라고요… 
광야 가운데 있습니다. 진짜 비참하고 힘든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게 아니라,
이전에 은혜를 기억하며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그러자 여전히 상황과 환경은 변하지 않았지만 
다윗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영적인 배부름과 충만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것이 육체를 만족시킵니다. 두렵지 않아요. 불안하지 않아요. 염려되지 않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하실 것이기 때문이죠.
지금 이 광야 뿐만이었겠습니까? 이것이 다윗의 삶이었습니다.
이 모습이 어린 시절 양을 치며 맹수를 만났을 때도,
다윗이 저 거대한 골리앗 앞에서 서있을 때에도,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며 살았을 때에도 그의 인생에 수많은 광야의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는 그때마다 이전에 하나님을 만났던 때를 떠올리며, 
은혜를 떠올리며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그렇게 그렇게 은혜가 계속 쌓여 나가는 것이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우리의 인생은 너무 단순해요. 어떤 자극이 있죠. 
더 큰 자극이 있으면 이전에 자극을 느끼지 못합니다.
아픔이나 괴로움이 있잖아요. 근데 그거보다 더 큰 기쁨이 생기면 그것을 덮어버려요... 
다시말하죠? 지금 광야 가운데 있습니까? 걱정과 염려가 있습니까? 
그 모든 것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덮으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경험했잖아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을 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는
오늘 본문에서도 말하잖아요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을 덮고도 남는다.
그러니 하나님을 갈망하십시오... 본질에서 시작하십시오.
어떠한 이유로 이 예배의 자리에 나왔든 가장 먼저 하나님을 갈망하길 소망합니다.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음을 기억하며....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자들이 있습니까? 괜찮습니다...
오늘 하나님을 갈망하며 나아갈 때에 은혜의 시작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1절로 다시 돌아오면 굉장히 좋습니다.
처음에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왜 오늘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중간에는 다윗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무엇을 가장 갈망했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에는 회중에게 다시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갈망해야 합니까?”
그리고 1절을 다시 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수많은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본문의 흐름
내가 하나님을 찾음
→ 내가 하나님을 기억함
→ 내가 하나님을 찬양함
→ 내가 하나님을 가까이 따름
→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심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은 과거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고, 그 기억으로 현재의 광야를 견디며,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게 됩니다.”
이렇게 가시면 지금 준비하신 설교가 단순히 “하나님을 갈망합시다”라는 권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왜 갈망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게 됩니다.
그 답은
“이미 나를 사랑하시고 도우셨던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광야에서도 하나님을 계속 갈망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는
“과거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의 모습은 무엇인가?”
하면
“찬양하고, 만족하고, 기억하고, 가까이 따르며, 하나님의 붙드심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1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런데 6절에 와서는 그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광야에서 전혀 새로운 하나님을 발견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성소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경험했습니다. 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움이 되어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의 밤이 찾아왔을 때 다윗은 눈앞의 상황만 바라보지 않고 자신이 이미 경험한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이것이 핵심입니다.
시제가 중요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실 것이다”
라고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도움이 되셨다.”
라고 과거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회상합니다.
그러므로 6절의 “기억”과 7절의 “도움이 되셨음”은 아주 강하게 연결됩니다.
6절:
“주를 기억한다.”
7절:
“주께서 나의 도움이 되셨다.”
즉 다윗은 무엇을 기억합니까?
막연하게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나를 도우셨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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